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의 종교개력은 중세교회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인관용이 대두되었고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럽인들도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나갔다. 프랑스 혁명은 유대인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권위를 처음으로 부여했다. 네덜란드와 함부르크는 이미 유대인들에게 제한적이긴 하지만 자유를 주었고,1791년 프랑스는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주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유대인의 권리를 법으로 인정했다. 약 백 여년 간 유대인은 비교적 많은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안티세미즘이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19세기 러시아는 반 유대인 법령을 제정하여 유대 공동체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1881년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반 유대적인 우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가되기 시작했다. 1894년 프랑스의 대위 드레푸스(Alfred Dreyfus)는 프랑스의 기밀을 독일에 넘겼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드레푸스가 썼다는 편지는 처음부터 위조된 것이었다. 프랑스 언론은 드레푸스가 유대인임을 강조했고 그는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899년 재판이 다시 열리고 그는 감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무죄는 몇 년 뒤에야 인정되었다.(에밀 졸라도 그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안티세미티즘에 자극 받은 유대인은 유대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시온주의
유대국가는 헤스(1812-1875), 핀스커(1821-1891), 헤르즐(1860-1904)에 의해 구상되었고 그 꿈은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시온주의의 본격적인 활동은 헤르즐(Theodor Herzl1860-1904)에 의해 서서히 막이 오르게 된다.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민족의식은 없었다. 비엔나 신문사의 기자로 파리의 특파원이 된 헤르즐은 파리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접하면서 유대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박애, 평등을 부르짖는 혁명의 국가였던 프랑스에는 반 유대주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헤르즐은'유대국가(1896)'라는 소책자에서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대인국가 건설만으로 해결된다고 주장했고 이 것은 유대인 사회에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제안으로 전 유럽의 유대인 대표가 참가한 제 1 회 시온주의 총회가 1897년 바첼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는 모두 2맥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이 때 헤르즐의 지도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1회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국제법의 지지를 얻어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을 위한 국가 건설을 시온주의의 목표'로 결정하였다. 헤르즐은 정치적인 외교활동을 통하여 유대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보고 터키와 영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러한 방침에 모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와 유럽의 유대인이 겪는 고난을 조금이라도 빨리 덜어 주기 위하여 영국이 제안한 '우간다에 유대국가 건설' 안을 받아들여, 제 5 회 시온주의 총회에 제출했으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1904년 그는 총회에서 우간다 안에 대해 사과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에 동참하겠다는 감동적인 연설은 한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한 헤르즐은 총회가 끝난 며칠 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97년 1회 시온주의 총회가 끝난 뒤 9월의 그의 일기장에는 "나는 여기에 유대 국가를세웠다. 만일 내가 이 사살을 크게 소리친다면 모든 세상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5년적어도 50년 안에 모든 이들이 확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있었다.
히브리어의 부활
히브리어의 부활은 계몽주의 시대에 싹트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히브리어는 구어로사용되지 않았다,. 벤 예후다(Eloezer Ben Yehudah 1858-1922)는 현대어로서의 히브리어 부활에 공헌하였다. 1883년 예루살렘에서 교사직을 맡은 그는 학생들에게 히브리어로 가르쳤고, 히브리어가 일상생활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히브리어 신문을 발행했다.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으로서 이민을 온 교육받은 젊은 유대인들은 새로운 유대인 사회에 적합한 언어는 히브리어라고 여겼다. 히브리어는 유대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이들의 노력으로 히브리어는 팔레스타인의 공식언어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독립
영국의 외무상인 발포어(Arthur Balfour)는 유대국가의 설립을 지지한다는 발포어 선언(1917)을 하였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882년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은 점차 증가하여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8만 5천명에 달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주변 아랍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하가나'라는 자위대를 조직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6백만의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희생을 당했다. 영국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불법 이민자의 숫자는 증가했다. 영국의 식민통치하에 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와 독립을 위한 투쟁은 식민지의 무역에 의존하던 영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전후 미국은 중동의 이익에 관여하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영ㄲ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과 독립을 위한 유대인의 계속적인 투쟁은 영국으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맡기게 한다. 1947년 5월 유엔의 팔레스타인 특별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내의 두 개의 자치 국가안을 제시한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이 안을 표결에 붙여 찬성 33, 반대 13으로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다. 1948년 영국이 철수를 시작하고 최종적인 철수 전 날인 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