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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만리(萬里)의 장성(萬里長城)을 쌓다.
2020년 07월 09일
○ 세속(世俗)에서 전(傳)하는 바로는, 「세속(世俗)이란 말은… … 이 세상(世上)에서 또는 세상(世上)에서 흔히 있는」등의 의미(意味)인데, 세속(世俗)에서 전(傳)하기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소위(所謂) 중국(中國)에서도, 반도(半島) 조선(朝鮮) 땅에서도 똑같이 통용(通用)되는 말이다. 즉(卽),
[1] 世宗 154 地理志 / 平安道 편에서도 말하기를 : 《古長城:俗傳萬里長城,自麟山郡西鎭兵串江始築,歷義州南,連延朔州,昌城,雲山,寧邊,至于熙川東古孟州之境,接于咸吉道,定平境. : 옛 장성(古長城) : 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고 하였다.
[2] 史記 列傳 / 蒙恬 편에서…
《秦已并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築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於是渡河,據陽山,逶蛇而北. :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몽념(蒙恬)은 30만 대군(大軍)의 무리를 이끌고, 북쪽에 있는 융적(戎狄)을 몰아내고, 하남(河南)을 손에 넣었다.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지형(地形)을 이용하여, 험난한 성채를 만들었는데, 림조(臨洮)로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까지 동서(東西) 또는 남북(南北)으로 만(萬)여리가 되었다.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하여 꾸불꾸불 북(北)쪽으로 이어졌다.》하였는데, 여기서 잠깐?
► 융적(戎狄)은, 융(戎)과 적(狄)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융적(戎狄)’이라고 하면 ‘북방(北方)오랑캐’라고 번역(飜譯)하고 해설(解說)하지만 이는 잘못(誤謬)된 것으로,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을 칭하는 것이다.
➊ 융(戎)은, 옛날 중국(中國)의 서(西)쪽에 있던 야만(野蠻)의 종족(種族)을 일컫는 말이라고 하였다.
➋ 적(狄)은, ‘북방(北方) 오랑캐’를 말한다고 하면서, 중국(中國) 북쪽의 미개(未開)한 야만(野蠻) 종족(種族)을 적(狄)이라고 하였다.
➌ 소위(所謂) 말하는 ‘오랑캐’란 바로 ‘융(戎) 즉(卽) 서융(西戎)’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의 노략질(寇)과 침공(侵攻) 때문에 많은 어구(語句)들이 만들어졌다. 곧
“戎具(융구)는 병기(兵器)를, 융병(戎兵)은 병사(兵士)를, 융비(戎備)는 군비(軍備) 또는 전비(戰備)를, 융사(戎事)는 군사(軍事)에 관한 일을, 융마지간(戎馬之間)이란 전쟁(戰爭)을 하고 있는 동안, 융헌(戎軒)은 싸움에 쓰는 큰 수레 즉 병거(兵車)”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실제(實際)로는 북적(北狄)보다는, 서융(西戎)의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이 휠 씬 많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 【역사통설(歷史通說)논자(論者)들은, 중원(中原)의 북방(北方)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이 괴롭힌 것처럼 묘사(描寫), 해설(解說)하고 있지만, 실제(實際)론 서양(西洋) 오랑캐 즉(卽) 서융(西戎)들의 침탈(侵奪)이 휠 씬 많았다는 이야기다.】
[3] 史記 列傳 / 趙高 편에서…
《使者曰:臣受詔行法於將軍,不敢以將軍言聞於上也. : 사자(使者)가 이르기를, 신(臣)은 조서를 받아 장군에게 법을 행할 뿐, 감히 장군의 말을 듣고, 상(황제)에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蒙恬喟然太息曰:我何罪於天,無過而死乎?良久,徐曰:恬罪固當死矣.起臨洮屬之遼東,城塹萬餘里,此其中不能無絕地脈哉?此乃恬之罪也.乃吞藥自殺. : 몽념(蒙恬)은 한참 크게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과오도 없이 죽어야만 하는가? 하면서, 천천히 말하기를, 념(恬)의 죄는 죽음에 해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림조(臨洮)는 요동(遼東)에 속했는데, 성참(城塹 : 성과 참호)이 만(萬)여리인데, 이것의 그 중간에 지맥(支脈)을 끊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나의 죄인가? 그리고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었다.》고 하였다.
