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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와 사진의 역사
-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고 하는 것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 들어온 빛이 한쪽 벽면에 영상을 맺어주는 현상을 말하며 11세기 무렵 아랍의 과학자, 철학자들이 텐트속으로 들어오는 빛이 바깥의 영상을 비춰주는 현상을 알고 있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태리 사람 다니엘로 바바로(Danielo Barbaro)는 컴컴한 방에서 렌즈를 통하여 들어온 빛을 흰 종이에 받아보면 바깥 경치가 그림같이 보인다고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컴컴한 방)에 대하여 발표하였고 그것을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큰 카메라 속에 사람이 들어앉아 영상을 보는 모양이다. 이후 카메라 초점면에 우유빛 유리판이 있어 밖에서 그림을 보게 된 것을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투명한 방)이며 화가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16세기 말경, 이태리 나폴리의 과학자이며 작가 레오나르도의 고향 사람이기도한 지오바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Giovani Battista Della Porta)는 선명한 렌즈가 장착된 카메라 옵스큐라 (컴컴한 방)를 만들어 사람들을 그 속에서 보게 하고 밖에서 배우가 연기하도록 하여 영화같은 영상을 공개행사로 시도하였으나 배우들이 거꾸로 서서 움직이므로 도깨비가 춤추는 모양이 되어 실패하였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거쳐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 루시다는 화가들이 투시도 조감도, 초상화등을 그리며 원근감을 나타내는 도구로 많이 사용하였고 그러는 기간 동안 카메라 옵스큐라는 화가들의 그림 그리는 방에서 크게 벗어났고 마치에 싣고 다니며 그 속에서 작업하다가 더욱 작게 만들어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807년에 닥터 윌리암 웰라스톤(Dr. Willian Wellaston)은 카메라 루시다의 특허를 획득하였다.
독일의 수도승인 요한 찬(Johann Zahn)은 23cm×60cm 크기의 상자에 전후로 움직일 수 있는 렌즈 튜브를 달아서 초점 저절이 되고 밝기를 조절할 수 있는 ‘조리개’기능이 있는 것을 만들었다.
거울에 반사되는 영상이 상자 바깥 위쪽에 있는 화면에서 보이도록 했다고 하므로, 그 면에 필름만 놓았다면 오늘날의 1안리플렉스 카메라의 원조쯤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감광제(Light-Sensitive Material/Photographic Chemicals)가 발견되기까지 한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1826년 최초의 사진
1826년 불란서의 석판인쇄 기술자 조셉-리쎄프로 니엡스(Joseph-Nicephore Niepce)는 감광물질을 발견하게 되었다. 백납(Pewter)판에 아스팔트 화합물을 발라서 그것을 화가들이 쓰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넣고 창턱에 8시간이나 놓아두었다고 한다. 그 결과 백납 판에는 창밖 농장의 영상이 맺혀있었다.
비록 흐리고 어두컴컴한 화상이었으니, 니엡스는 이 사진을 헬리오 그래피(Helio graphy:태양에 의한 그림)라고 명명하였고 그것을 오늘날 니엡스의 '최초의 사진'이라고 한다.
1839년 다게르(Daguerre)의 다게레오 타입
1826년 이후 니엡스는 파리의 무대배경 다자이너이며 인쇄업자인 다게르(Louis Jacque Mande Daguerre)를 만나 서로 공동연구를 하였고 다게르도 니엡스처럼 카메라를 조금 개량하게 되나 그 보다 중요한 일은 종전보다 훨씬 감도가 좋은 은판 감광제를 발견하게 된 일이다. 1833년 니엡스가 사망하자 디게를 자신의 연구 결과와 니엡스의 연구 실적을 정리하여 1839년8월19일 세계 처음으로 프랑스 학사원에서 열린 과학 아카데미 회의석상에서 30분만에 사진이 나오는 놀랄만큼 빠르고 실용적인 다게레오 타입(Dagrerreo Types)의 은판사진 제작법을 공표했다. 당시 사진을 처음 접한 많은 사람들은 "조물주가 만들어낸 위대한 마법의 발명품"이라고 했으며 유명한 화가들은 "오늘부터 회화는 생명을 잃었다" 라고도 했었다.
1839년 탈보트(Talbot)의 칼로 타입
1839년 불란서 정부가 다게로오 타입의 특허를 공표했을 때 영국의 윌리업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도 다게르와 유사한 사진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가 1833년 이태리의 코모 호수(Lake Como)를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림 그리려고 했을때 붓이나 연필로 세밀한 묘사가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종이에 그림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1835년에는 일단 성공하게 되지만 그때 그는 이미 웨지우드(Wedgwood)나 니엡스(Niepce), 다게르(Daguerre) 등이 썼던 방법이라고는 몰랐다.
