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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마음공부방] 정전(正典) 제2 교의편(敎義編) 제7장 사대강령(四大綱領) 정각정행(正覺正行)
정전(正典) 제2 교의편(敎義編) 제7장 사대강령(四大綱領)
정각정행(正覺正行)
설교 : 전성욱 교무님
일시 : 원기 106년 7월 21일
타이핑 : 심현승
정전(正典) 제2 교의편(敎義編) 제7장 사대강령(四大綱領) 사대 강령은 곧 정각 정행(正覺正行)·지은 보은(知恩報恩)· 불법 활용(佛法活用)·무아 봉공(無我奉公)이니, 정각 정행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지은 보은은 우리가 천지와 부모와 동포와 법률에서 은혜 입은 내역을 깊이 느끼고 알아서 그 피은의 도를 체받아 보은행을 하는 동시에, 원망할 일이 있더라도 먼저 모든 은혜의 소종래를 발견하여 원망할 일을 감사함으로써 그 은혜를 보답하자는 것이며, 불법 활용은 재래와 같이 불제자로서 불법에 끌려 세상 일을 못할 것이 아니라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 일을 더 잘하자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에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그 불법을 활용함으로써 개인·가정·사회·국가에 도움을 주는 유용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며, 무아 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 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마침 교당에 에어컨을 철거하는 바람에 스탭들도 되게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지요. 오늘은 사대강령 중 정각정행을 공부하려 합니다. 사대강령은 정각 정행, 지은 보은, 불법 활용, 무아 봉공이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다 읽으신 분들이 계신 걸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바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대강령과 교리도]
제가 교리도를 가져왔습니다. 사대강령을 보면 교리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도는 우리 교리의 핵심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도 상에서 정각정행, 지은보은, 불법활용, 무아봉공인 사대강령은 네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리도를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거북이로 보기도 합니다. 이 사대강령은 사람을 움직이는 네 개의 손과 다리, 혹은 거북이를 움직이게 하는 네 개의 발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대강령은 네 가지 행동강령입니다. 원불교 교단의 네 가지 지향점입니다. 대산종사님께서는 교단의 네 가지 줄거리, 교단의 네 가지 큰 목표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 교리도에서 보면 정각정행을 보면 오른쪽 위에 있습니다. 그 옆에는 진공묘유의 수행문, 삼학 팔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은 보은은 왼쪽 위에 자리 잡으면서 신앙문 옆에 있으며 사은 사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법 활용은 오른쪽 밑에 무시선 무처선과 연결이 되고, 무아봉공은 보은즉불공, 즉 처처불상 사사불공에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이자 최종 목적지는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일원상의 진리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고, 일원상과 같이 행동하자는 것이고, 일원상과 같이 은혜를 나투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일원상의 진리처럼 나투어 살며 곧 부처의 삶을 살자는 것이 원불교 교도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교리도에서는 일원상 진리로 가는 방향을 진공묘유의 수행문, 인과보응의 신앙문이라는 두 가지 문으로 밝히셨습니다. 이 두 문으로서 일원상의 진리에 다가가고 회복하게 됩니다. 일원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리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이것과 연관을 해서 사대강령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각정행은 진공묘유의 수행문과 삼학 옆에 있습니다. 