〈起 臨 洮 屬 之 遼 東, 城 塹 萬 餘 里 :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시작된(일어난) 임조(臨洮)에서 시작되어 요동(遼東)에 까지 이어져, 성참(城塹)이 만여(萬餘)리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형지세(地形地勢)로 살펴보면 : 진(秦)나라의 장성(長城)은, 하(河)를 떠나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하여 북쪽으로 꾸불꾸불 이어졌다고 했기 때문이다(於 是 渡 河, 據 陽 山, 逶 蛇 而 北).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나라 장성(長城)이 정말(?)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면 :
➨ 사기(史記) ‘몽념(蒙恬)’ 열전(列傳)에 따르면 : 오늘날의 섬서(陝西) 북방(北方) 내몽고(內蒙古) 지방에 “양산(陽山)”이란 이름의 산(山)이나 산맥(山脈)이 있어야 하는데, 음산산맥(陰山山脈)이니, 대청산(大靑山)이니 하는 이름만이 존재(存在)하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양산(陽山)”이란 이름을 가진 산(山)은 없다.
➨ 《마지막 만리장성(萬里長城)이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하여 북(北)쪽으로 꾸불꾸불 이어졌다(於 是 渡 河, 據 陽 山, 逶 蛇 而 北)》고 했을 때, 〈림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를 대입(代入)해보면 : 요동(遼東)지방(地方)은, 영하성(寧夏省)을 관통(貫通)하는 “하(河)”의 동(東)쪽 지방을 일컫는 말이 된다.
이러한 추론(推論)은,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나라”가 진정(眞正) 중원(中原) 땅의 함양(咸陽)에 있었다.」고 할 때의 이야기다.
► <지맥(支脈)을 끊는 것이 죽을죄가 될 수 있겠는가?>에서,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의 미신적(迷信的) 관념(觀念)이다.”
산맥(山脈)을 끊음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벌을 받는다는 것 때문이다. 대지(大地)는, 인간(人間)을 생육(生育)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므로 특히 특정(特定)한 곳은 땅의 기운(氣運)이 생기는 곳으로 이곳을 “지맥(支脈)”이라 한다. 따라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으면서 이러한 “지맥(支脈)을 끊으므로 해서 하늘의 벌(天罰)을 받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4] 通典 北狄 2 匈奴 下 / 《上問狀,應曰:周秦以來,匈奴暴桀,寇侵邊境,漢興,尤被其害. : 상(皇帝)이 문서를 보며 묻자, 응(應) 이르기를, 주(周), 진(秦)나라 이래, 흉노는 사납고 빼어나, 변경(邊境)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고, 한(漢)이 흥성하자 그 해(害)가 더욱 미쳤습니다. 臣聞北邊塞至遼東,外有陰山,東西千餘里,草木茂盛,多禽獸,本冒頓單于依阻其中,治作弓矢,來出為寇,是其苑囿也. : 신(臣 : 應)이 듣기로, 북쪽의 변경에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밖으로 음산(陰山)이 있고, 동서(東西)가 천 여리이며, 초목이 무성하고, 금수(禽獸)가 많습니다. 본래 모돈(冒頓)선우는 장래의 노략질을 위하여 험한 그 가운데를 의지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고 다스렸습니다. 이것은 원유(苑囿)입니다하였다. 至孝武世,出師征伐,斥奪此地,攘之於幕北.建塞徼,起亭隧,築外城,設屯戍,以守之,然後邊境得用少安. : 효무제(孝武帝) 때에 이르러 장수들이 정벌을 나갔는데, 이 땅을 빼앗고 물리쳐, 막북(漠北=幕 北)에서 내쫓았다. 변방의 경계에 성채를 세우고, 역참(亭)과 조그만 길(隧)을 만들었다. 외성(外城)을 쌓고, 둔을 치고 수자리를 서며, 수비하는 것이다. 그러한 뒤에 변경(邊境)은 약간의 안정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 여기서 중요(重要)한 대목(臺木)은 : 〈북변(北邊)의 새(塞)에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밖으로 음산(陰山)이 있고, 동서(東西) 천여(千餘)리〉라는 기록(記錄)이다.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북변(北邊)의 새(塞)가 됐든, 음산(陰山)이 됐든, 또는 림조(臨洮)가 됐든, 오늘날의 요동(遼東) 땅과는 수천(數千)리 이상(以上)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요동(遼東)요서(遼西)는 다른 곳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만리(萬里)면 3,750km ∼ 4,000km 정도가 되는 아주 먼 거리(距離)다. 이런 장성(長城)은 없다. 일천(一千)리 또는 수천(數千)리 쌓은 장성(長城)이 동서(東西)로, 남북(南北)으로 꾸불꾸불 이어지다(延袤)보니, 세속(世俗)에서는 이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게 예나 지금이나 정답(正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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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자.
