蔚山 太和書院 建築物
태화 서원
태화 서원의 건물은 울산 도호부 시절 도호부의 도총소였다. 도총소란? 조선 왕조때 오위 도총부의 아래 군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집회소로 세조 12년(1446) 에는 도진무라 불렀으며, 조선 말기에 고종 19년 (1882)에 혁파되었다. 그 이후 개화기에 울산 상부면의 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상부면에서 다시 울산면이 될 때에는 울산면사무소로 쓰였다. 다시 울산읍으로 승격되면서 읍사무소로 쓰던 건물이다. 현 태화 서원은 정조 21년 (1797)에 세웠으며, 정면 4칸에 측면 3칸의 팔짝지붕에 홋처마의 형태의 집이다. 또 익공양식을 취하고 있다. 1951년에 월성이씨 종중에서 서원을 설치하고 이름을 태화 서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조선조 중종때 당시 풍기 군수로 지내던 주세붕이 우리나라 최초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추모하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백운동 서원이 처음이다. 그 뒤 명종 3년에 (1547) 대 유학자인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자 즉시 국가에 사액을 청했고, 드디어 명종 5년에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이 내려졌다. 이를 시작으로 조선 말엽까지 설립된 서원의 수는 약 378개가 있었으며, 우리 울산이 포함된 경상도에서도 전체 서원수의 절반에 가까운 156개가 있었다.
이는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황과 기호학파의 거장 율곡으로부터 형성된 지역적인 대립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원의 주요기능은 향교와 동일한 교육기능과 교화 기능이었으며, 교육의 목표는 성현들을 본받고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중국 당대에는 경전과 서적를 간행하는 관제로서 학사, 수찬, 지서등의 관원을 두어 집현전서원 또는 려정서원이라 칭했고, 송대에는 학문이나 덕망이 높은 사람을 스승을 맞고 호학의 선비를 모아 강학하는 교육기관이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 또는 충절로 죽은 사람들을 제사하며 기리는 곳을 서원이라고 했다.
태화 서원은 기단을 쌓아 지면을 높게 하였기 때문에 겨울철에 난방에 필요한 아궁이 고래나 구들도 당연히 높아지게 되었다.
집의 기단은 자연석에 석축 기단을 퇴물림 형식으로 약 1미터 정도 쌓고 흙을 다진 기단을 하고 있다. 기단이 높고 낮음에 따라 남방식과 북방식으로 구별한다. 남방식 집은 지면보다 높게 하여 지면으로부터 습기를 피할 수가 있고 통풍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북방식 기단은 땅을 파고 집을 짓기 때문에 굳이 기단을 할 필요가 없으며 추운 겨울철에는 세찬 바람으로 인해 오히려 보온의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좋다.
태화서원을 오르는 계단은 우아하고 고풍스런 법수나 지대석, 그리고 소맷돌이 없고 자연스럽게 다섯 계단을 만들었으며, 계단은 동, 서계와 신도가 있었으나 몇번의 보수를 통해 서계는 없어지고 동계와 신도만 남아 있다.
초석은 가공석이 아닌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건물을 지탱하는 20개 기둥은 둥글게 다듬은 나무 기둥이다. 목조건물의 기둥은 원주나 방주를 많이 사용하나 대체적으로 원주를 많이 사용했다. 이는 둥근 것은 음양 오행의 나눔에 의해 남자를 상징하며 일반적으로 사랑채 기둥에 많이 사용해 왔으며, 사각 기둥은 음을 의미하며 여성들이 기거하는 안채의 기둥에 많이 사용했다.
태화 서원의 기둥의 맞춤은 사괘 맞춤으로 기둥의 사각 튼 곳에 창방과 익공 부재가 맞닥드러져 있다. 공포가 만들어지지 않은 일반 살림집이나 작은 규모로 된 부속채의 민도리집이나 또는 익공집에서 사용되는 맞춤법이다.
도리는 서까레를 받치는 역할로 도리를 높이느냐 내리느냐에 따라서 지붕의 높이가 결정되며 또한 지붕의 하중을 제일 먼저 받아 보와 기둥으로 힘이 전달된다. 도리는 원형의 도리를 굴도리라 부르고 네모의 형을 납도리다 부른다. 이 또한 음양의 천원 지방의 사상을 대치하여 원을 양성으로 네모를 음성으로 남녀의 거처 기능에도 음양의 사상의 지혜로움을 적용했다.
태화서원은 건물의 측면상을 바라볼 때 7량 집으로 일반 살림집에는 거의 없고 사찰이나 큰 궁궐 같은 건물에서 주로 건립되었다. 일반적으로 7량집은 중앙에 고주 2개에 보가 7개 걸린 집의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태화 서원은 정면 4칸 측면 3칸 집으로 기둥 20개의 길이를 모두 같이 했으며, 건물의 높이를 올리기 위해 창방과 평방사이에 소로를 얹은 화반을 끼웠다. 건물 내부에서도 어칸과 협칸 기둥에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다 마루보인 종보를 걸쳤다.