삼학 수행의 목표라고 표현을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또한 수행의 결과는 결국은 정각정행입니다. 몸통 부분에 있어서는 무시선 무처선으로 귀결이 됩니다. 이 내용이 통하는 것이고 이것이 결국 성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은 보은은 사은 신앙의 옆에 있습니다. 인과보응의 신앙문과 통합니다. 그래서 사은 신앙의 목표 또는 결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은보은은 신앙불공의 표준입니다. 그 밑에 보면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연결이 되고 무아봉공까지도 연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법활용은 생활과 연결이 되었다고 제가 표현했습니다. 결국 세상 일을 잘하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무아봉공은 원불교 교도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중과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네 가지 강령은 우리 원불교 교도의 신앙적, 수행적, 생활적, 모든 것에 연결되는 강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의 목표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정각정행만 살펴볼 것인데, 그래도 대체적인 의미는 살펴보았고, 이 사대강령은 하나의 구호로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가 수행의 구호로서 정각정행을 생각하고 나아가고, 신앙의 구호로서 지은보은을 향해 나아가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여기에 표현한 내용은 연마를 하면서 나름대로 구분을 해본 것인데 혹시 이견이 있으시거나 듣고 계신 대중들도 연마하시면서 의문이 드는 것은 질문을 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대강령을 간단하게 살펴봤고 오늘은 정각정행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각정행]
정각 정행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
우리가 왜 정각을 하고 정행을 해야할까요? 오늘이 올 여름 들어서 가장 더운 것 같습니다. 36도라고 하는데 더 덥게 느껴지는 곳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같은 날 정각정행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 더우니깐 잡념도 더 많이 일어나고, 하기 싫은 마음도 더 나고, 더운 날씨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땀이 나면 찝찝하기도 하고, 누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더 듣기 싫고, 여러가지 경계들이 더 강하게 다가오고, 거기에 끌려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같은 날 더 정각정행이 필요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하루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셨나 모르겠습니다. 법문에 왜 해야하는가를 찾아보았습니다.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11 한 제자 여쭙기를 [과거 부처님 말씀에 천상에 삼십 삼천이 있다 하오니 그 하늘이 저 허공계에 층층으로 나열되어 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천상 세계는 곧 공부의 정도를 구분하여 놓은 것에 불과하나니 하늘이나 땅이나 실력 갖춘 공부인 있는 곳이 곧 천상이니라.] 또 여쭙기를 [그 가운데 차차 천상에 올라 갈수록 천인(天人)의 키가 커진다는 말씀과 의복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말씀이 있사온데 무슨 뜻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키가 커진다는 것은 도력이 향상될수록 정신 기운이 커오르는 현상을 이른 것이요, 의복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은 도력이 향상될수록 탁한 기운이 가라앉고 정신이 가벼워지는 현상을 이른 것이니라. 그러나, 설사 삼십 삼천의 구경에 이른 천인이라도 대원 정각을 하지 못한 사람은 복이 다하면 타락하게 되나니라.] |
대원정각이라고 했습니다. 대원정각과 정각, 대각을 다 같은 의미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정각을 하지 못하면 아무리 복이 있어도, 도력이 높아도 타락합니다. 결국 정각을 해야 타락하지 않고 꾸준히 진급할 수 있고 복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18 한 제자 여쭙기를 [과거 부처님 말씀에 공부가 순숙되면 삼명 육통(三明六通)을 얻는다 하였사오니, 어느 법위에나 오르면 삼명 육통을 얻게 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삼명 가운데 숙명(宿明)·천안(天眼)의 이명과 육통 가운데 천안(天眼)·천이(天耳)·타심(他心)·숙명·신족(神足)의 오통은 정식 법강항마위가 되지 못한 사람도 부분적으로 혹 얻을 수가 있으나 정식 법강항마위 이상 도인도 얻지 못하는 수가 있으며, 누진명(漏盡明)과 누진통은 대원 정각을 한 불보살이라야 능히 얻게 되나니라.] |
