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69
3월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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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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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GxCi5_oAIU (윤윤상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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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흠모했던 요셉 성인>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대단한 기여를 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 성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 안에서 요셉 성인은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요셉 성인은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충직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길을 충실히 걸어가던 의인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동반자 요셉 성인이 있었기에 마리아도 짙은 안개 속 신앙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 이후 마리아가 넘어야 할 산은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당혹해하는 부모에게 뭐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굿간 탄생, 이집트로의 피신, 소년 예수님의 돌출 발언,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마리아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고행 길이었습니다.
때로 고독하고, 때로 시련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때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그만 주저앉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마리아 곁에는 요셉 성인께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언덕처럼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리아 옆에는 ‘나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요셉 성인이 언제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기이하고 특별한 '동거생활'을 해나가던 요셉 성인의 그녀를 향한 감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약혼녀를 하느님께 ‘강탈당한’것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마리아에게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때로 ‘지금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도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마리아를 향한 강한 부성애와 보호본능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를 마음 깊이 사랑했고 흠모했던 분이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누구나 다 하는 통속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인간적인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지고지순한 영적인 사랑, 헌신적인 신적 사랑, 아가페적인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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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SNMVq3-M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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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이유>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은 항상 ‘의로움’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의롭다’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 앞에 나설 힘’을 말합니다. 돈을 꿔 가서 갚지 않으면 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갚기 전까지는 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아드님을 의로움의 옷으로 만들어 우리를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요? 의로움이 깨집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입었다면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려 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설 힘을 잃습니다.
김희아 씨를 생각해봅시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보육원에 버렸습니다. 김희아 씨는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잘못하는 다른 부모들을 평소에 심판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딸인 김희아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른 부모들을 심판한 것 때문에 더욱 자신들이 키우지 않은 딸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돈 2억 갚아”란 마지막 말을 하고 떠난 어떤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몇 년 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돈을 꿔 가서 자취를 감췄다가 형이 죽기 직전이라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왔던 것인데, 형은 마지막 힘을 주어 “내 돈 2억 갚아”란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죗값으로 내어주셨습니다. 내가 형제에게 꾸어준 돈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받아내려 한다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희생시켜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만큼 내 양심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분 앞에 나설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 힘이 의로움인 것입니다. 내가 거저 용서받았으니 거저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내어주신 하느님 앞에 설 힘을 가지게 됩니다.
구약에 대표적인 인물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막내아들 벤야민이 이스라엘 재상이 된 요셉의 은잔을 훔친 것이 발각되자 벤야민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대신 감옥에 갇히겠다고 자청합니다. 그러자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청해서 이집트에 팔려 온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제야 그들이 요셉을 만날 힘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준끼리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기나 기생충과 관계 맺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은 주는 만큼 내어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요셉은 어떻게 의로울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의로운 사람은 이웃의 죄까지도 나의 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이 짓는 죄들을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세상 모든 죄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죄는 모두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들입니다.
‘프리쳐’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지옥이 재미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지옥은 잊고 싶은 과거의 잘못들을 매일 똑같이 되새기며 사는 것입니다. 유진이라는 한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 트레이시의 집에 초대받습니다. 트레이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져 그 충격으로 자살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유진은 하느님은 더 놀라운 기적을 준비해 놓으셨고 그것을 보려면 살아야 한다고 위로해줍니다. 트레이시도 그의 말에 감동하여 자신이 하려던 쓸데없는 짓을 그만둡니다.
