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이개
―고요를 채우는 시간
저녁이 되면 의식처럼 귀를 판다. 조심스레 귀의 안과 내벽을 자극하고 약간의 귀지를 치우는 일이다. 늦은 저녁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말이다. 세상의 별의별 일들이 현기증 나게 전개되는 화면 앞에서 무심하고 고요하게 귀를 파다 보면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저녁이 되면 귀가 가려울까? 하루 동안의 소음과 하루치의 말의 무게가 수북이 쌓여서일까? 아니면 무수한 타자들의 음성들이 남긴 상흔이 딱지 진 귀지로 들러붙어서일까? 옛 성인들은 세속의 탁한 소리를 들으면 물로 귀를 씻었다. 흐르는 물에 귀를 씻어서 마음을 정화하고자 한 것이다.
내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이 작은 귀이개는 둥근 원형에 볼록한 배를 지닌 몸체와 거의 수직으로 세워진 끝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단부의 둥근 부분은 옥으로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백동으로 마감되었다. 원형의 가운데는 감꼭지 같은 오엽伍葉의 꽃잎이 펼쳐져 있고 몸체와 붙은 부분은 박쥐가 그 원형을 밀어 올리는 형국이다. ‘배흘림기둥’ 같은 몸체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박쥐가 새겨져 있다. 정교하고 귀엽다. 알다시피 박쥐는 복을 뜻한다. 한문으로 蝙蝠(편복)이라 쓰는데 그 발음이 福(복) 자와 같아서 복을 상징한다. 옛사람들은 박쥐가 오복五福을 가져다주는 동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선조들은 일상적 삶에서 썼던 무수한 기물의 표면에는 박쥐 문양이 촘촘히 놓여 있다. 복 받겠다는 열망이자 눈물겨운 희구다.
어디서 구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왜 이리도 작은 귀이개를 주었을까? 오래된 유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통적인 귀이개의 도상에 충실하고 미감이 소박하게 흐르는 수작이다. 아마도 조선시대 귀이개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면봉이나 여타의 귀이개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난 귀이개 하나도 이 정도 감각과 품위가 있기를 바란다. 자연에서 취한 이미지들이 절묘하게 결합해 소박한 장식성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형국이야말로 우리네 전통적인 미의식이다. 그런 것들로 내 삶을 채우고 싶고, 내 삶의 공간을 장식하고 싶다. 나에게 이 귀이개를 선물한 이는 좋은 도구 하나를 준 동시에 복을 선사했고 탁월한 조형물을 기꺼이 기증했다.
다소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귀이개를 들어 조심스레 귀 안으로 밀어 넣으면 누군가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내 현재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내 의식과 마음의 한구석을 조심스레 쳐다보는 것도 같다. 하루치의 피곤과 소음과 헛된 말들의 자리를 지우고 다시 무無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의식을 오늘도 그렇게 치른다.
―박영택, 「귀이개」『수집 미학』(마음산책, 2012)
박영택(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이 쓴 사물들의 은밀한 음성을 작년 여름에 읽었다.
귀이개, 손톱깎이 세트, 찻주전자, 블루 오일, 컵받침, 노트북, 허리띠, 서류 가방, 우산, 명함 지갑, 책갈피, 립밤, 핸드크림, 배낭, 카메라, 안경, 달력, 라디오, 가위, 필통과 샤프, 빨간색 마커 펜, 모필, 돋보기, 향꽂이, 국그릇과 몽당연필, 지우개, 책상용 빗자루, 줄자, 돌멩이, 마우스패드, 꼭두, 유기 수저 세트, 등잔, 컵, 물고기 문진, 부엉이 도예, 티베트 종, 부적, 가면, 초콜릿 통, 향수, 미니 플래시, 블로터, 탁상시계, 수면 안대, 망치, 운동화, 손수건, 넥타이, 다이어리, 잉크병 등, 그와 함께 사는 사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책 첫 장에는 이렇게 적었다.
일상의 도구적 관계에 저당 잡힌
사물을 자유롭게 풀어내서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예술 행위다.
그렇게 비로소 의미 있는 사물이 다시 태어난다.
첫댓글 제가 올리는 글들, 스크랩을 금지시켜 놓았습니다. 제가 <찢어진 청바지 틈>을 낼 때도 위 책을 펴낸 '마음산책'에 연락을 취했지만, 허락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저작권에 대한 완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나 복제를 할 경우, 모든 책임을 최초로 글을 올린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스크랩이나 복사를 금지시킨 걸 혜량 바랍니다. 어떻게든소스를 가져갈 수는 있으나, 글을 올린 제 뜻을 헤아려, 여기서만 읽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귀한 나눔의 마음 감사드립니다. ^^*~
위에 소개한 책은, 사물이 발화하는 음성을 듣는 일이자, 그 생김새와 색채, 질감을 편애하는 일이다, 라고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찬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물들의 그 음성, 색채, 질감이 물컹, 만져지는 걸 느꼈습니다. 코멘트, 고맙습니다.
요즘 수필세계에 새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윤남석 작가님 덕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또한 나눔의 마음이라 모두가 여길 것입니다. ^^
그러나, 바람을 몰고 다닐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저녁에 기욤 뮈소의 <종이여자>를 읽다가 안구건조증이 있어서, 잠시 인공눈물을 넣고, 컴을 켜고 들렀습니다. 예전에 <구해줘>를 읽었었는데, 역시 기욤 뮈소의 글빨, 기발한 착상,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내 머리맡 작은 통에 있는 소지품 중 절대 치우면 안되는 것
그 자리에서 잠시 이탈을 해도 찾느라고 온 집안을 다 디집습니다.
꼭 그것이 아니라도 있는데, 어쩐지 내 손에 딱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손에, 또는 눈에, 익숙한 것, 문득 <어린 왕자>에 나오던 글귀가 생각납니다. 사랑은 익숙해지는 것이라던.
그리고 재작년쯤에 읽었던 로버트 커슨이 쓴 <기꺼이 길을 잃어라>라는 책도 떠오릅니다. 시각장애인 마이크 메이가 손에 익숙했던 기억을 차츰 지워내고, 눈 수술을 받고 눈에 익숙해져 가는 장면들, 손에 익숙했던 기억은 반드시 눈에 익숙할 수 없다는 모순적 명제.
낯섦과 익숙, 그 두 낱말이 함유한 상대적 본질을 다시금 생각케 합니다. 코멘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