대종경(大宗經) 제8 불지품(佛地品) 10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공부가 최상 구경에 이르고 보면 세 가지로 통함이 있나니 그 하나는 영통(靈通)이라,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천지 만물의 변태와 인간 삼세의 인과 보응을 여실히 알게 되는 것이요, 둘은 도통(道通)이라, 천조의 대소 유무와 인간의 시비 이해에 능통하는 것이요, 셋은 법통(法通)이라, 천조의 대소 유무를 보아다가 인간의 시비 이해를 밝혀서 만세 중생이 거울하고 본뜰 만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니, 이 삼통 가운데 법통만은 대원 정각(大圓正覺)을 하지 못하고는 얻을 수 없나니라.] |
대종경(大宗經) 제8 불지품(佛地品) 15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범부들은 인간락에만 탐착하므로 그 낙이 오래가지 못하지마는 불보살들은 형상 없는 천상락을 수용하시므로 인간락도 아울러 받을 수 있나니, 천상락이라 함은 곧 도로써 즐기는 마음락을 이름이요, 인간락이라 함은 곧 형상 있는 세간의 오욕락을 이름이라, 알기 쉽게 말하자면 처자로나 재산으로나 지위로나 무엇으로든지 형상 있는 물건이나 환경에 의하여 나의 만족을 얻는 것은 인간락이니, 과거에 실달(悉達)태자가 위는 장차 국왕의 자리에 있고 몸은 이미 만민의 위에 있어서 이목의 좋아하는 바와 심지의 즐거워하는 바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락이요, 이와 반면에 정각을 이루신 후 형상 있는 물건이나 환경을 초월하고 생사 고락과 선악 인과에 해탈하시어 당하는대로 마음이 항상 편안한 것은 천상락이니, 옛날에 공자(孔子)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을지라도 낙이 그 가운데 있으니, 의 아닌 부와 귀는 나에게는 뜬 구름 같다" 하신 말씀은 색신을 가지고도 천상락을 수용하는 천인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인간락은 결국 다할 날이 있으니, 온 것은 가고 성한 것은 쇠하며, 난 것은 죽는 것이 천리의 공도라, 비록 천하에 제일 가는 부귀 공명을 가졌다 할지라도 노·병·사의 앞에서는 저항할 힘이 없나니 이 육신이 한 번 죽을 때에는 전일에 온갖 수고와 온갖 욕심을 다 들여 놓은 처자나 재산이나 지위가 다 뜬 구름같이 흩어지고 말 것이나, 천상락은 본래 무형한 마음이 들어서 알고 행하는 것이므로 비록 육신이 바뀐다 할지라도 그 낙은 여전히 변하지 아니할 것이니, 비유하여 말하자면 이 집에서 살 때에 재주가 있던 사람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갈지라도 재주는 그대로 있는 것과 같나니라.] |
저는 법문들 중 이 불지품 15장이 가장 깊게 다가왔습니다. 정각을 하여야 형상 있는 물건이나 환경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 환경에 넘어집니다. 오늘 같이 더운 날은 넘어지기 쉽습니다. 누구의 말에 넘어지기 더 쉬운 날입니다. 그래서 환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정각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정각을 하여야 생사고락 선악인과에 해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이 생사입니다. 고락을 초월하자는 것입니다. 인과를 수용하고 인과에 맞게 선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정각을 하면 생사고락을 초월하고 인과에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천상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결과를 놓고 보면 정각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끌리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 법문을 보면 정각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각, 정행]
일원의 진리는 불조정전의 심인이 같고, 불조 정전의 심인은 우리 각자의 성품입니다. 정각은 일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정행은 무념행, 원망행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육근 작용의 표준으로써 정행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정각정행을 이렇게도 표현해주셨습니다.
