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명일(三明日, 글피)이 처서(處暑)인데, 가을 장마가 다가왔다. 창문을 열면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옛날에는 8월 15일 광복절이 지나면 물이 차다며 해수욕장들이 일제히 문을 닫았으나, 지금 그것은 꼰대들 시절의 한때 추억 애기로 돌아갔다.
하여간 그로부터 일주일 후쯤의 이야기, '처서(處暑)가 지나면 모기 입이 돌아간다'라는 애기가 나온다. 그러나 요즘의 모기는 턱밑에다 철심을 박고, 임플란트를 하였는지 입이 돌아가기는 커녕 사철을 두고 보란듯이 인간을 괴롭힌다.
온라인 블러그에서 처서(處暑)의 올바른 뜻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처서는 24절기 중 14번째 것으로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들며, 음력 7월, 양력 8월 23일경이 된다............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서 풀이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이나 산소의 풀을 깎아 벌초를 한다.'
산소의 풀을 깍아 벌초를 한다!!! 나는 해마다 이 대목에서 용기를 잃는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낫을 들고 조상님계신 뒷산 산소를 향했고, 어느 날엔 낫에다 짚을 감아들고 먼길 떠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다 보았다.
그러한 벌초는, 운이 나쁠때면 벌집을 건드려 이마에 혹이 생겨나고, 재수 좋을때면 보리밥 빠른 소화에 허기진 배를 산길에서 일찍 익은 알밤으로 채울 수 있었다.
내가 용기를 잃은 것은 객지생활을 하는 동안 숫돌에 날을 세워쓰던 그 낫의 효용가치는 적어지고, 벌초의 주도구가 예초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후 벌초때마다 예초기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갈구리를 들고 뻘줌하게 서있는 나 자신이 싫었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계를 사서 배울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1년에 하루 쓰자고 보관할 곳도 없는 도시생활에선 그게 좀 그랬다. 그러다 이젠 돌이킬 수 없이 나이를 먹고, 시력도 예전과 같지 않으니 남은 여생과 함께 여전히 우두커니를 지켜가게 생겼다.
벌초(伐草)는 글자 그대로 표현하면, '풀을 정복한다'라고 직역되는데, 우리가 바라는 '무덤의 풀을 깎아 깨끗이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여러 의미들을 줏어 모우면, 흔히 말하는 '벌초'는 추석 전에 무덤의 풀을 깎는 것으로, 한식 때 하는 벌초인 '금초'와는 달리 표현된다. 금초는 '금화벌초(禁火伐草)'의 준 말이다. 즉 묘지에 불을 조심하고 때맞춰 풀을 베어 무덤을 잘 보살핀다는 뜻이다.
또 다른 벌초인 '사초(莎草)'는 흔히 잔디를 뜻하기도 하지만, 무덤(봉분)에 흙을 올리고 잔디를 입혀 잘 다듬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 그냥 벌초는 잡초를 제거 하는 일, 금초는 아예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행위, 사초는 무덤을 보수 손질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원래 벌초는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하였다. 봄에는 한식(寒食)에 하고, 가을에는 추석(秋夕) 이전에 해 왔다.
벌초에 관한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시대 유교가 전파되면서 부터일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한식· 단오· 칠석· 백중 등의 명절이 시대 변화에 따라 거의 쇠퇴하였으나, 한식과 추석 모두 전통적으로 성묘(省墓)를 하는 명절이었다.
봄에 벌초할 때는 한식에 성묘와 함께 진행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을에는 추석 전 미리 벌초를 해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벌초에도 순서가 있다는데, 벌초를 하기 전 술과 명태를 준비하고, 산소에 2번 절을 하며(우리는 벌초 후 절을 하는데, 어느 방법이든 정성이 중요할 듯), 산불땜에 향은 피우지 않고, 술은 산짐승들의 피해방지를 위해 적당히, 벌초는 봉분에서 먼곳 부터 원을 그리듯 나선형으로 진행하고 봉분에서 마무리 한단다.
이러한 우리의 민속전통인 벌초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속담들이 더러 있었다.
'8월에 벌초하는 사람은 자식으로 안친다.'
'추석 전에 소분(掃墳)을 안 하면 조상이 덤불을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
'제사 안 지낸 것은 남이 몰라도 벌초 안 한 것은 남이 안다.'
'처삼촌 묘 벌초하듯 한다.'