그는 니엡스와는 달리 네거티브(Negative-Positive)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진의 복제(Technical-Reproduction)를 생각하고 만든 것이 종이로 네거티브 만드는 바로 칼로타입(Calotype)이었다. 그래서 탈보트 또한 사진의 발견자 또는 발명자로 대접 받는다.
다가레오 타입이 발표될 때 오스트리아의 안드레아 폰 에팅스하우젠(Andreas Von Ettingshausen)교수는 다게레오의 사진기의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렌즈가 너무 아두운 것이었다.(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f/17정도) 폰 에팅스하우젠 교수는 비엔나 대학 수학 교수인 그의 동료 요셉 막스 페츠발(Josef Max Petzval)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페츠발을 유명한 광학회사 가족인 피터 폰 보이흐트랜드(Peter Von Voigtlander)를 소개시켜 주었다.
포잇트렌더(Voigtlander)
페츠발은 거의 1년 걸려서 새 렌즈를 설계하였고 그 결과는 3군4매 구성으로 149mm에 밝기는 f/3.7로 다게레오 카메라의 16배 밝기였다. 포이흐트랜더는 그 렌즈를 위해서 카메라를 특별히 만들었다. 이 렌즈로 만든 켄논(Cannon)카메라는 포잇트렌더사에서 수천대 제작되었고 미국에서도 모조품을 수천대 만들었었다. 페츠발의 이 렌즈는 이후 60년동안 렌즈의 표준이 되었고 이 렌즈를 독일렌즈(German Lens)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페츠발은 이익 배분 문제로 포이흐트렌더와 갈라서게 되고, 비록 후에 사진의 원조중의 한 사람으로 대접하게 되었으나 그때 그는 렌즈의 표준만 만들고 사진계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사진'이라고 부르는 공식적인 시작
다게레오타입(Daguerreo Type) : 프랑스 다게르(Lonis Jacque Mande Daguerre)
칼로타입(Calo Type) : 영국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
위의 두 가지 사진 제작 방법이 공식화 되었고 두 방법들은 예술적인 솜씨나 특별한 기능 훈련 없이도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사진을 만들수 있는 방법이다. 1839년 시판 이후 카메라는 인쇄술과 의료, 과학 분야와 산업화 전반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계속 발 전을 거듭하여 왔으며 각국의 카메라의 전성기는 1840~1880년대는 프랑스, 1880-1920년은 영국, 1920~1960년은 독일, 1960~2000년은 일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진술(Photography)의 어원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포토그래피(Photography)'나 '포토그래픽(Photographic)'이라는 말은 1839년 허셀(Herschel)에 의해 영국 학사원에서 공식적으로 언급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사진술의 의미로 사용되어오던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 포토제닉 드로잉(Photogenix Drawing)'등은 그 후 자연스럽게 '포토그래피'라는 용어로 대체되게 되었다.
이러한 '포토그래피'라는 용어는 본래 그리스어의 '빛'이라는 포스(Phos)와 '그린다'라는 의미의 그라포스(Graphos)의 합성어로 '빛으로 그린다' 즉 광화(光畵)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포토그래피'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사생(寫生)한다는 의미와 사실 그대로를 베껴(찍어)낸다는 의미로 '사진(寫眞)'이라고 전달되어,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사진술', '사진'이라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사진기의 역사
"하느님의 형상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신(神)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기계를 만들었다고 떠드는 다게르는 분명 바보 중의 바보다".
1839년 프랑스인 다게르가 사진기를 처음 개발했을 때, 당시 유럽의 언론들이 신문에 게재했던 비판 기사들 중의 한 글귀다. 지금도 일부 오지의 원시인들은 사진기를 들이대면 사진기가 영혼을 빼앗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이 때문에 지금은 사진기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그 부족의 문명도를 평가하는 기준까지 되어 버렸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현대 문명이 앞섰다고 하는 유럽 또한 최초에는 이같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류에게 있어서 문명도는 말 그대로 어떠한 문화나 지식을 먼저 접하는가 나중에 접하는가의 차이이지, 그 부족 또는 그 민족의 우월성을 판단하는 척도는 결코 아닌 셈이다. 아무튼 금방 사라지고 마는 어떠한 장면을 포착하는 것에 대해 인류는 그 기술을 찾지 못해 이를 신의 영역으로 간주해 왔을 뿐, 속으로는 이를 갈망해 왔는지도 모른다.