[5]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연산군(燕山君) 6년 경신(AD 1,500년) 6월 26일(무신) /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이 장성(長城)을 쌓아서 국가(國家)의 방비(防備)로 삼아야 한다고 아뢰다
《戊申 / 領議政韓致亨等啓:臣等聞,臺諫以築城爲未便.臣等亦知大役之不可輕擧, 勢不得不爾.中略. :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듣자오니 대간(臺諫)이 장성(長城) 쌓는 일이 불편하다고 했다 하는데, 신 등 역시 큰 역사를 경솔히 시작할 수 없는 것은 아오나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중략(中略). 前朝靖宗朝柳韶自仁山至鐵嶺築長城,延袤萬里,其功不細.今使弘文館,進柳韶傳賜覽則可知.中略. : 전조(前朝) 정종(靖宗) 때에 유소(柳韶)가 인산(仁山)에서 철령(鐵嶺)까지 장성을 쌓아 만 리(萬里)나 길게 뻗쳤으니, 그 공력이 적지 않습니다. 중략(中略).》
➊ 영의정(領議政)의 말은, 고려(高麗) 때 명(命)을 받은 유소(柳韶)가 쌓은 장성(長城) 이 “만 리(萬 里)에 뻗쳤다”고 말하고 있으며, 높이와 폭은 모두 25척(尺)이라고 하였다.
또 신개(申槩)의 인재집(寅齋集)과 세종실록(世宗實錄) 22년 경신(1440)2월 18일(신묘)등에서는 수천(數千)리나 뻗쳤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가려면 3달이나 걸렸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➋ 그런데 ‘여타(餘他) 기록(記錄)’에서는 겨우 1천여(千餘)리라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으며, 높이와 폭은 모두 25척(尺)이라고 하였다.
[6] 高麗史節要) 4권 덕종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 계유 2년(1,033)
《命平章事柳韶,創置北境關防寧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西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等十三城,抵耀德,靜邊,和州等三城,東傳于海,延袤千餘里,以石,爲城,高厚,各二十五尺. : 평장사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경계에 관방(關防)을 새로 설치하게 하여, 서해 가의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새(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盈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길이가 천여 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만들었으며 높이(高)와 두께(厚)가 각각 25척이었다.》
► 평로(平虜)는, 어디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반도(半島) 땅에 5,000년 살아 숨 쉬는 역사(歷史)가 전개(展開)되었다고 말하면서, 중요(重要)한 지명(地名)이 어디에 있었는지 조차 모른대서야 원… …그러면서 어떻게 1천여(千餘)리란 거리(距離)가 계산(計算)되었을까? 귀신(鬼神)조차 통곡(痛哭)할 일이다.