'8월에 벌초하는 사람은 자식으로 안친다'라는 속담은 경기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석이 음력 8월 보름이기에 음력 8월에 벌초를 하는 것은 늦게 벌초를 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벌초를 하려면 8월전, 추석 2주 전에는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추석 전에 소분을 안 하면 조상이 덤불을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라는 말은 제주도의 속담이다. 추석 전에 애둘러 벌초를 하라는 얘기인데, 2000년대 초반까지 제주도에는 벌초를 위해 학교가 하루를 쉬는 ‘벌초방학’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 '제사 안 지낸 것은 남이 몰라도 벌초 안 한 것은 남이 안다.'라는 말은 제주말로 하면, '식게 안헌 건 놈이 모르곡 소분 안헌 건 놈이 안다’로 표현되고, 제사는 밤에 지내므로 남들이 알 수 없지만, 벌초는 안하면 금방 남의 눈에 표시가 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는 한때 묘지 앞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사정이 있어 벌초를 못해 산소가 묵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손가락질이라도 할까 봐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도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면서 몇 대조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이고, 나와는 어떤 관계라는 말을 따로 하지 않아도 알게 하려면, 묘지 앞에 표지석 정도는 세워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의견도 있었다고 하였다.
'처삼촌(妻三寸) 묘 벌초하듯 한다.' 라는 말은 우리가 많이 들어왔다. 안할 수도 없고 하기 싫은 일을 건성으로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옛날에도 데릴사위 제도가 있었고, 지금은 친처가를 막론하고 손이 귀한 세상이라' 처가의 묘를 돌보는 것도 아내에게 점수를 따는 중요한 행사일 것이다.
다만 인간이란 요물의 속성상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아버지 산소처럼 할지, 아니면 말그대로 처삼촌 벌초를 하고 넘어가려는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풍습을 잘 지키면 효자 소릴 듣고, 그러하지 못하면 후레자식 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후레자식(호로자식×)은 처음엔 욕이 아니었으나,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나 예절을 잘 모른다는 뜻이라는 것과, 병자호란의 결과로 생긴 환향녀의 자식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넘의 돈이 웬수가 되어 객지에서 벌어먹고 사느라 고향의 부모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손아픈 자식이 타인으로부터 후레자식(불효) 소리를 듣듯, 그 의미가 달라진 것같다.
문득 그렇다면 세계의 묘지 형태는 어떤지가 궁금했다. 자료에 의하면, 프랑스는 평평한 대리석 위에 비석을 세우고, 독일은 반1/2평 정도의 땅에 4개의 유골을 함께 모시며, 미국은 넓은 공원의 잔디밭에 띄엄띄엄 묘비를 세우고, 일본은 평면식이거나 요즘은 잔디식으로 무덤을 만든다고 하였다. 물론 이것들은 일반적인 방식이고, 다른 방법들도 있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포르투칼에서는 붉은 흙위에다 봉분을 쓰고, 맨 상층에는 자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표적 유교국가이었던 중국에서는 공산화가 되고나서, 1956년에 모택동이 화장제를 시행하게 함으로서 납골형태를 유지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래전 여행 길에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중국에서도 시골에서 돈많은 사람들은 몰래 깊은 산골에다 묘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말레이지아 등 화교권에서는 중국 사람들의 매장문화가 남아있어 묘를 쓴 것이라고 보고 들었다.
이러한 문화는 인종이나 풍습, 종교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조상 모시기에 미천한 나로서는 이런 말할 자격도없다만, 조상과 신의 영역이 양립될 때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게 순리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태초엔 인간을 흙으로 빗었으나 이후엔 핏줄로 태어났기에 그렇다.
올해도 추석이 10월 중순이니 벌초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하여 벌초모임도 시들하고, 벌초대행에 많이 기댈 것만 같다.
부디 우리네 조상님들게선 살아서 효도 잘하고, 사후에도 산소 잘 돌보는 자손들에게 다 많은 복을 주셨으면 좋겠다.
벌초가 끝나면 추석이 다가온다. 코로나의 거리두기, 조상님과의 거리두기는 하지말아야 할텐데, 사는게 그러니 큰일이다. 아직은 심술굿은 날씨와 태풍이 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풍성한 가을이었으면 좋겠다.
* 모두가 코로나와 더위를 슬기롭게 이겨내시고, 건강한 가을을 맞이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