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가 잘라낸 자유의 철학
시장통 한복판, 챙그랑 챙그랑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가위 소리는 묘한 주술과도 같다. 붉게 칠한 볼, 투박하게 분칠한 얼굴, 그리고 형형색색의 천 조각을 덧댄 우스꽝스러운 바지. 사진 속 엿장수는 마치 팍팍한 일상에 균열을 내기 위해 파견된 거리의 광대이자 철학자처럼 보인다. 그의 거친 손에 들린 무쇠 가위가 허공을 가르고 찐득한 엿 가락을 툭툭 끊어낼 때, 우리는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오래된 진리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묵직한 명제다. 이 거리의 연금술사가 들려주는 가위질의 철학을 삶의 궤적에 빗대어 사유해 본다.
과거 엿장수의 구루마(수레)는 일종의 마법적인 교환소였다. 찌그러진 양은냄비, 밑창 떨어진 고무신, 집안 구석에 굴러다니던 빈 병과 쇳조각들. 세상의 기준에서는 이미 수명을 다해버린 쓰레기들이 엿장수의 저울 위에 올라가면 입안을 황홀하게 녹이는 달콤한 엿 가락으로 변모했다.
이 교환의 과정에는 자본주의의 차가운 등가교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엿장수는 고물의 무게와 질을 따지기도 하지만, 코흘리개 아이의 간절한 눈빛이나 시장통 아주머니의 넉살 좋은 농담 한마디에 더 큰 가치를 매기기도 한다. 쓸모없음이 찰나의 달콤함으로 바뀌는 이 가치의 전복은, 우리에게 묻는다. 세상이 정해놓은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때로는 남들이 버린 상처와 실패의 조각들도, 내면의 가위질을 통해 얼마든지 삶의 원동력이라는 달콤한 에너지로 치환될 수 있음을 엿장수는 묵언의 행위로 보여준다.
엿판 위에는 불규칙하게 잘려 나간 엿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어떤 것은 크고 두툼하며, 어떤 것은 작고 볼품없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킬로그램(kg), 밀리리터(ml), 칼로리(kcal)로 철저히 계량하고 규격화한다. 그러나 엿판 위에는 자(尺)도, 정밀한 전자저울도 없다. 오직 엿장수의 감각과 기분, 그리고 허공을 가르는 가위의 리듬만이 존재할 뿐이다.
“엿장수 마음대로."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판매자의 독단적인 횡포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철학적 잣대로 들여다보면 이는 ‘절대적 자유의지와 주체성'에 대한 선언이다. 엿을 크게 자를지, 작게 자를지, 덤으로 한 조각을 더 얹어줄지는 전적으로 그의 가위 끝에 달려 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끊임없이 타인의 잣대에 맞춰 우리 삶의 크기와 모양을 규격화하려 하지만, 결국 내 시간과 에너지, 마음의 크기를 잘라 나누는 권리는 오직 나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엿장수의 경쾌한 가위질은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기지 말라는 날카로운 경고음이기도 하다.
시선을 그의 복장으로 옮겨보자. 소매 끝이 해진 헐렁한 셔츠와, 허벅지며 종아리에 네모반듯한 원색의 천들을 얼기설기 기워 놓은 바지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부조리극이다. 거기에 땀에 지워져 가는 하얀 분칠과 익살스럽게 칠한 붉은 연지는 삶의 고단함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가면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결코 한 장의 매끄러운 비단결 같을 수 없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찢어지고 구멍 나는 것이 인생이다. 엿장수는 찢어진 바지를 버리거나 부끄러워하며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 눈에 띄는 색깔의 헝겊을 덧대어 기워 입음으로써, 상처와 결핍을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자 예술로 승화시킨다. 불완전함을 수용하고 그 위에 색을 덧입히는 태도, 이는 니체(Nietzsche)가 말한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애)'의 가장 서민적이고도 생생한 발현이다. 무거운 현실을 가장 가벼운 농담의 형태로 이겨내는 자만이 시장통이라는 치열한 생태계에서 웃으며 엿을 자를 수 있다.
’엿장수 마음대로'가 삭막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숨겨진 **'덤'**이라는 미덕 때문이다. 정량(定量)을 지키는 것은 공정하지만 건조하다. 그러나 엿장수의 가위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다. 엿을 자르다 부스러진 조각들, 혹은 기분이 좋아서 툭 쳐내어 건네는 덤 한 조각에는 규격화된 사회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인간적인 온기가 서려 있다.
그의 자의성(Arbitrariness)은 인색함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예측 불가능한 환대로 향한다. 철저한 계산과 이익만이 오가는 세상에서, "그냥 내 마음이여!"라며 건네는 덤은 효율성이라는 현대의 종교를 무력화시키는 따뜻한 파괴력을 지닌다. 논리와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적한 정(情)이 바로 엿 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는 것이다.
결론: 당신의 가위는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가. 철거덕, 철거덕. 오늘도 사진 속 엿장수는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가장 진지하게 허공을 가위질한다. 단단하게 굳어진 엿을 깨기 위해 가위를 내리치는 그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라는 이름의 엿판을 메고 살아가는 생의 엿장수들이다. 누군가는 내게 쓸모없는 비난이나 실패의 고철을 들이밀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여 끈기 있게 녹여내고, 마침내 내 삶의 달콤한 경험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엿판 앞에서 너무 오래 계산하지 말자. 남들이 정해놓은 눈금 잣대를 들이대며 내 몫의 크기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다. 투박하면 투박한 대로, 삐뚤어지면 삐뚤어진 대로 가위를 크게 벌려 과감히 잘라내면 그만이다. 때로는 나를 위해, 때로는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기분 좋게 덤을 얹어주면서 말이다.
삶의 모양과 가치를 결정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원칙,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오로지, 엿장수 마음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