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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반쪽이었다 ②
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T. 제퍼슨. 미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 3대 대통령으로 재임기간은 1801-1809년. 1947년 완공된 그의 기념관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우아한 건축물 중 하나다.
기념관 한 가운데 6미터 높이의 제퍼슨 동상은 그의 역사적 명성만큼이나 압도적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동상이 아니라 벽면에 새겨진 그의 어록들이다. 독립선언서는 그중 하나다. 미국에서 선언서의 위상은 거의 성서에 버금간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면 인용문에 선언서의 핵심 구절이 빠져 있다.
내셔널 몰 건너편, 포토맥 강변에 위치한 제퍼슨 기념관.
“(…) 어떤 정부든 국가의 목적(생명과 자유, 행복추구 권리의 보장)을 파괴할 때, 인민은 그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기하고, 새 정부를 세울 권리를 가지고 있다(That whenever any Form of Government becomes destructive of these ends, it is the Right of the People to alter or to abolish it, and to institute new Government)”라는 부분이다. 대신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임을 선포하며 우리의 생명과 재산, 명예를 걸고 이를 지킬 것을 다짐한다’는 취지의 선언서 마지막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기념관 어록과 관련한 논의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떤 부분이, 누구에 의해, 왜 선정되고 변경되었는지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념관을 관리하는 국립공원관리소(National Park Service: NPS)는 1941년 기념관 건립위원회가 선정한 인용문에는 그 문장이 들어 있었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이 마지막 단락 부분을 추천하면서 달라졌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과정의 작은 에피소드처럼 보이지만 비판적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인민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정부의 전복과 새 정부의 수립.’ 이는 영국과 전쟁을 불사하면서 독립을 염원한 미국혁명의 기본논리이자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그 부분이 빠졌다. 그것도 원문 저자를 기리는 기념관에서. 학자들은 핵심이 빠지거나, 핵심을 바꿈으로써, 선언서가 혁명의 선포문에서 애국의 호소문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정부전복(government-destroying) 문서’가 ‘국가수립(nation-building) 문서’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비판대로, 혁명가를 기리는 기념관이 오히려 ‘혁명의 안티테제’를 담아낸 건물이 돼 버린 셈이다.
왜 제퍼슨 기념관은 혁명의 핵심논리를 인용문에서 뺐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애초 반쪽으로 출발한 미국 민주주의가 지금껏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왜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작되었을까?
1776년 6월, 대표 집필자들이 제2차 필라델피아 대륙의회에 독립선언서 초안을 제출하는 모습. 화가 존 트럼불의 1818-9년 작품.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건국의 아버지들-법률가, 교수, 대농장주 등 백인남성 대표자들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은 영국 왕이 다스리는 군주제 식민사회에서 인민(백인남성이라는 의미)이 선출하는 대통령과 의회가 통치하는 민주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혁명이다. 이 혁명의 지도자들을 통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 부른다. 새 나라를 건설하는 책임을 맡은 식민 13개 주의 대표자들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56명이 그들이다. 이들 중, A. 해밀튼, B. 프랭클린, G. 워싱턴, J. 매디슨, T. 제퍼슨 등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각 주 의회 의원들, 판사·변호사·검사 등 법조인, 대학총장과 교수, 노예를 거느린 대농장주, 주지사, 사업가 등으로 모두 백인 남성. 최고령자는 81세의 B. 프랭클린, 최연소자는 뉴저지의 J. 데이턴으로 26세. 절반 이상은 대졸 학력자로 프린스턴, 예일, 하버드 출신들뿐 아니라 런던, 에딘버러, 옥스퍼드, 글래스고우 등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들. 상공업자나 해운업자도 있었고, 이자 수입, 부동산 투기(?), 대출이나 투자 같은 금융업을 생활기반으로 삼은 사람들도 많았다. 제퍼슨은 이들을 묶어 ‘신과 같은 사람들의 집합체(assembly of demigods)’라고 불렀지만, 실은 고학력 부자들로, 식민지 시대부터 이미 기득권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8세기 중후반 미국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영국의 일부였다. 불만은 적지 않았지만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프랭클린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지금까지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거나, 독립이 미국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썼다. 그 때가 1775년 3월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급반전, 바로 다음 달인 4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알리는 첫 총성이 울렸다. 렉싱턴-콩코드 전투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7월에 소집된 대륙의회는 평화적 문제해결을 요청하는 ‘올리브 호소문(Olive branch petition)’이라는 이름의 타협안을 국왕 조지 3세에게 보냈다. 이런 점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은 투철한 독립정신을 가진 전투적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전쟁의 길로 나서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던 ‘소극적 독립파(reluctant nationalists)’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권력의 집중(연방파)이냐, 분산(공화파)이냐
미국은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가 곧 정치혁명은 아니다. 어떤 정부를 세우는 것이 혁명을 완수하는 길인가와 관련해 건국 초기 두 개의 정파가 대립한다. 하나는 ‘연방파(Federalists)’, 또 다른 하나는 반연방파 곧 ‘민주공화파(Democratic-Republicans. 약칭 공화파).’ 과도한 단순화를 무릅쓰자면 연방파의 입장은 ‘혁명은 끝났고 이제는 국가건설이다’로, 공화파는 ‘전쟁은 1막일 뿐 이제는 민주주의 혁명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연방파는 영국과 같은 강한 제국이 미국의 미래 모델이라고 주창하면서 강력한 중앙집중형 연방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워싱턴, 2대 대통령인 J. 애덤스, 그리고 워싱턴 정부 재무장관 A. 해밀튼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반면 제퍼슨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공화파’는 강력한 중앙정부는 독재의 위험성을 피할 수 없다며 각 주로 권력이 분산된 형태가 오히려 혁명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권한을 제어하고 인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방책으로 마련된, ‘권리장전’으로 불리는 수정헌법은 이들 공화파의 성과물이다.
