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요셉
마태복음 2:13~15, 19~2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탄 후 첫째 주일이다. 2019년 마지막 주일로 송년주일이다. 한해 고생 많았다. 자기 속도를 내면서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남 모를 아픔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린다.
해마다 이 맘 때면 공중파 방송국마다 연말시상식을 한다. 연예 대상이니, 연기 대상이니 방송국 잔치지만,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본다. 상 받은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이나, 또 동료 연예인들이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면 참 보기가 좋다. 특히 믿음이 좋은 유명한 연예인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할 때는 내 일처럼 흐믓하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로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끝이라고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좌절할 때마다 그만큼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한 결과에 대해 감격해 하였다.
만약 나라면 그런 자리에서 어떻게 감사인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 멋진 건배사 한 마디처럼, 멋진 감사인사 한 마디씩 골라 두길 바란다. 과연 올해 내 수상소감을 어떤 말로 정리하면 좋을까? 당장 써 봐야겠다.
해마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도 흘러간 세월은 쉽게 몸에 배지 않는다. 한해를 잘 정리하고 새해를 행복하게 맞이하자. 세상이 어떻게 변한단고 해도 가정은 행복의 시작이고, 끝이니 식구들과 함께 열심히 사랑하기 바란다.
1)
성경의 대표적인 가족은 예수님의 가족이다. ‘성 가족’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가족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세 식구 모두 밝은 후광을 두른다. 세 식구만 특별하다고 구분 짓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가족이 그런 복된 가정이 되라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은 세 식구 중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자. 예수님의 탄생에는 많은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조연은 그의 아버지 요셉이다. 사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묵묵하게 듣고, 행동하고, 목숨을 걸고 움직인다.
마태복음에도 누가복음처럼 천사의 수태고지가 있다. 천사는 마리아뿐 아니라 요셉에게도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자는 약혼자 요셉의 꿈에도 나타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미리 알려준다. 특별히 마태는 예수님의 출생 배경을 소개하면서 그 중심에 요셉의 역할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주의 사자가 모두 세 번 요셉의 꿈에만 나타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아버지 요셉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중세시대 이래 성화를 살펴보면 공통점이 요셉을 탄생의 초점에서 비껴 놓았다. 그의 역할은 외양간 구석에서 밥을 짓거나, 여러 손님들의 방문에서도 늘 문간을 지키고 있다. 어떤 경우에 성 가족 중 요셉의 머리에는 후광도 없다.
그럼에도 요즘 요셉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마치 부활절에 베드로에 가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첫 부활의 증인으로 점점 더 부각되고, 조명을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셉에 대한 가장 큰 평가는 본보기이다. 복음서에서 요셉은 한 마디 대사도 없고, 다만 신실한 그의 행동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건은 매우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서 묵묵히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성경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고통당하는 사람 모두에게 축하할 일이지만, 위협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요셉은 아기 예수의 목숨을 노리는 헤롯의 탄압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애굽에서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베들레헴에서 애굽으로 피신한 것도, 애굽에서 나사렛으로 돌아 온 것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아버지 요셉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묵묵히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산모와 아기를 데리고 그 먼 길을 다녀왔다.
렘브란트는 요셉을 잘 조명한 화가이다. 그의 에칭화를 보면 어둠 속에서 등불을 든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그 얼굴은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 깊은 어둠이 얼마다 짙은지 작은 등불에 세 식구의 실루엣만 겨우 드러난다.
요셉은 진지한 본보기였다. 인물은 인물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아기 예수는 아버지를 잘 만났다.
2)
지난해에 유화로 그린 성화 한 점을 구입하였다. 진흥카렌다 사장 박경진 장로님이 그림 구경하러 오라고 연락해서 갔다가 한 점 건졌다. 지난 30여 년 동안 진흥카렌다가 성화달력을 만들기 위해 그린 원화였다.
화가는 이요한인데 평생 성화만을 그렸다. 그는 자신이 그린 성화 250점을 자랑하면서, 앞으로 개인 성화미술관을 만들고 싶어 하였다. 나는 그 분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 분에게도 성화미술관개관 축하소감을 듣고 싶다.
내가 구입한 그림은 ‘예수 피난’을 주제로 한 것이다. 요셉은 아기 예수와 미라아를 태운 나귀를 이끌고 간다. 당연히 성경의 배경은 광야길인데, 화가 이요한은 푸른 풀밭을 배경으로 한다. 내가 이의를 제기했더니 화가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림의 한 옆에 서 있는 뜬금없는 삼나무는 성화 작가 고흐에 대한 오마쥬라고 하였다. 성화를 그린 작가의 상상력이 귀하고, 마음도 따듯하다.