사진기의 원리와 관련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는 방 안을 어둡게 한 뒤 한쪽 벽면에 바늘구멍을 뚫어 놓으면, 방 밖에 있는 물체의 영상이 비록 거꾸로 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와서 방 안의 벽면에 비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일식(日蝕)이 있을 때, 이를 관찰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해 해의 일그러진 모습을 확인하기도 했다. 당시 '카메라 옵스쿠라'라고 불린 이 방법은 중세 들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화가들에 의해 밑그림의 윤곽을 그리는 도구로 발전했다.
(1) '카메라 옵스쿠라'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의미, 오늘날 카메라의 어원
이 도구는 네모난 상자의 한쪽 면에 바늘구멍을 뚫어 놓고, 그 면의 반대 면에는 종이를 붙여 만드는 것이었는데, 바늘구멍이 향하고 있는 쪽의 영상이 상자 속으로 들어와 종이에 비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후 1550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르다노는 구멍 쪽에 볼록렌즈를 대면 종이에 비치는 영상이 훨씬 또렷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볼록렌즈가 빛을 모아서 종이쪽에 초점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도 이러한 기술은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세종대왕 당시 태양의 고도 측정을 위해 만든 동표(銅表) 또한 이러한 방법을 이용했다. 즉, 동표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놓고 이 구멍을 통과한 태양빛이 카메라 옵스쿠라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장치에 상이 맺히도록 함으로써 태양의 일식, 형태, 빛의 강도 등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丁若鏞)도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이란 글을 통해 어두운 방 안에 앉아 방문에 뚫어 놓은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벽면에 비치도록 함으로써 바깥의 경치를 감상했다는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방법은 이후 유럽에서 질산은(窒酸銀)이 빛을 받으면 검게 변한다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질산은의 변색은 그 이전에도 관찰된 것이나, 대부분 시간이 오래가면 변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떤 한 과학자가 이를 상표가 붙어 있는 약병에 담아 창가에 두었는데, 며칠 후에 보니 다른 부분은 검게 변했지만 빛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표의 뒷부분은 여전히 흰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질산은이 빛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빛을 포착하는 방법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즉각 질산은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이의 대표 주자가 프랑스의 인쇄업자인 니에프스였다.
질산은의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빛이 닿지 않은 질산은도 결국에는 검게 변하기 때문에 질산은 대신 아스팔트의 일종인 '비투맨'이라는 물질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 물질은 빛이 안 닿으면 물렁물렁한 상태를 유지하지만, 빛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딱딱해지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비투맨을 금속판에 바른 뒤 카메라 오브스쿠라의 벽면에 세워 인류 사상 최초의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비투맨이 빛에 반응하는 시간이 매우 느려서 이러한 사진 한 장을 촬영하는데 무려 8시간이나 걸리고 형체도 불분명한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니에프스의 공동 연구자였던 다게르는 1839년, 요오드 증기를 쐰 은판(銀板)에 수은 증기를 다시 쐬면 현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 '다게레오타이프'라는 최초의 사진기를 발명했다.
그는 요오드 증기를 쐰 은판을 이용, 카메라 오브스쿠라로 분명히 촬영을 했는데도 영상이 나타나지 않아 은판을 서랍 안에 처박아 두었는데, 며칠 후에 다시 보니 영상이 또렷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그 즉시 서랍 속을 뒤졌고, 여기에서 마개가 열린 수은병을 찾아냈다. 은판이 서랍 속에서 수은 증기의 영향을 받아 현상되었다는 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즉, 빛을 쐰 은판에는 수은 증기가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빛을 쐬지 못한 은판에는 수은 증기의 입자들이 달라붙어 검게 만듦으로서 오늘날의 흑백사진과 똑같은 포지티브 영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다게르의 발표보다 불과 석 주 늦게 영국의 탈보트는 질산은을 바른 종이로 촬영을 한 뒤 이를 소금물에 적시면 '네거티브 영상'(흑백이 서로 뒤바뀐 상태로, 흑백 필름의 상태와 똑같음)을 얻을 수 있고, 이를 다시 질산은 종이에 맞붙여 강한 빛을 쐬면 '포지티브 영상'(흑백과 백색이 제대로 된 상태)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방식은 빛이 종이를 통과해야 했기에 선명치 못한 단점이 있어 다게르가 만든 '다게레오타이프'보다는 인기가 떨어졌지만, 다게레오타이프는 단 한 장의 사진밖에 만들 수 없는 반면 그의 방식은 네거티브 영상으로 된 원판 사진 한 장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았다. 