[7] 東史綱目 7상 / 계유년 덕종 2년(송 인종 명도 2, 거란 흥종 중희 2, 1033)
《추8월 처음으로 북계(北界)에 관성(關城)을 설치하였다. 북계가 강한 오랑캐와 이웃하여 항상 침략을 입으므로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지형을 살피게 한 다음 처음으로 관성을 설치하였다. 서해(西海)의 옛 국내성(國內城)의 경계인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 모두 지금의 의주(義州)에 있고, 영해(寧海)는 지금 미상 ㆍ운주(雲州) 지금의 운산(雲山) ㆍ안주(安州) 지금의 개천(价川) ㆍ청새(淸塞) 지금의 희천(熙川) ㆍ평로(平虜) 지금은 미상 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 지금의 의주(義州) 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성(城)을 거쳐 요덕(耀德)ㆍ정변(靜邊) 모두 지금의 영흥(永興)에 있다 ㆍ화주(和州) 지금의 영흥(永興) 등의 3성에 잇닿아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1천여 리에 뻗쳐 있는데,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이다. 이 역사를 일으켰을 때 거란이 군사를 보내어 제지시켰는데, 교위(校尉) 변유(邊柔)가 몸을 드날려 앞질러 올라가서 이를 쳐 물리쳤다.》고 하였는데,
영해(寧海) :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예를 들면 평로(平虜)도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하고, 영해(寧海) 역시(亦是) 어디에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일천(一千)여리란 거리(距離)가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 위의 글 [5]+[6]+[7]을 보면 :
1 척(尺) : 고려(高麗) 때 : 32.12㎝
25척(尺) : 8.03 m 【높이(高) 8.03m / 두께(厚) 8.03m】
이 정도(程度)의 장성(長城)이라면, 시황제(始皇帝)의 명(命)으로 부소(扶蘇)와 몽념(蒙恬)과 30만 대군(大軍)이 축조(築造)했다고 전해오는 만리장성(萬里長城)과 비길 수 있는 규모(規模)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두께가 8.03m가량이라면 성(城) 위에서는 기마(騎馬)가 순찰(巡察)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規模)의 성(城)이다. 근데 궁금한 것은, 이러한 장성(長城)의 흔적(痕迹)이나 잔존(殘存)하는 기초(基礎)라도 상존(尙存)하고 있는 것이냐? 할 때, 과연(果然) 답(答)이 있을까?
말로만 떠들고, 말로만 해설(解說)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식 역사해설(歷史解說)이지 않느냐? 하는 반문(反問)이다.
[8] 星湖僿說 3권 / 天地門 公嶮碑
《公險碑 / 髙麗徳宗時命柳韶置北境關防起自義州歴泰川雲山熈川孟山以抵耀徳静邉和州耀静和皆永興地. : 고려 덕종(德宗) 때에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국경에 관방(關防)을 두게 하였는데, 의주(義州)에서부터 시작하여 태천(泰川)ㆍ운산(雲山)ㆍ희천(熙川)ㆍ맹산(孟山)을 거쳐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에 이르렀으니, 요덕ㆍ정변ㆍ화주는 모두 영흥 땅이다.
[9]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7권 / 변어전고(邊圉典故) / 폐지된 산성
《장성(長城), 고려(高麗) 덕종(德宗)이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경 관방(北京關防)을 설치했는데, 주(州)의 서쪽 바닷가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홍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색(淸塞)ㆍ평로(平盧)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개에 걸쳐 있고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이르러 동으로 바다에 다다랐으니, 그 길이가 1천여 리이며, 돌로 성을 쌓았다. 세상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부른다.》
[10] 오산집 속집 제2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식(崔東式)【1562~1614. 본관(本貫) 삭녕(朔寧)】에게 주다
《옥문에서 돌아가고픈 생각 너무나 아득해라 : 玉門歸思政茫茫 / 조도와 경파가 대황에 접하였지 : 鳥道鯨波接大荒 / 눈 덮인 음산은 호지가 가깝고 : 雪壓陰山胡地近 / 구름 이어진 발해엔 새원이 길디길지 : 雲連渤海塞垣長 / 쇠퇴하는 노년에 세월까지 빠르지만 : 凋年急景天催律 / 질어의 그 웅심에 검광이 빛났었지 : 叱馭雄心劍耀鋩 / 역루 향해 아득한 꿈 회상해 보게나 : 試向驛樓廻遠夢 / 봉성의 깃발에 달빛이 번뜩이네 : 鳳城旌旆月翻光》하였다.