이때 트레이시는 유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오랫동안 트레이시를 좋아했던 유진은 트레이시에게 키스합니다. 트레이시는 유진까지 자신에게 그러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여 참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유진도 그렇게 합니다. 둘 다 죽지는 않았지만, 트레이시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유진도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힘을 가진 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꾸 그러니까 참다못한 목사님이 “그럼 지옥에나 가버려라!” 하니 지옥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이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유진이 지옥에 오자 이 홀로그램 시스템에 문제가 생깁니다. 간수들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 손들어봐”라고 말합니다. 지옥에 있는 대다수는 손을 번쩍 들며 자신들은 진짜 지옥에 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들지 않습니다. 자신만큼 지옥에 합당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치고 결코 자신이 지옥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 안에서 죄를 찾아낼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동과 생각과 욕구로 살아갑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해서 간음이 아니라 음탕한 욕구로 여인을 바라보아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욕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이 존재합니다. 이 욕구와 반대되는 사랑이 들어올 때, 내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 내 욕망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과 반대가 되는 죄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들이 다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든 크든 세상 모든 사람이 짓는 죄는 세속-육신-마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사랑하려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그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바로 사랑도 욕구이고 모든 죄의 근원도 욕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거울 앞에 서면 자신 안의 악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만약 행위만 가지고 따지자면 분명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구로 보자면 다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면 나에게 짓는 죄에 대해서도 내가 미움까지 가지 않을 무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비행기를 잡는 유도탄이 있다면 비행기는 그 유도탄을 교란하는 교란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판단이 될라치면, 그 미움은 마치 유도탄처럼 나에게 날아옵니다. 만약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교란탄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을 결국엔 심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임신하고 온 마리아의 죄를 자신이 다 짊어지려 했습니다. 요셉이 그냥 파혼하면 임신시켜 놓고 살기 싫어 파혼시키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이 판단되면 유도탄이 날아온다고 생각하고 빨리 내 안에서 그와 같은 죄를 찾아내어 교란탄으로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의로움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란탄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려는 의지로 얻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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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와 혼인을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가 죽을 수도 있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하였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요셉은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와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천사의 말은 동정 어머니를 그의 아내로 부를 자격을 갖도록 하였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사무엘 하권에 보면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이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상급을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과의 약속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튼튼히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자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믿고, 의탁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즉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요셉 성인이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은 분이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씩 실천하고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순간으로 될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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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들과 캠핑을 가면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해 주던 신부님이 임기가 다 되어서 한국으로 갔습니다. 장비도 마련하고, 예약도 하던 신부님이었습니다. 신부님의 빈 자리를 채워 줄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나서지 않았지만 예약도 하였고, 장도 보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제게도 그런 역할이 주어지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은 되지만 막상 역할이 주어지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옆에서 신부님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동북부 엠이도 작년에 대표부부가 새로 선출되었습니다. 전임 대표부부는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어서 동북부 엠이를 잘 이끌어 왔습니다. 신임 대표부부는 젊지만 신선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으로 팬데믹 상황에서 동북부 엠이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였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선택된 대통령이 주어진 역할과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역사는 혼자서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신앙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축복하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권을 튼튼하게 하였고,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였고,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낯선 땅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지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 땅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신앙의 역사도 한 사람이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분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자렛의 성가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제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어린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던 제의였습니다. 어린 예수님께 요셉 성인은 어쩌면 높은 산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주셨고, 손을 잡아 주셨고, 많은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면 요셉 성인을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화가 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요셉은 충분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법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마리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이제 법대로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은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신앙은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이제 우리들 또한 요셉 성인의 삶을 따라서 나의 뜻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0%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2% 가능한 걱정 때문에 90%의 삶을 걱정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 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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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이 어떠한 분이신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단호하게 법정에 세웁니까?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합니까?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이런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해 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요셉은 전적으로 순명합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웠고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전형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 말씀을 이 세상에 실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요셉은 가장 겸손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늘 예수님과 성모님의 뒤에서 말없이 헌신하였지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남편으로서 동정을 지키며 얼마나 힘든 길을 걸었겠습니까?
그러기에 요셉은 믿는 이의 가장 뛰어난 표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많이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늘 이를 신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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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요한 십자가의 요한 신부님]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정이 되자>
오늘은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시며, 동정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성인의 축일입니다. 다윗 가문에 속한 요셉성인은 성모님의 법적인 남편이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나 아버지 요셉을 통해 법적인 다윗의 후손이 되셨습니다. 이로서 다윗성왕에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주님의 양부이신 요셉성인을 교회의 수호자로 받들어 존경하고, 가정의 모범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그 사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은총까지도 모두 베푸십니다.
