신 경부철도가/강은교
재빠른 기차를 타고 지나며 보니
인간의 집들이 슬퍼 보입니다.
잠자리처럼 안테나가 날아다니는
‘승리식품’을 보세요‘
금간 기와들이 덧니처럼 돋아난
저기 ‘협동조합’을 보세요.
사과밭엔 가득
지구가 매달려 있는데
한 여자가 치마를 털고 있습니다.
저 집은 ‘신진 부화집’
검은 연기 죽음처럼 오르는
외딴 ‘불고기집’
보세요. 입술 파래서 서 있는
새마을 이층집.
대전 좀 지나면
반쯤 가슴이 뚫린 돌산도 있습니다.
돌산의 이마에
넘치는 핏물
얼어서는 낙동강에 고개 처박아
시퍼렇게 출렁입니다.
어디서 바다가
한 움큼 달려옵니다.
임진란 때 낭자하던 소리로
어이어이 우는 얼굴들이
보입니다.
겁에 질린 새마을 이층집
그 창문이
빈집처럼 열려 있는 위에
<시 읽기> 신 경부철도가/강은교
강은교의 위 시는 최남선의 <경부철도가>를 떠오르게 합니다. 신문학의 개척자인 최남선은 1908년 <경부철도가>를 지어 근대문명의 표상인 경부철도를 찬탄하고, 이것을 통하여 청소년들에게 조선 땅 남쪽의 지리공부를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강은교는 <신 경부철도가>를 지었습니다. 최남선은 근대문명의 화려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강은교는 경부철도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애잔한 삶에 시선을 주었습니다. 최남선이 긍정과 희망 그리고 계몽을 염두에 두었다면, 강은교는 사색과 성찰 그리고 연민을 저변에 깔고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인하여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어보았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누구든지 다 다르다는 데서 시작해야 인간의 리얼리티에 닿을 수 있다는 말처럼, 다같이 경부선 열차에 몸을 긷고도 모든 사람들이 시선은 각각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강은교가 위 시에서 보여주는 시선도 그런 수많은 시선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부선 기차에 몸을 실은 강은교는 무한한 연민 속에서 경부철도를 따라 펼쳐지는 사람들의 살림살이에 안쓰러운 마음을 보냅니다. 서울을 떠난 부산으로 가는 경부선 열차 속에서 그는 먼저 잠자리처럼 텔레비전 안테나가 지붕 위에서 날리는 “승리식품”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공장인지 가게인지 이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승리식품”이라는 이 이름 앞에서 코끝이 시큰해집니다. 생이란 죽음과 허무, 그리고 고통과 좌절을 온전히 피해 갈 수 없는 비극적 바탕 위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것을 사는 일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을 앎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승리’하겠다는 “승리식품”의 주인, 아니 우리들 모든 인간의 소망이 시인과 우리들이 마음을 바람처럼 흔들고 눈물샘도 조용히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인간인 우리는 ‘승리’해야지요. 그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치지 않고 꿈꾸어야지요. 그래야 죽음의 시간이 오기까지 우리의 삶을 ‘연기’시킬 수가 있지요.
기차는 부산을 향해 내려가고, 그러는 사이 강은교는 금 간 기와가 덧니처럼 돋아난 “협동조합”을 발견합니다. 금 간 기와가 넉넉하지 못한 삶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라도 ‘협동’하고 ‘조합’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누추라고 고달픈 생을 함께 뚫고 나가겠다는 안간힘이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협동해야지요. 그리고 조합도 만들어야지요. 서로 눈을 흘리고 질투하면서도 무리지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군집성 동물이 바로 인간이 아닌가요. 국가라는 이름조차 하나의 “협동조합”과 같은 것이라면, 인간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그들의 생존을 유지하면서 생활을 꾸려 나온 길은 눈물겹지요.
강은교는 다시 “신진부화집”을 봅니다. 이 집의 옆에는 사과가 우주를 머금고 매달려 있는데, 그 집의 주인 같은 여자는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습니다. “신진부화집”에서 나온 여자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아니겠지요?