➊ 옥문(玉門)은 옥문관(玉門關)을 말하는 것이고, 옥문(玉門)의 옛터가 지금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서북쪽 소방반성(小方盤城)에 있다고 전하며, 이곳은 서역에서 옥(玉)을 수입(輸入)할 때에 이곳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➋ 음산(陰山)이란 본시(本是), 신강성(新彊省) 오노목제(烏魯木劑) 서북방(西北方)에 있는 천산(天山)인 박격달봉(博格達峰)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내몽고(內蒙古) 남(南)쪽을 가로질러 동북(東北)으로 내흥안령(內興安嶺)과 연접(連接)한 산맥(山脈)을 말한다.”고 하며, 지도(地圖)에도 그려져 있다.
➌〈발해(渤海)의 새원(塞垣)은 길디길지(長)〉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서는 : 새원(塞垣)이란 본시(本是)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였지만, 위의 본문(本文)에서는 분명(分明) “발해(渤海) 새원(塞垣)은 길고 길지”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는 거다.
발해(渤海)란 천연적(天然的)인 해자(垓子)역할을 하는 바다(海)이기 때문에 이곳에 길고 긴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다는 말은 웃기는 이야기다. 발해(渤海) 자체(自體)가 길고 긴 장성(長城)역할(役割)을 한다는 의미(意味)가 아닐까?
“오늘날의 발해(渤海)는,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작품(作品)이다.”
[11] 인재집(寅齋集) 제2권 / 소(疏) / 함길도와 평안도 두 도에 관을 설치하기를 청하는 소〔請咸平兩道設關疏〕
《謹按高麗史.德宗命平章柳韶.創置北境關防.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朔,雲州,安水,靑塞,平虜,寧遠,定戎,朔州等十三城.東傅于海.延袤數千里.以石爲城.高二十五尺.廣如之.首尾凡三朔程. :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덕종(德宗)은,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쪽 변경에 관방(關防)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서해 바닷가 옛 국내성(國內城) 부근에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靑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삭주(朔州) 등 13성(城)을 넘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에 걸쳐 돌로 성을 쌓았으니, 높이가 25자요 너비도 그와 같았으니, 시작 지점부터 끝나는 곳까지 가려면 무려 석 달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自是東西蕃賊.不敢窺邊.至文宗時.爭來款塞.願置州縣.屬籍編戶者.殆近萬人. : 이로부터 동서의 오랑캐 도적들이 감히 변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서는 다투어 귀순해 와서 변방의 관문을 두드렸으며, 주현(州縣)을 설치하자 호적에 편입시켜 주기를 원하는 자가 거의 1만 명에 가까웠습니다.》라고 하였다.
► 인재집(寅齋集)【신개(申槩) 1,374년(공민왕23)4월-1,446년 1월】: “수천(數千)리”와 “천여(千餘)리”는 전혀 다른 차원(次元)의 이야기이고, 또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3달이나 걸렸다”고 하니, 1일에 40리를 가면 3천 여리요, 1일에 60여리를 가면 4-5천리에 달하는 엄청난 길이에 해당(該當)된다. 따라서 “수천(數千)리에 달한다.”는 말이 옳은 것이고, 이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한 말이 정확(正確)한 표현(表現)이다.
[12] 임하필기 제11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고려의 서북계(西北界)
《덕종(德宗) 2년(1033)에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장성(長城)을 쌓았으니, 서해 바닷가 압록강이 바다에 들어가는 어귀로부터 동(東)으로 지금 영흥부(永興府) 바다 맞닿은 곳까지 천 리에 이르는 길이다. 돌로 쌓았는데 높이와 폭이 각각 25척으로서 여진을 방어하였다.》고 하였다.