바로 이 네거티브 영상이 오늘날의 필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후 오늘날의 비닐과 유사한 셀룰로이드가 만들어지면서 사진의 필름에는 셀룰로이드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아울러 다게르와 탈보트의 장단점을 보완한 각종 개발품이 뒤를 이었다. 이 중 가장 뛰어난 발명 중의 하나가 1888년 미국의 한 은행원이었던 이스트먼이 만든 제품이었다. 그는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소형화시키면서도 그 안에 1백 장의 두루마리식 필름을 내장 시킬 수 있게 했다. 이는 사진 한 장을 찍고 곧바로 사진관으로 달려가야 했던 기존의 문제를 일거에 해소했으면, 사진기의 가격은 물론 현상하는 데 필요한 비용까지 대폭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그는 "셔터만 누르면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소비자가 사진을 다 찍은 뒤 카메라는 회사에 보내면 회사에서 필름을 꺼내 현상한 뒤 다시 새 필름을 채워 사진과 함께 되돌려 주는 영업 방법을 채택, 사진이 대중화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회사가 바로 오늘날 세계 최대의 사진기업체인 코닥사다. 이스트먼의 사진기는 에디슨에 의해 영화용 영사기의 발명으로 이어졌고, 1912년 미국의 영화업자인 조지 스미스는 필름 크기를 오늘날의 필름 규격이 된 35mm로 소형화시켰다. 이후 화학ㆍ광학ㆍ전자 기술의 발달은 사진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빛의 색깔에 선별적으로 작용하는 감광제의 개발은 컬러 사진으로 이어졌으며, 35mm 리플렉스 카메라, 폴라로이드의 즉석카메라, 적외선을 발사해 거리를 측정하는 일본 캐논 상의 자동초점(Auto-Focus)카메라의 개발도 뒤를 이었다. 최근에는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빛의 물리적인 아날로그 신호를 반도체를 이용해 디지털 신호로 변경시키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94년 초 미국 애플사는 현상이나 인화를 할 필요가 없고, 대신 컴퓨터에 연결시키기만 하면 화면을 볼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까지 내놓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미 해병의 종군 사진사가 찍은 조선 병사의 사진이 최초의 사진이지만,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촬영은 1884년 일본에서 사진 촬영을 배워 온 김용원(金鏞元), 지운영(池運永)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지운영은 고종의 초상사진을 제일 먼저 찍어 주고 사진업 허가를 받아내기도 했는데, 단발령이 실시되면서 상투 튼 모습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진 촬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일제시대에도 국내 사진기 사업은 그저 기와집 한 채 값을 주고 일본에서 라이카 사진기 한 대를 들여오는 수준에 불과했고, 6ㆍ25이후에도 미군 PX에서 흘러나오는 사진기가 국내 사진기 산업의 전부였다.
1967년에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당시의 전경련 회장 이정림(李庭林 : 대한양회 회장)씨가 구로공단에 대한광학을 세운 뒤 일본의 마미야 사와 제휴해 사진기를 생산, '코비카'라는 이름으로 수출까지 했으나 범람하는 일제 카메라에 국내시장마저 잃고 83년에 도산하고 말았다. 이후 79년 일본 미놀타 사와 기술 제휴한 삼성항공이 기술 축적 과정을 거쳐 84년 독자적으로 오토포커스 카메라를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자 85년 동원정밀이 일본 펜탁스 사와, 87년 금성사가 캐논사와, 89년 현대전자가 올림푸스 사와, 대우전자가 야시카 사와 각각 기술 제휴하면서 사진기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같은 경쟁은 88년 서울올림픽을 맞으면서 줌 카메라 설계ㆍ셔터 제조ㆍ광학부품 제조기술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일본 업체와의 현격한 기술 차이로 수동 카메라 시장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소형 자동카메라 시장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삼성항공측이 독자 기술로 세계 최고 수준의 4배 줌 카메라를 개발하고, 현대, 아남 등도 잇달아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 등, 국내 업체들의 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최근의 엔고(高)현상 등에 힘입어 사진기 산업이 활성화되고 있는 단계를 맞고 있다.
Daguerreo Type Cannon 1840년
니옙스(1765년~1833년)
다게레오 타입 사진
다게레오 타입 최초 카메라
다게르(1787년~1851년)
옵스쿠라의 개념
옵스큐라를 이용한 풍경스케치
초기의 카메라
최초의 사진
카메라 옵스큐라
카메라의 개념
탈보트(1800년~1877년)
탈보트의 카메라
페츠발(1807년~1891년)
페츠발(Petval) 타입의 f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