요셉성인은 하느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님과 성모님의 보호자와 부양자로 택함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성인께서는 그 직분을 충실히 완수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그리스도의 온 교회와 관련하여 생각해 본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정당한 길로 오시도록 하느님께서 간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동정녀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았기에 성모님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면, 동정녀 다음으로 요셉에게도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며 그에게 감사와 공경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던 동안 당신의 아버지로서 요셉에게 보여 주셨던 그 친밀성과 지극한 존경심을 하늘에서도 거부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완전히 보여 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요셉성인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성모님과 약혼을 한 후 성모님의 잉태가 들어나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혼인을 한 사람이 간통을 하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성인은 그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만, 저는 요셉성인이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그 결정은 요셉성인의 의로운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가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것을 세상에 알려 상처주거나,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셉성인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성모님과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성인과 성모님과 예수님께서는 행복하게 잘 사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그곳에 1년 이상 머물고 계셨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지 위해서 요셉성인께서는 무엇을 하셨을까요?
베들레헴에서 일거리를 찾고 사람들과 만나고 1년 동안 그곳에서 일을 하기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알고 계셨고, 그분은 베들레헴 출신이셔야 했습니다.
구세주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다는 것은 온 유다인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방문하고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을 가십니다. 겨우 잡았던 일거리, 이제 좀 사람들과 친해졌는데, 그것을 모두 버리고 떠나십니다.
이집트에 가셔 얼마나 계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거기서 요셉성인은 또 다시 시작하십니다. 헤로데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오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복되고 신비롭고 거룩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릅니다. 마냥 행복하고 아무 문제없었던 가정이었습니까?
성가정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와 하나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부모님과 하나가 되셔야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요셉성인을 공경하고 기도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인을 공경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큼 요셉성인은 예수님과 하나되신 분이셨고 우리를 위해 지금도 주님께 기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사랑하올 성 요셉이시여, 저는 제 자신이 당신을 공경하기로 봉헌하오며 저를 당신께 맡겨드리오니, 구원의 길에서 언제나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와 인도자가 되어 주소서.
저를 위하여 마음의 지극한 결백과 육신의 온전한 정결과 내적 생활의 열렬한 사랑을 얻어 주소서.
당신의 모범을 따라서 저의 모든 행위를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 안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여 주소서.
오 복되신 성 요셉 아버지, 평화와 기쁨 속에서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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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법대로 사는 요셉>
항상 사순절 중에 기념하게 되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축일입니다. 우리는 굳이 예수님의 ‘양부’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부르지만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실 수 있게 선택된 또 한명의 어버이인 요셉의 가치는 양부가 아닌 실제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히 하신 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찌보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과 그 태중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아들의 생명 모두를 손에 쥐고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적인 수고와 손해를 감수하며 그들을 지켜낸 아버지의 참된 가치를 실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요셉을 중심인물로 드러내 줍니다. 아직 예수님은 성모님의 뱃속에 있고 복음은 성령으로 인해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짧은 이야기만을 배경으로 들려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아닌 이 상황을 요셉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약혼을 하고 함께 살 날을 꼽고 있던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상황을 말해줍니다. 마리아가 착하다, 순수하다 등의 수많은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이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런 약혼자의 이유 모를 임신은 분명 요셉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스러움이고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현실은 끔찍하게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때였기에 이 일을 전해듣고 그는 당장 마리아를 고발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복음이 너무 덤덤하게 전해주는 요셉의 성품은 그가 그 성품대로였다면 분명 신고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는 마리아의 죄를 밝혀 자신의 부정을 피하기 위해 마리아를 희생시켰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근거 모를 아이 역시 그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움직입니다.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요셉이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 율법을 어긴 결정을 하게 됩니다.
혹 여기서 말하는 ‘법대로’라는 말이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곧 율법의 정신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법대로 제대로 행동한 것이 됩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율법의 정신 말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요셉의 행동은 사랑의 이중계명 중 이웃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더 중요한 것을 복음은 요셉의 이 결정이 주님의 계시 이전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이런 요셉의 결정이 있을 즈음에야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요셉은 그 근본부터 하느님의 뜻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순수한 영혼으로 하느님의 뜻에 전적인 순명을 보였다면 요셉은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그 속에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 사람의 모범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성모님의 순명만큼이나 예수님의 탄생에 큰 몫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또한 주님의 천사의 알림 이후에 요셉이 서둘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 역시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을 동시에 드러내 줍니다.