또 종보위에 종도리를 바치고 있는 대공은 판대공을 했다. 대공은 종보 위에서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부재를 말한다. 판대공은 조선시대에 널리 다포형식의 팔작 지붕에 널리 사용하였으며, 태화 서원에서도 판재를 사다리꼴 형태로 만든 대공을 여러겹 겹쳐서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종도리의 보는 건물의 앞뒤 기둥을 연결하는 것으로 지붕의 써가레와 도리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건물의 기둥은 사괘 맞춤의 형식이며 기둥 바깥쪽으로 나온 살미는 앙설형 한개와 수설형 2개로 되어 있고, 살미와 살미 사이에는 특이하게 공포가 없이 살미만 3개를 곁쳐 건축했다. 이는 화려한 불교 건축물과는 달리 서원의 기능과 강학을 하는 공간이라서 간소화 한듯 하다 .
한옥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잘 맞추어진 주거 공간이자 휴식 공간이다. 한옥의 구조와 형태를 보면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읽을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 중 대표적인 하나가 한옥의 처마이다. 처마에는 홋처마와 겹처마로 구분하는데 이곳 태화 서원은 홋처마로 이루어져 있다.
처마는 삶의 공간과 휴식의 공간을 넓혀 준다. 여름에는 더운 햇빛을 막아 시원하게 해주며 겨울에는 외풍을 막아 흙벽과 기둥을 보호하고 집안의 온기를 가두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처마를 길게하게 되면 마루를 통한 툇마루의 휴식공간마저 가질 수 있어 다양한 주거시설을 활용할 수도 있다.
태화서원은 익공형식으로 된 1출목 3포집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된 12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은 좌우 퇴칸과 어칸, 협칸이 같이 구성되어 있다.
팔각지붕은 우진각 지붕 위에 맞배 지붕을 올려놓은 것과 같은 형태의 지붕이다. 팔각지붕은 대체적으로 부속체보다는 중심적인 본 건물에 많이 사용되었다. 팔작지붕은 좀 더 발달된 지붕의 형태로 맞배나 우진각에 비해서는 시기적으로 늦게 사용되었으며, 맞배나 우진각보다는 목재량이 더 많은 구조로 건물이 웅장하고 단청 또한 더하여 화려하다.
태화 서원의 건물은 화려한 팔작기붕으로 암숫기와 33개를 걸친 용마루와 24개의 내림마루를 따라 12개를 이은 추녀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다 같이 귀면와로 마무리 했고 암기와 숫기와 모두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루는 장마루나 우물마루가 대부분이다. 우물마루는 한국 기후에 적합한 마루형태로 나무가 말라 틈이 벌어지면 한장 한장 촘촘히 밀고 끼워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화 서원의 마루는 울산 지방의 기후 조건이 대륙과는 기후 차이가 있으나 중국과 일본에서 많이 사용하는 장마루를 깔고 있으며 건물 보수를 위해 장마루에다 못을 사용했다.
단청은 건물의 목재를 비바람이나 병충해로부터 보호하고 건물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칠의 일종이다. 단청은 건물의 격조와 쓰임에 따라서 그 내용을 달리했다. 보통 단청에 사용되는 문양은 화재로부터 또는 벽사와 잡귀를 막기위한 주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식물 문양과 동물문양을 많이 사용하였다. 보통 식물 단청에 있어서 연꽃, 매화, 국화는 선비의 기상인 도덕성과 품격을 상징한다. 해당화는 신선을 상징하고, 모란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며, 난초는 선비의 정신을 나타내었다. 동물 문양에는 용이나 봉황이 많이 사용되었고, 봉황은 상서로운 동물로써 황제를 상징했으며, 용은 호법신으로 왕을 상징한다.
울산 태화서원은 성남도 도심에 있었지만 지금은 울산왜성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경주이씨 문중 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도심에 있던 태화서원에의 건축물에 대한 내용이다.
태화 서원 건물의 외부 편액은 태화서원과 화수회라는 두 편액 횡으로 걸려 있고 기둥의 주련은 없다. 이 두 편액은 모두 한사람의 글씨체로 조선시대에 흔히 유행하는 왕희지의 필법으로 썼다. 필치는 종횡의 획들이 강건 온후하며 斜劃은 필속을 더한 후덥한 필치로 고결한 인품과 품격을 갖춘 선비들의 옛스러움을 자랑하고 있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편액의 단청은 화려하여 고풍스런 필치와 조화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비바람에 빛이 바래져서 모두 재 단청을 바라고 있다.
