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 엄세원
자주동샘을 마시다 외
지봉 이수광이 머물렀다는 비우당 옆에는
자주동샘이 있다
한때 정순왕후가 단종 폐위 때 서인으로 강등되어
빨래했던 곳이기도 하다
다가가 보니 한지 바른 초가집
사립짝문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자주동샘,
빨래를 하면 자주색이 되었다지
슬픔이란 비탄에서 쫓겨난 마음이 서럽게 폐위된 것인지
자신의 처지를 물에 빠는 일은
비참에서 억척으로 헹궈내는 것이리라
놀라운 건 자주동샘 옆에 자줏빛 제비꽃이
해마다 울다 간다는 것
꽃잎 하나 져 내리면 백 년이 물들고
꽃잎 다섯이 다 지면 조선이 애처롭다
어쩌면 오백여 년 전 샘물이 제비꽃에 깃들어
씨앗을 남기고 그 씨앗이 꽃을 틔우기를
반복했던 건 아닐까
울타리 밖 수피 벗은 배롱나무와
막 잎이 돋아난 은행나무도
자줏빛 설핏 돌아 푸르러지고 있다
나는 잠겨 있는 사립문 너머 샘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내 마시는 상상을 해본다
내 안에 퍼지는 자줏빛
온몸을 돌다 입술에 맴도는 느낌
사람의 마음은 태산보다 바다보다 짙다,
나도 모르게 발음해 본다
---------------------------
상흔이 남는다
돌은 스스로 부수며 버섯구름처럼 떠오른다
가까이보다 멀리 가로질러 떠 있다
자욱하고 붉은 것
허공을 빨아들인 듯 호기심이 자극되지만
배경은 공포의 입자일 뿐
한순간 교전이 번지고 있다
돌이라는 단어 대신
전쟁을 넣자
무고에 사로잡힌 포로들이
눈에 들어온다
흑백을 빌려 거미줄에 들었다
조준점이 흔들리면서
화면을 참혹하게 지워간다
지도자는 한쪽 귀퉁이부터
자신의 명분을 뜯어먹는다
뿌옇게 쌓여가는 본심이 새카매지도록
어떤 돌은 결정이 되고
어떤 불은 연쇄에 경계를 넘는다
슬픔은 단조롭고 재건은 돌로 응축된 빚
아직 끝나지 않은 포화가
국경 너머로 흘러간다
해협 같은 햇살이 돌에 의해 봉쇄되고 있다
징후는
어둠 속 어둠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핵에 선다
단단한 중심부에서 금이 번져 나올 때
아직 걷히지 않은 자리
그대로
-------------------
엄세원|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등단. 이충이문학상, 강원시니어문학 대상 등 수상.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 』, 『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 『붉고 윤이 나는 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