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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팬티
굶어 죽기직전.
최후의 먹이를 갈망하는 아프리카토요테 눈빛의 혜림을 도치씨는 알아보지 못했다. 만약, 혜림의 이 눈빛을 알아차렸다면 혜림을 무너트리는데 소모할 시간이나 체력 그리고 온갖 머리를 쥐어짜며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절약할 수 있었지만 도치씨는 전혀 혜림의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매사에 자기관리를 잘하는 혜림의 완벽함 때문이었다.
혜림은 도치씨의 젊음과 열정에 몸이 후끈 달았지만 차분하게 도치씨를 쳐다보며 웃었다. 자아최면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조정하고 위장하는 숙녀였다.
혜림은 도치씨에게 강의하는 교수처럼 말했다.
“도치.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야. 불타 사라지는 마른장작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야.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고 갈취하거나 점령하는 것도 아니야. 사랑이란 잔잔한 강물처럼 오래오래 함께 가는 거야. 부부라면 죽을 때까지 함께 사는 거지.”
“애인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지켜줘야지.”
“뭘 지켜주는데?”
도치씨의 말에 혜림의 호흡이 맥박처럼 몇 번 거칠게 뛰었다. 여자가 흥분했을 때 일어나는 생리현상이다. 혜림은 이내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부부가 되지 못할 애인이라면 순결을 지켜줘야 하고, 부부가 될 사이라면.”
도치씨가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해도 돼?”
“뭘 해?”
“아, 참 혜림누나는?”
“뭘 하냐니까?”
“뭘 하긴 뭘 해? 고백해야 결혼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혜림이 도치씨를 흘겨봤다. 혜림의 생각처럼 도치씨는 음흉한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혜림에게 오늘 고백하고 프러포즈하려고 단단히 작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내가 죽을 날이 앞으로 67일이나 남았는데도 성질 급한 도치씨가 하필 오늘 고백하려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제 세상만사 예약시대다.
밥 한 끼 먹는 것도 예약이고, 극장 한 프로 땡 기는 것도 예약이다.
낚싯배 한 번 타는 것도 예약이며 가전제품 점검받으려 해도 사전 예약해야 한다. 그 뿐인가? 일일이 꼽으려면 한 달은 남짓 걸릴 정도다. 그래서 도치씨는 혜림에게 사전예약하려는 것이다. 사전결혼예약 말이다. 그 고백을 오늘 하려는 것인데 혜림은 엉뚱한 방향에서 오해했다. 얼굴이 빨개진 혜림을 보고 도치씨가 뚱단지스럽게 물었다.
“혜림누나 열나?”
“무슨 열?”
“혜림누나 얼굴이 빨개졌잖아. 요즘 환절기 조심해야 돼. 지카바이러스가 또 발생했다는데.”
혜림은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에휴. 도치하고 있으면 내가 이상해져.”
“내가 보기에 혜림누난 정상. 극히 정상인데?”
혜림은 오버한 자신의 생각에 민망함을 느끼고 쑥스럽게 웃었다. 혜림은 도치씨를 또 한 번 흘긴 후 하던 말을 계속했다.
“하던 말, 마저 할게. 여하튼 애인이든 부부든 서로 지킬 건 지켜주는 게 예의야. 그게 사랑의 매너야. 애인은 갈 때 붙잡으면 서로 부담될 수 있지만, 부부는 어느 한쪽이 먼저 가서도 안 되고 어느 한쪽을 먼저 보내도 안 되는 거야.”
도치씨가 경쾌하게 말했다.
“혜림누나. 이제 보니 혜림누난 시인이구나. 시인 성혜림. 하하하.”
혜림이 진지하게 말했다.
“온전한 사랑은 두 개가 하나로 합쳐져 하나로 존재하고 화재 발생한 사랑은 언제나 둘 로 존재할 뿐이야. 화재 난건 아니지만 지금 난 하나잖아? 보기 안 좋지?”
“난 좋은데?”
혜림이 서글프게 웃었다. 슬픈 일에도 웃고 기쁜 일에도 꼭 웃는 혜림의 미소가 그 순간만은 도치씨의 눈에 서글퍼 보였다. 그러나 도치씨는 혜림 같은 여자가 단독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래서 좋았다.
“그러니까 도치는 온전한 사랑일 때 아내에게 잘해.”
아내란 말에. 도치씨의 미간에 지렁이만한 주름이 잡혔다. 신경질이 반응했다는 증거다. 도치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내? 제발 그 사람 이야긴 하지 마.”
“도친 아내와 살날이 좀 많이 남았니? 애심원견을 떠올리고 살아. 서로의 감정이 격해졌을 땐, 서로 멀리 바라 봐. 먼 곳에 누가 있는지. 무엇이 있는지. 그러면 서로 잘못을 뉘우치게 돼. 설령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멀리 보면 용서돼! 그러니까 사랑은 용서인 셈이지, 서로용서하고 서로화해하며 사는 것이 부부야. 부부사랑이야.”
“관둬요!”
도치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도치씨의 물 잔이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깨졌다. 극도로 팽창한 신경질에 도치씨는 혜림을 득달했다.
“혜림누나. 답답해! 나가자! 나 여기 있다간 졸도하겠다.”
타워메니저가 달려와 새 유리잔으로 교체했지만 도치씨는 테이블에 팁을 올려놓고 혜림을 강제로 끌었다.