한울안한이치에 제1편 법문(法門)과 일화(逸話) 3.일원의 진리 45절 "정각 정행(正覺正行)이란 일원의 진리를 알아서 원만하게 행하는 것이요, 지공 무사한 자리를 알아서 지공 무사하게 쓰는 것이며, 생멸 없는 자리를 알아서 생사에 해탈하는 것이요, 일체 만상이 없는 자리를 알아서 경계에 끌리지 않는 것이다." |
정각정행의 원문과 내용이 같습니다. 일원의 진리를 알아서 원만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핵심적인 내용이 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또 풀어주셨습니다. "지공무사한 자리를 알아서 지공무사하게 쓰는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지공무사한 자리가 일원의 진리 자리입니다. 일원의 진리자리처럼 지공무사한 자리를 알아서 지공무사하게 육근을 그렇게 쓰자는 것입니다. 또 생멸 없는 자리를 알아서 생사를 해탈하는 것입니다. 생멸 없는 자리가 일원의 진리입니다. 일원처럼 생사에 해탈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 만상이 없는 자리를 알아서 경계에 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체 만상이 없는 자리가 일원의 진리입니다. 그 자리를 알아서 당하는 경계마다 원래 없는 것을 알아서 끌리지 말자. 원래 없다는 것을 알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아서 말하면, 일원의 진리를 알고 체받아서 일원상과 같이 행하자는 것이라 표현해볼 수 있겠습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1집(大山宗師法門集 第1輯) 정전대의(正典大意) 10. 사대강령(四大綱領) {교리의 네 가지 줄거리요, 교단의 네 가지 큰 목표이다.} 1. 정각정행 (바르게 알아서 바른 실행을 하자) 정각 = 견성 = 무란(無亂) . 무치(無痴) . 무비(無非)하고 원만평등한 자성을 알아야 불일(佛日)이 증휘(增輝)되고 정행 = 원만행(항마) = 무란 . 무치 . 무비의 지공무사한 행이 되며 법륜(法輪)이 상전(常轉)된다. * 바르게 깨달아야 바른 행이 나오며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인격을 이룬다. |
대산종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각은 견성이다. '무란(無亂) . 무치(無痴) . 무비(無非)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는 것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에서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가 그렇습니다. 심지 자리가 무란, 무치, 무비입니다. 그리고 원만평등한 자성, 우리의 성품을 알아야 불일(佛日)이 증휘(增輝), 부처님이 밝혀주신 법등이 더 빛이 납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이어가야 합니다. 대종사님이 밝혀주신 불일을 우리가 더 밝혀야겠습니다.
정행은 원만행, 항마입니다. 여기서도 표현을 무란, 무치, 무비의 지공무사한 행이 되며 법륜이 상전된다고 하였습니다.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는 성품자리가 발현되면 지공무사한 행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대종사님께서 다시 굴려주신 법륜을 우리가 이어서 상전, 계속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몰아서 이야기하면 바르게 깨달아야 바른 행이 나오며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인격을 이룬다고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앞의 내용과 비슷하게 표현해보면 정각은 견성이고, 처처불상이고, 혜입니다 정행은 성불이고, 사사불공이고, 복입니다. 앞의 표현에서 정각정행이 수행의 목표, 결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처처불상 사사불공과 연결이 됩니다. 이는 교리도에서 보면 신앙문에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결과로서 처처불상 사사불공, 혹은 목표로서 인식할 수 있는데 이것과 통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신앙, 수행이라는 두 문으로 나뉘어있지만 결국은 한 자리입니다. 정각을 하고 보면 처처불상이 되고, 정행을 하고보면 사사불공이 됩니다. 만약 사사불공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면 정행은 아닌 것입니다. 정각을 했다고 말해도 모두를 부처로 보지 않고, 부처로 모시지 않는다면 정각은 아닙니다.
정각 정행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
본문을 가지고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원의 진리는 불조정전의 심인이고 성품, 자성, 우리의 성품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오득, 깨달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체받아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체받는다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입니다.
[불편불의]
"불편불의하지 않고"라고 하셨습니다. 불편은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의는 어느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근동작을 바르게 하는 것, 바르게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불편불의 하지 않아야 할까요? 우리가 어디에 치우치고, 무엇에 의지하기에, 이 표현을 여기에 쓰셨을까요?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호불호, 좋고 싫음에 치우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즘에 아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아기는 호불호가 확실합니다. 좋아하면 어떻게든 하려하고, 안 좋아하는 것은 어떻게든 안 하려 합니다. 요즘에 양치를 시키고 있는데, 양치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다. 손으로 치고, 어떻게든 안 하려고 합니다. 밥 한번을 먹이려고 해도, 자리에 앉아서 먹여야 하는데, 자리에 앉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다. 돌아다니면서 먹으려고 합니다.
