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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의 수신자인 ‘은혜’는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이들을 반영한 가상 인물입니다.
은혜야,
기말고사가 끝나고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늘렸다는 네 카톡을 받고 속이 많이 상했단다. 물론 요즘 같은 시절에 일거리가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네 말에는 공감한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너의 태도도 내가 사랑하는 부분 중 하나지. 하지만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너를 돌볼 여유도 없이 그렇게 생존을 위해 계속 몰아붙이는 너의 일상이 선생님 눈에는 안타까움을 넘어 아슬아슬하기도 하구나.
요즘 너희 또래 여자들 사이에서는 ‘K장녀’라는 말이 유행이라지. 한국 가부장 사회에서 장녀로 태어나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까치발을 들고 남다른 성취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거기다 줄줄이 아래 동생들을 보살피느라 헌신과 희생은 늘 자기 몫인 대한민국 큰딸의 인성적 특성을 말하는 것이겠지.
한 가정에서 태어난 순서가 인성이나 행동 방식에 미치는 영향은 ‘한국’만의 특성은 아니야.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도 하버드 수강생들과 함께 확인한 바 있지. “여러분 중에서 장녀이거나 장남인 사람, 손 들어 보세요.” 그 말에 수백 명의 학생 중 3분의 2 이상이 손을 들더구나. 더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그 모습을 보면서 방긋 웃던 샌델의 반응이었어. “아, 저도 장남입니다.” 첫째들의 성취도가 남다른 것은 부모의 기대를 가장 먼저, 더 오래 집중적으로 받은 까닭일 거야. “네가 잘해야 동생들도 따라 잘하지.” 이런 말은 아마 동서고금 모든 첫째가 들어본 말일 거다.
‘K장녀’라는 말이 가진 특별한 무게와 고단함
하지만 샌델의 강의실에서 증명되지 못한 부분이 ‘K장녀’라는 말에 담겨있어. 바로 그 첫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경우, 그리고 그 문화적 상황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일 경우지. 때론 동시대를 살아도 개별 가족의 문화적 정서가 다를 수 있단다. 내가 아는 은혜네 집은 아주 전형적으로 ‘20세기 근대 초반 유형’이야. ‘기독교와 생활윤리’ 시간에 이야기해 주었지? 신분제의 동력과 정서는 해체되었는데, 가부장제는 아직 작동하는 시절의 가족역학(family dynamics)!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자리가 결정되던 신분제가 사라지자,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도 자녀 교육에 열심을 내게 되었지.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 사회를 막 통과해온지라 전문가가 되는 교육이나 시험에 따른 자리 배치가 금세 대중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어.
문제는 서민 가정에서는 전문가가 되는 고등교육을 모든 자녀에게 제공 할 경제적 여건이 없었다는 거지. ‘K장녀’라는 말이 가진 특별한 무게와 고단함은 필시 이 상황에서 발생했을 거야. 나이가 제일 많으니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고, 직공이든 가사도우미든 경제적으로 부모를 도와 남동생들 대학등록금을 보조해야 했으니까. 1960-1970년대에는 그게 일종의 ‘문화적 당연’이었단다. 샌델의 강의실에서 자신감 뿜뿜,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들던 여학생들은 이런 문화를 잘 모를 거야.
자녀가 하나나 둘 정도로 줄어들고 중산층 부모가 늘어난 지금은 물론 상황이 다르지. 은혜 친구들도 대부분 ‘K장녀’라는 말을 들으면 가부장제 가족역학의 무게보다는 첫째(혹은 외동)라는 위치와 성취의 책임을 더 크게 느낄 테니까. 수업 시간에 배운 ‘후기-근대(late-modern) 유형’의 가정 말이다. 칠판에 커다랗게 그렸던 삼각형 구조, 생각나지? 전통 사회의 신분제도 삼각형이었는데, 근현대 사회도 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지. 잠시 다이아몬드형, 그러니까 중산층이 확대되는 모양으로 전개되긴 했지만, 그 구조는 곧 피라미드로 다시 바뀔 거라고 말했어. 어떤 면에서는 전통 사회의 피라미드보다 더 뾰족한, 아래층에 속한 사람들이 훨씬 많은 무시무시한 삼각형으로 변해버릴 거라고 말이다.
내 말에 눈동자가 흔들리던 너희들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능력제’(Meritocracy). 네가 처음 들어본 말이라고 했던 게 기억나는구나. 하지만 요즘엔 학교 밖에서도 종종 들리지?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근대의 기획이 그랬던 거야. 다들 ‘관료제’(Bureaucracy)의 환상에 사로잡혀서,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면 ‘한자리’(bureau)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 아주 최근까지도 그랬어. 하지만 모두가 ‘사무용 책상’(bureau는 프랑스어로 이런 뜻이란다)에 앉는 작업을 가질 수는 없어. 80-90%의 구성원들에게 ‘사무용 책상’에 적합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사회도 없고. 그런데도 모두가 ‘뷰로’(bureau)를 향해 달려갔고 그 정점을 찍은 시점이 세기말 즈음이었어. 바로 네가 태어난 그 시절 말이야. 그 시절 대다수 엄마들은 자녀 교육에 ‘올인’했지. 1997년 IMF 아래 처음 들어본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상태가 등장하자 엄마들은 경쟁적으로 달렸어. 내 아이는 정규직, 그것도 아주 안정적인 정규직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이즈음에 태어난 장녀의 부담은 장남의 부담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 샌델의 수강생들과 같은 종류의 무게, 그러니까 이 세상이 평가해주는 능력을 길러 부모의 자랑이 되는 자리에 앉아야 하는 부담감이었단다.