여기에서 유념할 것은 연방파를 포함한 다수의 혁명 지도자들이 반민주적, 반민중적 사상과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혼란과 갈등의 현장이며, 수명은 짧고 혼란 속에서 결국 무너진다. 지금까지 스스로 무너지지 않은 민주주의 체제는 없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대중의 학습능력과 지성, 판단력은 취약하며 단기적, 개인적 이해에 치중하고, 충동적이며 선동에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독립선언서가 명기하고 있는 ‘정부 전복의 당위성’, 즉 ‘인민의 혁명’으로 지배질서가 바뀌는 것은 실존적 공포였다. 이른바 ‘데모포비아(demophobia)’, 곧 인민의 정치적 힘에 대한 불신과 공포증이다. 이 때문에 연방파는 민중의 과격성, 폭력성을 강조하면서 대중의 정치 참여를 가급적 제한하려 했다.
혁명정부 초기, 워싱턴과 애덤스 정부가 계속되는 인민봉기를 무정부 상태의 테러로 간주하고 군을 동원 진압한 것은 그 같은 사고의 산물이다. 이들이 가진 반인민적 편견의 절정은 1798년 제정된 ‘이민제한법과 선동금지법(Alien and sedition acts)’이다. 의회와 대통령 모욕죄, 공무집행 방해죄 등을 신설한 것은 물론, 국가안보를 이유로, 의심스러운 이민자를 법 절차 없이 대통령 명령으로 추방할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는 정부를 비판하거나 법안을 반대하는 논설, 의견, 선동, 항의 집회 등을 제한했다. 수정헌법이 정하고 있는 표현, 사상, 집회 등의 정치적 자유를 사실상 압제하는 것이었다.
다른 어느 것보다 당시 지배 엘리트들의 계급적 반동성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은 노예제 문제다. 만민의 평등을 명기한 독립선언서의 정신에 따라 필라델피아에 노예제 폐지운동 단체가 만들어졌고 북부 뉴잉글랜드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노예수입 금지조처 정도 이외에 그들의 목소리는 금세 제압되었다. 남부의 반발 때문이었다. 독립전쟁이 터지자 버지니아 총독은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고 영국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십여 만의 노예가 탈출했고, 그중 수만여 명이 영국군에 자원했다. 농업경제 남부의 입장에서는 사유재산이 강탈당하고 물적 토대가 무너지는 절대적 위기였다. 본래 남부는 친영파가 다수였다. 그 남부가 독립전쟁에 참여한 핵심 이유는 ‘영국이 노예를 빼앗아가기(they’re conscripting our slaves)‘ 때문이었다. 이 같은 정황에서 노예제 경제는 혁명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이 점에서 연방파나 공화파는 다르지 않았다. 본래 강고한 독립투사가 아니었듯,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와 평등에 투철한 혁명가들도 아니었던 것이다.
혁명 과실 차지한 백인남성 기득권-반쪽 민주주의의 시작
그럼에도 전쟁과 혁명은 미국을 바꾸었다. 독립과 새 정부의 수립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토대였고, 혁명의 이상은 그 후 내내 미국을 이끈 이정표였다. 또 전쟁과 혁명의 과정에서 형성된 통일 합중국으로서의 미국, 그 합중국 국민으로서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새롭게 출발하는 나라의 요긴한 사회·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한편 혁명은 영국이 막았던 서부 영토확장의 빗장을 열어 제쳤다. 서부 확장은 새 나라 미국의 원동력이 되었고, 전쟁을 불사하는 제국적 영토 팽창정책은 국내외의 행운이 겹치면서 부강한 나라 미국의 토대를 쌓았다.
그러나 혁명은 그 이름에 걸맞은 국가로서의 미국을 낳지는 못했다. 독립을 쟁취했고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내용으로의 미국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미국은 부유한 엘리트 백인남성 중심의 사회였고 노예제 사회였다. 혁명 후의 미국도 다르지 않았다. 여성의 처지는 조금 나아졌지만, 흑인 노예와 원주민 인디언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잔인하게 추방되었다. 정치권력의 공백을 채운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로 대변되는 식민지 기득권 집단이었다. 혁명의 과실은 사실상 엘리트 집단이 차지했다. 인민의 직접 정치참여 방식은 하원의원 선출 정도로 제한됐고 봉기는 무력으로 진압됐다. 독립국가의 새 정부는 기득권 집단의 과두정에 민주적 요소를 더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체제 역시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정의의 실현이 핵심인 공화국에서 누진세, 금융제도 개혁, 토지투기 금지 등의 요구가 높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1800년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민제한-선동법 폐지 정도가 눈에 띌 뿐, 그의 개혁은 형식적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렇듯 미국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반쪽이었다. 짚어보면 오늘날 미국의 사회, 정치, 경제의 현실도 근본적 차원에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더 많은 민주주의로의 개혁 가능성 역시 요원하다. 핵심 문구가 빠진 제퍼슨 기념관의 독립선언서는 이 같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한계를 보여주는 역설적 증거이다.
출처 : 제퍼슨 기념관이 던지는 질문-혁명이냐, 애국이냐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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