이런 부모 사이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적어도 이 부모만큼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내신 첫 사람의 사랑스런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부모, 그 속에 자리하신 예수님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로 이 탄생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웃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 요셉.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불가능하다는, 혹은 그러면 안된다는 그런 선택 속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랑은 그래서 어렵지만 하느님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람의 표본을 갖고 싶으십니까? 그럼 요셉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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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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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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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달렸다>
마태오 1,16.18-21.24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나에게 달렸다>
나로 남을 것인가
너에게 스밀 것인가
나에게 달렸다
내가 떠안을 것인가
너에게 떠넘길 것인가
나에게 달렸다
나 홀로 아플 것인가
너마저 아프게 할 것인가
나에게 달렸다
나 살자고 너를 버릴 것인가
너 살리려 나를 비울 것인가
나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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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꿈같은 얘기>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래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낫다.”는 옛말이 있듯이 꿈은 해몽을 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꿈이 사나워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데 꿈을 나쁘게 꾸어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꿈을 다스릴 줄 알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때로는 꿈을 통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받기도 하지만 역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을 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습니다. 정말 꿈같은 얘기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그만한 기쁨이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결국, 하느님의 역사는 그분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은 데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한 마음을 통해 결국 천사를 만나게 되었으며 모든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당혹스러운 일 앞에서 신중한 처신을 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의롭게 살았던 요셉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을 마음에 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울프강 트릴리) 일상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의로움을 살지 않고 갑자기 의로운 처신을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루 한 순간순간을 주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 1,21)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바로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오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이면서도 그만한 소명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나의 길에서 그분께 협력하는 몫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부끄럽지만 …. “믿는 이들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라고 합니다. 오늘을 침묵으로, 그리고 믿음의 응답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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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17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장 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1,19 참조) 요셉의 ‘의로움’은 무엇보다 그가 하느님의 계명, 곧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율법 준수만으로 그의 의로움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신명 22,20-21 참조)에는 혼인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할 경우 받게 되는 형법적 절차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처럼 그의 ‘의로움’은 약혼녀 마리아를 향한 사랑, 법규나 규정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데 있습니다.(마태 1,2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신앙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를 통하여 전해진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결정을 내린 요셉은 신앙인의 본보기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선택과 결정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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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1,24)
<의로운 요셉!>
오늘은 '성모님의 배필'이요 '예수님의 양아버지'로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시고,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 묵상글 내용을 다음 괄호와 같이 수정합니다.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고, '종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언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이 약혼을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왜냐하면 같이 살기 전에, 곧 잠자리도 갖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죽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인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 믿음이 충만한 사람 요셉입니다. 요셉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큰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늘 제2독서(로마4,13.16-18.22)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희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4,18)
재물과 권세와 명예와 같은 유혹(장애물)들이,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져 있습니다.
성 요셉 대축일을 맞이하여, 그런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는 아브라함과 요셉이 간직했던 굳건한 믿음을,
주님께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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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세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꼽는다면 아마 ‘마녀재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에 마녀 판별법이 있어서, 많은 사람을 마녀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진짜 마녀는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사실 진짜 마녀라면 인간이 어떻게 제거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무고한 사람이 마녀로 몰렸을 뿐이었습니다.
마녀 판별 중에 조금 어이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녀로 지목된 자를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이나 늪, 운하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 위에 떠 오르면 마녀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결백한 사람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떠오르지 않는지를 계산해서 살려준 것이 아니라, 익사할 때까지 그냥 놔뒀다는 것입니다.
