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난 후 모암마을 외가에 맡겨진 열한 살 소녀 둘녕. 그곳에는 외할머니와 이모 내외, 막내이모와 막내삼촌 그리고 동갑내기 사촌 수안이 살고 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수안과 둘녕은 작은 사건을 계기로 마음을 열게 되고, 쉬이 잠들지 못하는 아이 수안과 그리움을 꾹꾹 참고 살아가는 아이 둘녕은 특별한 우정을 나누며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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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갈아입고 한참 작업대 앞에서 일했다.
침대에 누운 채 잠이 찾아올 때까지 뒤척이고 싶지 않았다.
눈꺼풀이 저절로 잠길 때까지 다른 일을 하는 게 나았다.
이윽고 피로가 몰려오자 스탠드를 켰다.
수안과 같은 방을 쓰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닮아간 버릇.
그 아이는 불빛이 없으면 잠에 들지 못 했다.
다들 종교를 가지려고 애쓰는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절에도 가고 교회에도 가고 성당에도 가고,
가면 정말 좋을까. 마음에 위로가 될까.
수안은 어디에 다녀야 잠을 잘 자게 될까.
악몽도 안 꾸고,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 두려움에 울지도 않고.
수안은 한밤중에 깨어나면 꼭 나를 흔들어
깨워 같이 있어달라고 하거나,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울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잠을 설쳐야 했다.
나는 들은 척 않고 한 땀 한 땀 손바느질을 한다.
이 잠옷은 전부 손으로만 짓고 있다.
그 아이 주려는 거지. 그걸 입으면 잘 잘 수 있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니 둘녕이 너야말로 풍향계 같은 사람이야.
내세우지 않고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넌 어딜 가든 잘 살거야.
이상하게도 그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못내 다정하면서도 서운했다.
그때문인지 밤새 잠을 설치고 말았다.
왜 돌려준 거야. 보고 싶었는데.
...넌 그 소년을 봤던 거야?
아니야. 나는 너를 봤어. 유리알 속엔 네가 있었는데.
한때 내것이었다가 나를 떠난 것도 있고,
내가 버리고 외면한 것도,
한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도 있다.
다만 한때 몹시 아름다웠던 것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로 달아나서 금빛먼지처럼
카를거리며 웃고 있을까.
무엇이 그 아름다운 시절로 데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
해가 저물어 밤이 내릴 때까지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어둠이 깃들자 기척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오고 있고 나는 그걸 안다.
그 아이는 내게 묻겠지. 왜 이제 왔어. 그럼 나는 대답해야지.
그러게. 어딘가 다녀오느라 늦었네 라고.
그게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기를.
아마도 풍향계가 가리키는 곳.
언젠가 삼촌이 말한 것처럼, 북쪽보다 더 북쪽이고 남쪽보다 더 남쪽인 곳이었다 하리라.
수안에게.
시화전 들렸어.
내게는 네가 쓴 시만 보였어.
정말이야.
사랑하는 고둘녕
네가 스웨터를 짜고 있을 땐
나는 곁에서 같이 아늑해져.
너는 털실을 짜고
나는 시간을 허비하지
넌 물레를 돌릴테고
난 딸기 잼을 휘젓겠지
축복할게 내 사촌
언제나 마법 같은 손길 지니기를
수안.
이도우, <잠옷을 입으렴>
첫댓글 헐 뭐야...
쩐다
재밌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