저도 어디에 치우치는지 봤더니,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뭘 싫어하나 봤더니, 아쉬운 소리하는 것, 부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부탁할 바에 내가 해버리고 말지'라고 생각합니다. 부탁하는 것을 안 하려고 하고,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청년회를 같이하는 데, 부탁하는 것 싫어서 나 혼자만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답없는 고민을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또는 답이 없는 고민을 하는 것을 보거나, 답이 분명한 고민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찌 보면 판단이 빠른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반대급부로 실수가 많아집니다. 깊이 생각해서 해야 하는 것도 실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에 끌리고 보면 실수가 생깁니다.
또 친불친, 친하고 친하지 않는 것에 치우칩니다. 전에 회의를 할 때 이런 실수를 많이 했는데, 친한 사람이 의견을 내면 그 의견은 왠지 좋게 들리고, 제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의견은 안 좋게 들립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아닌 것 같아도 친불친에 내가 끌리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행동으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안에서 친불친이 나타나고 거기에 치우치고 있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에 치우치게 되면 원만행이 나올 수 없습니다.
또 고락에 치우치게 됩니다. 고는 싫고 낙만 찾아가는 것입니다. 괴로운 것도 때로 수용해야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관절이 안 좋습니다. 평소에 좋다가도, 또 어느 날 갑자기 안 좋습니다. 오늘 아침도 안 좋더라고요. 몸이 아프면 뭔가 하기 싫지만 이것도 수용해야 합니다. 치우치고 보면 고가 싫어서 '하필 이 때 나왔냐.'고 원망을 하게 되어버립니다. 내가 자초한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오늘의 이 더위도 수용해야하는 고입니다. 분명히 덥고 괴롭지만 거기에 치우치게 되면 안 하게 되고, 놓아버리게 되고, 실수를 하고,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고 고락을 초월해야 합니다.
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에만 집착하고 사를 멀리하거나, 죽음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자력, 타력 한쪽에만 치우칩니다. 자력으로만 살려고 하거나 타력에 의지해서 살려고 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고 보면 원만행을 할 수 없습니다. 편안한 것만 좇고, 편안하지 않은 것은 놓으려 합니다. 거기에 치우치면 원만행이 안됩니다. 내가 어디에 치우치는지 살펴서 떼는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에 의지하는가. 의지한다는 것은 어디에 기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판단할 때에 어디에 내가 아는 것에 기댑니다. 경험이나, 거기에서 바탕한 선입견에 기대어서 의지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 모르는 것에 의지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것이 아니고, 내가 아는 것이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닐 수 있고, 선입견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 집착하고 보면 원만행이 나올 수 없습니다. 불편불의,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과불급]
다음으로는 과불급이 없어야합니다. 과하거나 미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예를 보면 자타력이 중도에 맞지 않음입니다. 불편불의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있어서 자력과 타력이 함께 가야 합니다. 내 자력에 맞게, 상황에 맞게, 어떤 일에 맞게, 자력과 타력이 적절하게 중도에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력이 부족한데 자력으로만 하려고 하고, 타력이 없는데 타력만 이용하려고 하고 보면 과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래서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실수하게 되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칭찬, 꾸중입니다. 보상과 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이 중도에 맞지 않을 때에도 과불급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이 더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꾸중이 더 필요합니다. 보상이 더 필요한 사람이 있고, 벌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정한 규칙이 있다고 해서 그것에 모든 것을 맞추어버리면 어떤 사람에게는 과하게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모자라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찬과 꾸중이 적절해야 합니다. 과하거나 모자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메이고 보면 스스로 일을 못하게 되거나, 실수하게 되거나, 결국 원만행을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각정행을 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입니다. 치우침, 의지함, 넘침, 모자람이 없는 그러한 행을 하자는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실천하자는 것이 원만행입니다. 그 구체적 내용이 앞서 이야기한 불편불의와 과불급이 없는 것입니다. 정각정행은 일원상의 진리, 다시 이야기하면, 불조정전의 마음도장, 우리의 본래의 성품자리를 깨닫자는 것입니다. 깨달아서 그대로 행하자는 것입니다. 불편불의하고 과불급 없다는 것에 대조해보고, 그래서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 정각정행입니다. 그러면 이 정각정행을 내가 잘하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물론 경계에 따라서 불편불의가 없는지 과불급이 없는지 반조해볼 수 있겠지요.