마태복음의 평가에 따르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당시 약혼남인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약혼자의 권리를 주장해 율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얼마나 가혹한 짓인가? 그래서 정혼은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해 주었다. 천사가 말해주는 태중의 아기에 대한 비밀은 이렇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된 것이고, 태중의 아기는 이미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아기이며, 이 아기는 자기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라는 것이다.
천사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요셉은 주의 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가 분부한 대로 하였다. 즉시 어머니와 태중의 아기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하였다. 즉 약혼자 마리아를 데려와 아내로 삼았고, 아기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
성경은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여 이해하는 ‘사랑의 계명’으로 해석한 것을 말한다.
3)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 한다. 요셉은 요셉대로,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요셉의 선행을 통해, 마리아의 희생을 통해 이 땅에 메시야가 오셨다는 사실이다. 아기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성 가족’은 가능하였다.
로마서는 머리글에서 아기 예수로 말미암은 성탄의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하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과 요셉의 후손이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롬 1:3-4).
바울은 더 나아가 사람을 통해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구원자, 곧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해마다 우리는 우리 곁에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고 축하한다. 아기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구유에 뉘었으며, 가장 초라한 부부의 아들이 되셨으며,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피난자가 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왕좌를 버리고 세상의 변두리로, 낮은 곳으로, 그 소외와 곤궁과 비참의 자리로 자신을 이동해 온 분이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얼마나 가난하고, 비천하게, 고난을 겪으며 사셨던가? 다윗 왕가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영광이 무색하였다. 그러기에 자칫 우리는 진짜 예수님을 놓쳐 버릴 수가 있다. 그런 불신앙 때문에 내 더럽고, 냄새나며, 상처 입은, 부끄러운 발을 손수 씻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외면할 수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 사랑의 길에 참여한 장본인이다. 마리아는 복된 순명으로, 요셉은 묵묵한 진심으로. 두 분 다 목숨을 걸고 거룩한 위험에 참여하였다. 두 분 모두 희망의 역사를 감당하였다.
나는 그 메시야의 길에 어떻게 참여할까?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으로 물들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행하신 모습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신앙생활은 주님으로 물드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이름의 능력이 내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아기 예수 탄생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 예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기를 기도하라.
요셉의 충직한 역할은 아버지로서 의무감을 훨씬 뛰어 넘는다. 아기 예수는 마치 출애굽 한 히브리인처럼 이집트로 피신 갔다가, 이젠 나사렛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나사렛에서 어린 예수는 마치 하나님을 위해 예비된 사람 나지르인처럼 성장하신다.
예수님의 가족은 어땠을까? 화가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1593년~1652년)의 ‘목수 성 요셉’은 유명하다. 바로크 시대에 활동한 그는 어둠과 빛을 극명하게 대비하는 표현기법으로 그렸다. 작품 ‘목수 성 요셉’은 아버지 요셉이 들보에 구멍을 뚫고 있고, 어린 예수는 촛불을 비추며 일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다.
나중에 아버지 요셉은 모든 목수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그리고 모든 세기 모든 일하는 사람들을 돕는 아버지로 존경을 받는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 가족은 예수가 12살에 유월절 명절에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장 이후에 요셉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 예수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려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지난 성탄절 오후부터 어제까지 걷기도를 다녀왔다. 걷기도는 순례의 일종이다. 순례의 라틴어 어원 ‘페레그리니’에 따르면 ‘낯선 사람’이란 의미를 지닌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낯선 경계로 여행하며, 불편을 겪을 수 있는 위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페인 야고보의 길 산티아고 순례처럼, 성 가족이 베들레헴에서 이집트 카이로까지 피난길을 다녀온 그 길을 재현하여 평화의 순례 길로 만들면 어떨까? 요셉의 길일 것이다. 요셉의 길은 아마 중동의 평화 정착에 기여할 것이다. 평화의 임금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피난길은 모든 피난 자들과 동행하는 인류의 행복을 이끌 것이다. 안토니오 마차도는 이런 말을 하였다. “걸어감으로 길이 만들어진다.”
예수님의 피난을 기념한 예수피난교회가 이집트 카이로에 있다. 아마 곱틱교회는 이러한 현장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내가 수집한 십자가 중에서 고난을 받는 교회일수록 아름답다. 곱틱교회의 가죽매듭 십자가가 대표적이다. 모슬렘이 지배적인 그 고난의 환경 속에도 오래도록 신앙의 역사를 지켜온다.
그러니 겉만 떠들썩하고, 화려한 교회를 경계하라. 오히려 속이 깊은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새해에 거룩한 위험에 도전하라. 희망의 관점으로 미래를 창조하라. 희망의 관점, 믿음의 헌신은 우리를 묵묵하게 이끈다. 주님과 동행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언제나 동행하시고 길 위에서 늘 만나주시며 희망으로 인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