또 건물 서편 계단 앞에는 太和書院創立事蹟碑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전면에는 전서의 필치로 새겨져 있으며, 비면의 서측면에서 배면까지 음기는 모두 예서의 필치로 기록했으며 우측면에는 태화서원의 건립자들이 각각 새겨져 있다.-後記 參考
태화 서원의 내부에는 방문 동편 벽에는 상량당시 인근 고을 선비들의 태화서원 원운 축하 한시들의 걸려 있고, 서편에는 태화서원기가 있다. 본건물은 도호부 시절 관아로 사용했으나 경주이씨 가문에서 매입하여 선조의 향사와 경리 후손의 친목도모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어 왔고, 또한 경주이씨 6위가 배위되어 있는 감실이 있으며, 합문은 3짝 6개의 미닫이 문짝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 건물의 배치를 정할 때에는 좌향을 음.양으로 구분하여 집주인의 신기(身氣)와 집터의 토기(土氣)에 의한 주변환경의 산진수회(山盡水回)에 따른 오행을 근본으로 정했지만 지금은 편하고 용이한 대로 정하고 신축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건축 사상은 자연속에서 사는 인간은 하늘아래 땅 위에서 산다는 천문사상이나 음양오행사상에, 자연 숭배사상 및 도교. 유교. 불교의 종교사상 등으로 정립하면서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 온 민족고유의 사상이다.
우주 만물의 근원은 음과 양으로 시작된다. 그에 따라 자연섭리에 순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理致)다. 주거함에 있어서도 생활상의 불편한 점을 보완하고, 또한 기후나 주위 환경에 적합한 여건을 조성하여 생활하는데 유익하도록 개선하여 활용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태화 서원의 건물의 배치와 대문의 위치 구성은 양택인 東四宅의 하나로 정남향(離宅)의 방위에 안치 하였으며, 대문은 서향 (兌門)으로 양반들의 출입을 쉽게 하기 위한 솟을 대문을 달았다.
<참고>---울산향토사지에서 발췌
* 太和書院建立 事績碑 原文
古 人 不 朽 德 言 事 功 幷 傳 令 也 패(犬+市) 立 元 老 故 李 始 榮 閣 下 不 肖亦參 三 一 運 動 逃 命 于 海 外 喫 苦 三 六 年 天 道 更 回 三 千 里 舊 强 依 然尙 存 矣 乃 박(白+文) 領 當 選 巡 回 時 同 伴 抵 蔚 曰 旣 有 吾 宗 三 百 萬合 力 團 結 功 臣 崇拜 英 才 養 成 報 國 安 民 是 國 家 之 非 本 義 乎 如 此訓 示 愛 拜 者 李 圭泰 始 창(幷+刃) 協 助 者 李 鐘 河 瓦 屋 十 餘 架 及 其 垈 地 百八 十 二 坪 李 龍 範 二 十 萬 李羽 龍 二 十 萬 皆 寄 贈 于 是 新 羅 창(幷+刃) 業 功臣 李 瓢 巖 蘇 判 高 麗 讚 化 功 臣 悅 軒 東 菴 益 齋 我 韓 再 造功 臣 白 沙 幷 六 先 生 奉 安 之 日 擧 國 士 林 來 會 子 孫 亦 參 廟 曰景 德 堂 曰 太 和 書 院 是 也 已 經 舍 萊 且 積 年 尙 無 位 痛 歎 之 餘 圭 泰翁 不 顧 諸 養 自 活只 在 所 有 三 千 坪 內 在 家 屋 六 間 全 部 寄 贈 于 本院 年 年 香 火 之 資奬 學 之 費 充 當 云 偉 哉 翁 之 圭 誠 致 之 心 有 遠 慮 君 子 以 爲 善 係 善述 以 崇 其 祖 故 翁 之 後 承 係 以 世 世 上 記 趣 旨 委 行 爲 此 建 碑
檀 紀 四 二 九 七 年 九 月 十 五 日
瓢 巖 後 孫 各 貫 李 氏 大 同 花 樹 會
總 栽 李 甲 成
眞 城 李 吉 鎬
總 監 李 善 雨
* 참고
울산의 서원
태화서원: 정조21년 ( 1797)
구강서원: 숙종4년(1678) 1694 사액/ 1868 훼철
반계서원: 1712년 건/ 1868 훼철
원강서원: 1799년 건/ 1868훼철
난곡서원: 1848건/ 1868훼철
석계서원: 1868훼철 1975 복원
학호서원: 1868훼철
용연서원: 1373
자암서원: 1804건 1927 복설
치산서원: 1990 중건
증산서원: 철종2(1851)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