[대조]
총체적으로 볼 때에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지 두 가지를 적어봤습니다. 첫째는 일원상 법어에 대조하는 것입니다.
정전(正典) 제2 교의편(敎義編) 제1장 일원상(一圓相) 제5절 일원상 법어(一圓相法語) | ||
이 원상(圓相)의 진리를 각(覺)하면 시방 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또는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 또는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인과 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또는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인 줄을 알리로다. | ||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
이 원상은 귀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
이 원상은 코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
이 원상은 입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
이 원상은 몸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
이 원상은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일원상 법어는 우리가 각, 행의 표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깨달음과, 행하는 것의 표준입니다. 일원상 진리를 깨달아 알았는지 대조해볼 수 있고, 육근을 각각 일원상을 대조하면서 표준삼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거기에 대조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원상법어의 그 각각에 대해서 걸림이 없는지 대조를 해보면 내가 과연 정각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정행은 육근을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쓰고 있는지 대조해보면 정행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정각은 곧 지은, 은혜를 아는 것 그리고 처처불상, 모두가 부처임을 아는 것, 그 것이 정각입니다. 대산종사님이 표현하신 것처럼 신앙과 바로 연결이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은을 하면 보은이 되고 처처불상을 알면 사사불공을 하게 됩니다. 내가 보은을 하지 않고 사사불공을 하지 않는다면 정행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대조해볼 수 있습니다. 정각과 정행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각을 하고 보면, 정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은하고, 불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무리]
우리가 늘 닦고 있는 삼학 수행은 정각 정행의 내용처럼 바르게 깨달아서 바르게 행하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여기서 깨닫는다고 했지만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갖추어진 원만구족한 성품을 확인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 성자들의 마음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고 또 지금 이 시간에도 작용하는 일원상의 진리를 보고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각정행입니다. 정각정행의 모습은 결국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내 육근 동작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눈, 귀, 코, 입, 몸, 마음을 잘 쓰는 것입니다. 원만하게. 그리고 그 것은 보은이 되어야하고, 불공이 되어야합니다.
저는 이 정각정행이 원불교인의 수행의 표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표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이는 나는 바르게 알고 행동하고 있다고 자신만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일원상의 진리를 모르고, 자신의 성품을 모르고 과연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 자만, 착각에 빨리 사람이 큰 죄를 짓고, 세상에 큰 아픔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진리를 알아야겠고, 우리의 본래 마음, 성품을 알아야겠습니다. 바르게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정행, 바른 행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바르게 살고 있다, 잘 살고 있다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이들이 이 정각 정행을 살피고 대종사님께서 내주신 이 말씀대로 표준을 잡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도 평소에 삼학 수행을 끊임없이 닦고 해오고 있습니다. 저도 해오고 있습니다. 이것의 최종 목표는 구호처럼 해도 좋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정각정행이라는 목표를 앞에 세우고 정진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사대강령에 정각정행을 내주시지 않으셨나 생각해봅니다. 정각정행을 살펴보았고요. 다음 시간에는 지은보은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오늘 수행의 표준, 결과로서 정각정행을 말씀드렸습니다. 정각정행을 실천하고 이루어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기원을 드려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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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현승 교우님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