‘신진’도 ‘부화’도 모두 시인의 마음을 더욱 깊은 연민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신진’이라면 한자로 ‘新進’이라고 쓸 것입니다.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안간힘과, 그래야 살아남는다는 인간사의 냉혹한 이치가 이 말 속에서 퍼져 나옵니다. 부화도 신진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화도 자연 그대로는 안 되고 기계를 써서 효율적으로 해내야 된다는 것이지요. 신진이라는 말도 그렇거니와, 부화라는 말도 인간들의 고단하며 냉혹한 삶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아. 시인의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기차는 계속 달리고, 그 옆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삶도 계속하여 펼쳐집니다. 강은교의 시야엔 이제 외딴 곳에 서 있는 “불고기집”이 들어왔습니다. ‘외딴 곳’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며, 모두가 먹고살기 위한 안간힘의 표정이겠지요. 불고기집에서 진동하는 검고 매캐한 연기는 살기 위한 욕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강은교의 계속되는 연민의 마음은 “새마을 이층집”까지도 “입술이 파래서 서 있는” 것으로 보고 맙니다. 하기야 ‘새마을’이라는 말도, 시골에 들어선 ‘이층집’도 모두 그 속에 얼마나 짙은 아픔을 담고 있는 것인가요. 새마을도 그렇거니와 새마을 이전의 가난한 시골 마을도 마음을 복잡하게 하기는 마찬가지지요. 또한 서양식 집을 흉내 낸 이층집의 어색함도 그러려니와, 이런 서양식 집이 들어서 이전의 연약한 초가집도 마음을 무겁게 하기는 마찬가지지요.
강은교는 대전을 조금 지난 돌산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산이 아니라 터널로 가슴이 뚫린 상처 난 산입니다. 가슴이 뻥 뚫린 돌산을 보는 것도 문명사의 뒤안길을 바라보는 사람에겐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런데 강은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돌산의 이마에서 솟구치는 핏물을 봅니다. 정치적인 아픔과 분노까지도 이 돌산에 연루된 느낌을 받습니다. 산이 인간들과 결부될 때 산은 그만의 자연성을 잃고 이간사의 함의를 그대로 품게 되곤 하지요. 강은교가 경부선 기차 속에서 만난 이 돌산에서도 그런 모습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강은교는 이 돌산의 핏물이 낙동강과 섞이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낙동강에 고개를 처박고 그 핏물이 시퍼렇게 출렁인다는 것을 볼 때 돌산의 시대적, 정치적, 인간적 분노는 아직도 격하기만 합니다.
낙동강과 뒤섞이는 돌산의 분노를 보면서, 강은교는 더 큰 넓이의 상상을 합니다. 그는 어디서 바다가 달려오는 듯한 상상을 하며, 그 속에서 벌써 수백년 전의 역사가 되고 만 임진왜란의 아픔을 떠올립니다. 승부와 관계없이 전쟁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비극의 현장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고, 그는 역사 속에서 그 희생자가 되어 “어이 어이 우는” 인간들이 아픔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상상은 낙동강 물결과 결합되다가 다시 창문이 빈집처럼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그 집은 아무것도 훔쳐갈 것이 없는 시골의 빈곤한 농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마을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가 시대에 순응한 순박한 시골 농가로 보입니다. 시대와 역사의 비극적인 아픔은 이런 집들과 연관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너무 과격하다면, 가난한 농가의 삶 속에서 “어이어이 우는” 인간들의 고달프고 아픈 내면을 읽어낸 것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경부철도가 아니더라도 열차에 몸을 싣고 단순하게 여행을 하다보면 세상은 풍경으로 스치거나 그렇게 보이기가 쉽습니다. 모든 것이 먼 곳의 남의 일 같고, 액자 속의 그림 같고, 그리하여 누추한 그들의 속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냥 그들을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보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이처럼 세상과 일정한 거를 유지하고 그것을 풍경으로만 만날 때, 우리는 도시의 깍쟁이처럼, 철부지 어린이처럼 얼마나 가벼운 몸이 되는가요.
그러나 위 시의 강은교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그를 무거운 몸으로 만들었고, 그는 이 축축한 몸과 마음을 끌어나고 사람들의 삶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는 이 염려의 마음을 시의 첫 부분에서 슬퍼 보인다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당신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이 대책없는 사랑이 위의 시를 쓰게 했고, 강은교로 하여금 시인으로 살도록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최남선이 <경부철도가>에서 보여준 유쾌함과 건강함도 사람을 끄는 힘이 있지만, 강은교가 위 시에서 드러낸 슬픔과 연민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정서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