무고한 죽음인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냥 결백한 사람이었다고 판정만 했습니다. ‘아니면 말고’라는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이 잘못된 역사를 우리 삶 안에서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보다는 이해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단죄보다는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생명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에 대한 보고는 복음서에서 그리 많은 내용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태오 복음서에서 마리아의 약혼상태 남편이며,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였음을 전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죄를 범한 경우, 공개 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누가 이 사실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공개 재판을 받게끔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꿈’일 분이라고 간단히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꿈의 계시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만큼 마리아를 믿었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사랑이 하느님의 양부가 될 수 있었고, 이 땅에 구원의 빛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힘은 큽니다. 우리 역시 믿음과 사랑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아픔과 상처를 이 땅에 남겨서는 안 됩니다. 대신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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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가정의 위대한 배경>
-성 요셉-
오늘 3월19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에 앞서 사순시기이자 3월 성 요셉 성월에 맞이하는 참 좋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가정의 위대한 가장이자 배경인 성 요셉을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 여기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예전 불암산을 보며 쓴 “산처럼!”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 수도원처럼 수호자 성 요셉을 배경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요 우리 성교회입니다. 그대로 산 배경의 덕을 닮은 성 요셉입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에 34년째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것이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입니다. ‘하늘과 산’ 지금도 역시 여전히 즐겨 애송하는, 그동안 강론 때 참 많이 인용했던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 그대로 하느님과 성 요셉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니 성 요셉뿐 아니라 하느님과 믿는 이들 모두와의 이상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배경이 좋아야 합니다. 날로 배경이신 주님과 깊어가는 관계를 통해 배경이신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성 가정의 위대한 배경인 성 요셉이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를 많이 닮았는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세 측면에 걸쳐 성 요셉의 덕을 살펴 봅니다.
첫째, 성 요셉은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성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사랑 관계의 성 요셉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요셉 수도원의 배경인 불암산같이 넓고 깊은 품의 자비로운 배경의 가장 성 요셉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의 처지를 깊이 배려한 참으로 깊고 넓은 성 요셉의 자비로운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마리아의 안위에 대한 걱정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이런 자비로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요셉은 내심 파혼하기로 작정하고 밤샘 기도에 돌입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주님과 요셉의 은밀한 대화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도 보고 배웁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런 양부 요셉의 기도를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일 하루의 일과가 끝났을 때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내밀한 친교 시간을 가졌고 중대한 일을 앞뒀을 때 역시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졌고 아버지의 뜻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응답을 받는 성 요셉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대로 성 요셉에게는 주님의 감로수甘露水 같은 말씀의 응답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의 사람, 요셉을 신뢰한 하느님이신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이처럼 하느님의 신뢰를 받는 성 요셉같은 사람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성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순종의 겸손, 순종의 사랑, 순종의 믿음입니다. 참 영성의 잣대가 순종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과 신뢰의 순종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인 위탁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순종의 응답이, 협력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차질없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응답이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제2독서 사무엘 하권의 나탄의 예언의 성취도 이런 요셉의 순종이 있었기에 비로소 예수님 탄생으로 가능했음을 봅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성 요셉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가능했으며 차질없이 구원역사가 펼쳐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 요셉은 그대로 바오로가 고백하는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연상하는 성 요셉의 믿음입니다. 다음 아브라함 대신 요셉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대로 희망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에서 샘솟는 희망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과 희망을 그대로 닮은 성 요셉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에서만이 가능합니다. 희망이 없는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희망하며 ‘희망의 여정’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 요셉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을 닮아 우리 모두 자비의 사람,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침 산책 때마다 즐겨 부르는 ‘바다’ 노래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저어 가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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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3CIJsg8Q-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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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늘 옆에 있어주는
진실된 사랑의 사람
요셉 성인의 축일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결코 망설이지 않았던
요셉 성인을
이 사순시기에
다시 만납니다
믿음의 여정은
하느님을 향한 소중한
경청의 여정입니다.
아름다운 모든 삶은
아름다운 존중에서
시작됩니다.
존중은 긍정적인
삶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긍정적인 태도는
믿음의 관계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셨던
요셉 성인의 삶은
마리아를 기꺼이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함께 하는 믿음은
그 어떤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가는
큰 힘이 됩니다.
요셉 성인은
소중한 가족들과
나란히 걸어가는
겸손을 보여줍니다.
일생을 통해
보여준 겸손한 삶은
진정한 보살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보살핌을 통해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전혀 새로운 길을
오로지 믿음으로
받아들인
요셉 성인처럼
한 가지 길만 있다고
고집하지 않는
열린 믿음이 중요합니다.
소중한 가족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성 요셉의 삶에서
배웁니다.
서로를 구원하는
사랑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존중이었음을
보게됩니다.
진실한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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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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