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제2장 : 기억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여름방학이 다 끝 나가는 대학 캠퍼스에서 였다.
검은 장막의 먹구름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긴장감을 팽팽한 국수다발 같은 빗줄기로 풀어내기 시작하는 학생회관 입구의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토하는 듯한 빗줄기를 피해서 나는 학생회관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잠깐사이에 머리와 어깨에 파고든 빗방울들을 떨어내고, 이제는 나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맹렬한 기세로 내리는 빗줄기가 어느새 조금 가늘어 지는가 싶더니 다시 그 기세를 되찾기를 반복한다. 야릇한 흙 냄새와 풋풋한 풀 냄새가 비소리에 섞여서 내가 서있는 공기 속으로 번져온다.
그때에 그녀가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두 세 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내가 서있는 계단 건너편 식당테라스의 기둥에 기대어 서서 빗줄기를 바라보고있었다.
그녀는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짤랑 거릴 듯한 단발머리로, 몸에 적당히 달라붙은 청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넣어 입고, 무엇에 붙들린 듯이 조금한 움직임도 없이 끝없이 내리는 장대비를 바라보고있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이 그녀의 검은 머리칼과 깊은 대조를 이루었고, 빗줄기에도 상처를 입을 것 같은 가녀린 몸매가 나의 눈길을 붙들어 맸다.
한참동안을 서있던 그녀는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억수로 쏟아지는 그 빗속으로 물 안개처럼 사라져갔다. 그녀를 처음 본 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에 대한 알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 때마다 신비로운 흙 냄새와 풋풋한 풀 냄새가 빗소리와 함께 의식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되살아 났고, 그녀에게서 어떤 운명의 계시를 느꼈다.
그로부터 내가 두 번째 그녀를 본 것은 바람이 몹시 불던 늦가을의 학생회관 바로 그 식당테라스에서 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내년 학기 복학을 하기위해 대학본부를 2년 반 만에 찾아온 그날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청바지 대신 검정치마에 재킷을 받쳐입었고, 금방이라도 찰랑거릴듯한 단발머리가 배추 단을 뒤집어 세운 듯한 부드럽게 웨이브진 파마 머리로 바뀌긴 했지만 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둘러 떨어진 낙엽들이 차가운 기운을 품고 무섭게 불어대는 바람에 어지럽게 굴러다니며 날아올랐다. 식당테라스에 서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달리며 그녀의 얼굴을 마구 할퀸다.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머리카락의 방종을 길들인다.
그녀는 범선의 돛처럼 부풀어올라 펄럭이는 재킷 속의 흰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로 조그만 체구를 공중으로 부양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모으고 있었다.
나는 세이렌 의 노랫소리에 미혹된 수부처럼 그녀에게로 이끌려간다.
내가 그녀의 바로 곁으로 다가가도, 그녀의 눈은 바람 속에서 숨겨진 비밀한 의미들을 찾기라도 하듯이 투명한 소요 속을 헤집고 다닌다.
< 히스크리프의 마음 같은 바람이네요.>
어색함을 먼저 이해하고 긴장한 입술 때문에 히스크리프라는 발음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어 소란한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네?, 뭐라고 하셨죠?> 그녀가 약간 놀란 듯 몸을 돌리며, 바람소리 때문에 정확히 듣지 못한 듯 다시 물었다. 그녀의 눈을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깊고 그윽한 슬픔이 깊은 바다처럼 내려앉아있는 그녀의 맑은 눈을 보는 순간,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 바라본 사람처럼 나는 일순간 호흡이 멎고, 온몸이 돌처럼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이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진 여인을 위해서 라면 바람 속에서 먼지가 되어 날려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폭풍의 언덕을 캠퍼스 옮겨온 듯한 날씨에요.>나는 긴장감을 통제하면서 말을 건넸다.
<아!..예, 히스크리프의 마음 같다는 말이었군요> 그녀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대치어를 통해서 긴장이 발음을 왜곡시켜 바람 속으로 흩어버렸던 단어들을 미친 듯이 날뛰는 공기의 파동 속에서 어렵지않게 되찾아왔다.
그녀의 입가에서 잠깐동안 미묘한 웃음기가 번지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졌고, 그윽한 눈을 몇 번 끔벅여 무언가 말을 할 듯이 머뭇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그녀는 혼란스럽지만 투명한 공기의 빛깔을 닮은 얼굴색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살며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총총한 걸음거리로 이내 대강당을 돌아 후문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진 후문으로 통하는 대강당 너머로 난 작은 길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시간이 정지하고, 미친 듯 날뛰는 바람소리도 내 귀에는 들리지않았다.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이 흐릿했다. 중요한 무언가를 손에서 놓치고, 무엇을 놓쳤는지 알지 못하는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나는 그 순간 그곳에서 현실감각을 상실한 채로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 있은 후 나는 얼마동안 몽롱한 상태로 지냈다.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절망과 파멸을 잉태할 태몽을 발견하였고, 그 강렬한 느낌을 모른 채 묻어두려는 나의 노력도 허사가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있었다.
나의 자의식이 그녀와의 짧은 만남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내 무의식에 명령하고, 그녀에게서 받은 강렬한 느낌을 범상한 것으로 치부하도록 내면에 강력한 암시라는 보호장치를 작동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신비로운 흙 냄새와 풋풋한 풀 냄새가 커다란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그 바다보다도 더 깊은 슬픔을 간직한 눈빛을 실어와 내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밤낮으로 작동되고있는 자아보호장치를 무력화 시켰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도 나이도 그리고 무엇을 전공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를 찾으려 했다면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찾지않았고, 그녀가 문학을 전공하고, 나이가 나와 같거나 한 살 정도 아래일 것이고 내년 봄에 졸업하는 4학년 졸업반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왜 그녀에게서 그토록 강렬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그것이 궁금했고, 그 느낌이 사랑의 감정으로 전환될만한 자극이었는지를 의심하고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인상적인 그녀를 왜 찾아 나서지 않았는지 분명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나는 신입생이 된 기분으로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3년이라는 잔여학기를 마치도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녀를 낯선 도시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그녀에 대한 기억도 대학과정처럼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