도치씨가 앞서 걷는 길은 처음 계획했던 장충동쪽 코스가 아니고 회현동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도치씨가 갑자기 화를 낸 것은 혜림의 말을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고, 더 이상 같은자리에서는 혜림의 속마음을 열어 볼 수 없었고. 아내의 이야기가 계속되어 이로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화난 척 계단을 내려가며 도치씨는 생각했다.
부부는 서로의 잘못을 무조건 용서하고 화해한다?
빵 까지마!
기울기가 수평일 때는 혜림누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 허지만 기울기가 틀어지면 어떻게 돼? 한쪽으로 쏠리지? 쏠리는 게 뭔데? 분노. 좌절. 혐오. 증오로 받는 상처야!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 그런데 용서고 나발이고 화해가돼? 똥 개 짖는 소리지.
계단을 뒤따라 내려가던 혜림이 발을 절며 말했다.
“아직도 화 안 풀렸어?”
도치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적당한 프러포즈 기회를 만들기 위해 연출하는 기획인데. 혜림은 아직 도치씨가 화난 것이라고 여기자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허지만 도치씨의 뒤통수만 보고 뒤 따르는 혜림은 도치씨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부득이 혜림도 한판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하이힐을 벗어 들었다. 신이 여자들에게만 부여한 특급 승부수다.
“나 발 아파. 발목을 삐었나봐!”
도치씨가 깜짝 놀라 뒤돌아 봤다.
“어쩌다? 왜 신발은 벗었어요?”
“그럼 어떡해? 도친 다람쥐처럼 달아나는데? 놓치면 난 길도 잘 모른단 말이야. 양노원에 끌려가면 어떡해?”
도치씨가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 양로원? 그 양로원 미친 양로원이라도 혜림누난 안 끌고 간다. 재활쉼터라면 또 모를까?”
“나 발이 너무 아프다. 시리고.”
“발 들어봐요. 내가 한번 볼게.”
도치씨는 성큼 계단을 역주해서 올라서며 혜림의 발목을 들었다. 그리고 발목을 이리저리 살폈다. 도치씨는 금세 혜림이 엄살떠는 것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도치씨는 짐짓 혜림의 발을 두 손으로 비빈 후, 입김으로 발바닥을 쏘였다.
“따뜻해?”
“으응. 따뜻해. 이젠 됐어.”
“아니야. 아직도 발이 찬데. 한참 더 해야 돼.”
도치씨는 열심히 그리고 정성으로 혜림의 발을 마사지하며 입김으로 호호 불었다. 도치씨의 정성어린 서비스 속엔 수고한 자들아. 수고한 만큼 거두리라, 예수의 축복이 들어 있었다. 예수의 축복보다 두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뿌리고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즉시 보상받는 축복이었다.
도치씨가 혜림을 위해 수고한 보상은 물질이 아니었다.
도치씨가 혜림의 발을 호호 불며 살살 마사지하는 만큼, 도치씨는 혜림의 후레아스커트 안에서 늘씬하게 쭈욱 흘러내린 두 다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두 다리를 따라 사다리 타듯 시선을 올려가자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혜림의 검은 팬티였다. 도치씨는 움찔 놀라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팬티스타킹을 입었다면 현장감이 좀 덜했겠지만, 가터벨트를 착용한 혜림의 두 다리 사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깃발처럼 걸려있는 혜림의 검은 팬티는 도치씨를 무한자극무아지경으로 자극했다.
“흡!”
도치씨의 숨길이 막혔다.
혜림이 물었다.
“내 발바닥 불다 입에 먼지 들어갔구나. 아휴 어떡해?”
“아냐. 아냐. 그대로 서 있어. 조금만 더 옆으로! 조금만 더. 옳지. 됐어.”
도치씨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짚고 위태하게 서있는 혜림에게 도치씨는 자세를 고난이도로 교정시켰다. 혜림이 편하라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위로만 쳐다보는 도치씨의 눈이 최대상향사시가 되었지만, 무릎에 가려진 혜림의 난시지역을 전부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혜림의 스커트 안. 난시지역을 더 면밀히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첫댓글 어제는 혜림이 숨이 멎을번 하더니 성질난척 걸으면서
혜림을 손에 쥘려고 연구를 하고있는 도치
어떻게 보면 표리적인 인간 같이 생각되는 군요.
어리광 부리는 혜림, 받아주는 도치사이에
사랑은 점점 무르익어 가는것 같슴니다.
연휴 가족과 함께 잘 보내세요^^
네 젠틀맨님
통찰력이 대단하십니다.
젠틀맨님도 긴 연휴 등산도 가시고 가족과 여행도 하시면서 다가 올 농사철 피크에 대비하세요.
항상 친절하셔서 고맙습니다
프로포즈도 볼만할거 같네요
ㅋㅋㅋ
프러포즈 정말 힘들죠...중매보다 더 힘듭니다.
이런 사랑 한번 해보았으면 합니다.
에엥?
흠마야....ㅋ
당기고 땡겨보는 도치와 혜림
줄다리기 사랑 이야기 잘보앗슴니다.
잘하면 본전 못해도 본전은 아니니까요
멋진 날되셨죠?
혜림과 도치의 사랑 이야기 제미있게 잘배워 갑니다.
밤이 깊어가며 비가 오시네요
고운 꿈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