[13] 무명자집 시고 제6책 / 시(詩) / 영동사 430〔其四百三十〕
《詠東史.其四百三十 / 《姜公事業築京城.二十二年始乃成.更有柳韶防北界.一千餘里石崢嶸.姜邯贊以京都無城郭.請築之.凡二十二年而畢役.德宗命柳韶創置北界關城.起自西海濱.東傅于海.延袤千餘里.以石爲城. : 강감찬(姜邯贊)이 서울에 성곽이 없다 하여 성곽 쌓을 것을 청하였다. 모두 22년 만에 성곽 축조가 끝났다. 덕종(德宗)이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계관성(北界關城)을 처음으로 설치하게 하니 서해 가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바다까지 이르렀다. 총 길이가 천여 리로,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다.》
“강공이 건의한 서울의 나성 공역이 : 姜公事業築京城 / 스물두 해만에 비로소 완성되었다오. : 二十二年始乃成 / 유소가 또 북계에 방어하는 성 쌓으니 : 更有柳韶防北界 / 천여 리에 석성이 깎아지른 듯하였네. / 一千餘里石崢嶸” 하였다.
주(注)를 보면 : 개경의 나성(羅城 외성)은 제8대 임금 현종(顯宗) 즉위 초에 강감찬의 건의로 왕가도(王可道, ?~1034)에 의해 축조되었는데, 나성이 이때까지 없었던 것은 이제현(李齊賢)에 따르면 국초에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이 병들고 지쳤기 때문에 차마 토목공사를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성 축조 공사는 현종 20년(1029)에 끝났는데, 둘레가 2만 9천 7백 보, 높이가 27척, 두께가 12척이었다. 왕가도는 본래 이씨(李氏)였으나 이 나성 축조의 공으로 왕씨(王氏) 성을 하사받았다. 《高麗史 卷94 姜邯贊列傳ㆍ王可道列傳, 卷110 李齊賢列傳》 《增補文獻備考 卷25 輿地考13 關防1 高麗都城》
주(注)를 보면 : 석성(石城) : ‘석성(石城)’은 글란(契丹)과 여진(女眞)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일명 천리장성(千里長城), 북계관성(北界關城)이라고도 한다. 제9대 임금 덕종 2년(1033) 8월에 덕종의 명을 받은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유소(柳韶)에 의해 축조가 시작되어 제10대 임금 정종(靖宗) 10년(1044) 경에 완성되었다. 압록강이 서쪽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곳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북계(北界)의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4성(城)을 거쳐 동계(東界)의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성에 이르러 바다까지 이르게 하였다. 길이가 천여 리, 높이와 폭이 각각 25척이었다. 《高麗史 卷5 德宗世家 2年, 卷58 地理志3 安北大都護府 麟州, 卷82 兵志2 城堡》 《增補文獻備考 卷30 輿地考18 關防6 平安道 陽德》
[14] 세종(世宗) 22년 경신(1440)2월 18일(신묘) / 우의정 신개가 함길ㆍ평안 양도의 부방, 입보 등의 폐단과 비변책에 대해 상언하다
《謹按高麗史,德宗命平章柳韶,創置北境關防,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朔·雲州·安水·靑塞·平虜·寧遠·定戎·朔州等十三城,東傳于海,延袤數千里,以石爲城,高二十五尺,廣如之.首尾凡三朔程. :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오니, 덕종(德宗)이 평장(平章)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경(北境)의 관방(關防)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서해(西海) 바닷가의 예전 국내성(國內城) 지경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새(靑塞)ㆍ평노(平虜)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동해(東海)에 이르는 수천 리를 뻗어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25척이요, 넓이도 그와 같았으며, 무릇 끝에서 끝으로 가려면 석 달이나 걸렸습니다. 自是東西蕃賊,不敢窺邊.文宗時,爭來款塞,願置州縣,屬籍偏戶者,殆近萬人。: 그로부터 동서의 오랑캐 도적들이 감히 변경을 엿보지 못하였고,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서는 다투어가며 와서 변방에서 항복하고 주(州)나 현(縣)을 설치하기를 청원하여, 국적에 붙여 민호로 편입된 자가 1만 명에 가까웠습니다.》라고 하였다.
► “수천(數千)리”와 “천여(千餘)리”는 전혀 다른 차원(次元)의 이야기이고, 또 “시작된 곳에서 끝까지 가려면 3달이나 걸렸다”고 하니, 1일에 40리를 가면 3천 여리요, 1일에 60여리를 가면 4-5천리에 달하는 엄청난 길이에 해당(該當)된다.
결국(結局) “수천(數千)리에 달한다.”는 말이 옳다.
[15] 고려사 열전 94 유소(柳韶)
《柳韶, 史失其世系.中略.德宗二年, 韶始置北境關防. 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江入海處, 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等十三城, 抵耀德·靜邊·和州等三城. : 유소(柳韶)는 사서(史書)에서 그 세계(世系)를 잃어버렸다. 덕종 2년(1033), 유소가 처음 북쪽 국경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서쪽 해변의 옛 국내성(國內城) 지역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세웠는데, 동쪽으로 위원진·흥화진·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진(寧德鎭)·영삭진(寧朔鎭)·운주(雲州)·안수진(安水鎭)·청새진(淸塞鎭)·평로진(平虜鎭)·영원진(寧遠鎭)·정융진(定戎鎭)·맹주(孟州)·삭주(朔州) 등 13개의 성을 넘어, 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화주(和州) 등 3개의 성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유소(柳韶)열전(列傳)’편에서는, 장성(長城)의 길이(長)에 대한 기록(記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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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1] - [15]까지 고려(高麗)때의 만리장성(萬里長城) 또는 천리장성(千里長城), 그리고 대륙(大陸)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여러 문헌(文獻)의 기록(記錄)을 살펴보았는데,
첫째는, 그 길이(長)가 수천(數千)리에, 기점(起點)부터 장성(長城)끝가지 가려면 세 달을 가야한다는 것이고, 장성(長城)은 돌(石)로 쌓았는데, 높이(高)는 25척(尺)【약 8.3m】, 두께(厚) 역시 25척(尺) 【약 8.3m】이나 되었고, 이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고,
두 번째 이야기는, 장성(長城)의 높이나 두께는 똑같은데, 그 길이(長)가 일천(一千)여리에 미쳤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과연(果然) 장성(長城)의 길이는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➊ “1천여(千餘)리”란 말은, 「한반도(韓半島) 땅에 고려(高麗)가 있었다는 전제(前提)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반도(半島) 땅을 보면,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로부터 함길도(咸吉道)로 이어져 화주(和州)로 이어졌다.”고 한다면 직선거리(直線距離)로 약 500km이니 연무(延袤)로는 600km 정도(程度)되지 않았을까? 그러면 1천여(千餘)리가 될 수 있다.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수천(數千)리란 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기 때문에, 그걸 잘 알고 있는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이걸 ‘1천여(千餘)리’로 만든 것이다.」
➋ “수천(數千)리에, 3달을 가야하며,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한다고 한 경우(境遇)는 살펴보면 : 「명일통지(明一統志) 또는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조선국(朝鮮國)은, “동서(東西) 2천리에, 남북(南北) 4천리의 나라였다.”고 하였다.
이에 비춰보면, 「2천리(千里)에 꾸불꾸불 이어졌을 것이므로(延袤), 2천리(千里)를 넘어, 3천리(千里)도 가능(可能)한 연장(延長)이므로, 세속(世俗)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했다는 말이 옳은 것이다.」 이게 인간(人間) 삶의 발자취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이란 말은, 그 모두가 “조선(朝鮮)의 것이었다.”는 뜻이다. 어디 감히 ‘물가를 찾아 이동(移動)하며 살아가던 한족(漢族)이란 소수민족(少數民族)’이 무슨 재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➌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서는, 「조선국(朝鮮國)은 ‘성경(盛京) 곧 심양(瀋陽)’에서 동(東)쪽으로 1천8백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남쪽 동해(東海)바다와 열도(列島) 일본(日本)의 중북부(中北部) 및 그 이북(以北)땅에 조선국(朝鮮國)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가?
또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는 설명(說明)하기를 : ‘동서(東西)가 2천리(千里)’인데, “조선국(朝鮮國)의 왕성(王城)에서 동(東)쪽으로 770 리를 가면 바다(海)에 닿는다.”고 하였으며, “조선국(朝鮮國)의 왕성(王城)에서 서(西)쪽으로는 1,230리를 가야 서해(西海)바다에 닿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 ‘구글어스’로 직선거리(直線距離)를 재보면 : 〈반도(半島) 서울(漢陽 : 王城)에서 산동반도(山東半島) 바닷가까지 약(約) 400km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왕성(王城)에서 서(西)쪽으로 1,230 리는 약 480km이므로, “당시(當時)에 반도(半島) 땅과 산동반도(山東半島)가 붙어있어, 반도(半島) 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즉(卽) “발해(渤海)와 황해(黃海)는 없었다.”는 뜻이다. 청(淸)나라는 조선왕조(朝鮮王朝)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에 있었던 나라다. 이들이 말하는 조선국(朝鮮國)은, 반도(半島) 땅이 아니었다는 거다.
〈청(淸)나라 땅과 조선(朝鮮)의 서(西)쪽 땅이 서로 붙어있고, 발해(渤海)와 황해(黃海)는 없었다.〉는 뜻이다. 조선사(朝鮮史) 즉 한국사(韓國史)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될까?
2020년 07월 09일 [글쓴이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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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서 2천리와 남북 4천리의 땅은?
아마도 가장 핵심적인, 군주가 직접 통치했던 군주의 봉지가 아니었을까?
명(明)나라와 청(淸)나라는,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에 대해, 그 지형지세를 가장 잘 알 수 있었던 나라가운데 포함된다. 특히 명나라는 왜란 때 조선 땅 곳곳에서 전투를 치뤘다고 했으니 말이다.
청나라도 조선의 지형지세를 몰랐다면, 압록강을 도강한 후, 주요 진지와 산성을 피해 무인지경으로 한양(왕성)에 입성할 수 있었을까? 嚮導(향도)를 앞 세웠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전한(前漢)과 후한(後漢)과 위(魏) 및 북위(北魏)와 수(隋), 당(唐)등의 나라등도 명청(明淸)과 같이 조선(朝鮮)의 땅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알 수 있는 형편에 있었다.
이러한 나라들의 역사서에서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과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의 조선왕조는 반도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임에도, 우린 믿거나 말거나, 거짓이거나 말거나, 반도(半島) 땅의 5000년 역사에 목매 단다. 6.25때 망명정부를 고려한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럼 상해임시정부는 왜 망명정부가 아닌 "임시정부"라는 이름을 가졌을까?
이런 물음(?)에 누구도 답을 내 놓치 못한다.
6,25전쟁속에서도, 그 후에도 일제(日帝) 제국주의자들의 부역 매국노들은, 영웅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자신들의 무훈(武勳)을 과대포장하고, 영웅을 만들어 지들의 위세를 펴는데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과대포장된 무훈담과 만들어진 영웅담을 온 국민들에게 전파시켜 정치적으로, 사적으로 마음 것 이용했다.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 대한민국에서는 그게 진실인 냥.....한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할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중학교 다닐 때 역사선생님이 고려의 천리장성을 이야기 하시면서 어쩌면 중국의 만리장성이 고려의 천리장성일 수도 있다라고 하시면서 그당시는 고려의 천리장성이 만리장성과 연결이 되어 있다라는 식으로 가르치곤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만리장성은 만리가 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이 허풍이 있어서 부풀려서 부른다고 하시더군요. 가물가물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