‘당연’을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바꾸는 객관화
하지만 은혜, 네 상황은 달랐지. 네 또래 친구들이 아빠의 재정적 지원과 엄마의 전문적 서포트(난 이런 엄마들을 ‘전문엄마’라고 부른단다)에 포진되어 압사당할 것 같다고 호소할 때, 넌 제발 그런 지원을 한번 받아보고 싶다고 울먹였어. ‘수저계급론’은 사회학자들의 개념어로 등장하지 않았지. 바로 은혜와 같은 삶을 경험하는 친구들의 입에서 나왔던 거야. 너도 그랬지? 심지어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도 손에 단어장을 들고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퉁퉁 붓는 다리도, 없는 시간도 아니었다고. 수험생용으로 특별히 만든 케이크와 빵, 초콜릿을 사가면서 기대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빠들, 엄마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제일 괴로웠다고. 그렇게 준비된 환경에서 ‘공부만’ 하면 되는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다고. 그런데도 너는 장녀라서, 싫은 내색 지친 내색 한 번 할 수 없이 늘 밝은 얼굴로 부모님을 대해야 하는 것이 너무 힘겨웠다고.
너의 그 치열했던 하루하루를 알면서도 사회학자의 냉정함으로 “너의 가정은 유형론적으로는 근대 초기 유형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너를 믿기 때문이란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을 네가 안다는 믿음, 그리고 거시적인 틀에서 자기 자리를 이성적으로 점검하고 성찰하는 것을 네가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결국엔 제도적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자기를 잘 부양해가리라는 믿음. 그래서 하는 말이란다.
언젠가 네가 물었지? 근대 초기형과 중기형은 어떻게 다르냐고.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와 신앙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남편에게 늘 순종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늘 힘들었다던 너…. 아버지는 툭하면 “여자가…”라며 권위로 누르시고 어머니는 “하나님께서는 남녀 간에 질서를 세우셨단다”라며 훈계하셨다고 했지. 그런 은혜 부모님이 ‘중기’ 유형이 아니라고 했던 이유는 아버지 어머니의 부부 역학에 있어. 전형적인 근대 중기 유형은 여전히 가부장적 가족제도이지만 그걸 ‘부드러운 가부장제’라고 불러. 여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가부장제라고 할까. 낭만적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선택했고,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해 전적 외벌이를 하는 남편과 전적 주부 역할(전업주부)을 하는 아내, 그리고 아이들로 이루어진 핵가족 구조로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보통 남편은 아내에게 군림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기’ 유형의 특성이야. 오히려 아이들 눈으로 볼 땐, 엄마가 집안 실세로 보이지. “우리 아빠는 엄마 말이라면 꼼짝 못 해요.” 하하, 아마 연애 시절부터 형성된 관계겠지?
하지만 은혜네 집은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해. 물론 확대가족 형태가 근대 초기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말은 아니야. 근본적인 특징은 여자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이야. “당신이 뭘 안다고 나서?” 은혜는, 어머니를 찍어 누르는 듯한 아버지의 이 말 한마디에 늘 조용히 뒤로 물러서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자랐다고 했어. 이건 매우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역학이야. 전혀 ‘낭만적’이지 않지. 유형론적으로 ‘중기’형 관계에서 보이는 ‘낭만적 부부’는 상호 존중과 평등을 전제한 분업이 특징이거든. 이와 비교할 때, 근대 초기 유형에서는 전통 사회의 남존여비 사고가 아직 해체되지 않고 남아있어. 그러니까 21세기를 살아도 만약 아버지가 어머니를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혹은 아예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집안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당연’으로 여긴다면 그건 유형론적으로는 ‘근대 초기’ 유형이야.
이런 딱딱한 유형론을 말하는 까닭은, 이정표로 삼기 위해서야. 내가 속한 공동체의 관계 역학이 문명사적으로 어디쯤인지를 알아야 객관화·상대화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가족관계 역학에는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지를 알아야 향후 발걸음을 결정할 테니까. 물론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최첨단 과학 시대에 “당신 가정은 근대 초기 유형에 맞는 관계 역학을 가지고 있네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누구나 기분이 나쁘겠지.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은 자기에게 익숙한 가족 역할을 ‘비판적 거리’를 두고 한번 돌아보게 되거든. 그때 진지하게 성찰적 사고를 거친 사람들은 수많은 ‘당연’(Taken-for-granted)이 비로소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바뀌는 자유로움을 맛보게 되지. “여자는 당연히 내조해야 해.” “큰딸은 당연히 살림 밑천이지.” “부모가 힘들거나 아프면 네가 부모 대신이다.” 필시 은혜, 네가 들어온 ‘K장녀’의 무게는 이런 부분이었을 거야. 그러니 가족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네 과제로 여기며 기말시험을 치르자마자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하겠다는 결정을 했겠지.
자기를 부양하는 삶
하지만 은혜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양하는 삶’이야. 내가 부양해야 하는 가장 일차적인 사람은 ‘나 자신’이란다. 부모의 시점에서 가장 먼저 만나고 오래 만나 특별한 사이가 되는 것이 장녀/장남이라면, 그래서 ‘큰아이’로서의 책임이 엄중해진다면, 하물며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 스스로 한번 물어보려무나. 너의 시점에서 가장 먼저 만나고 가장 가까이 만나고 가장 오래 만나며 가장 마지막까지 만날 사람은 누구일까? 그래, 바로 ‘나 자신’이란다. 그런 ‘자기’를 미처 돌아보지도, 돌보지도 않으며 가까운 누군가를 부양하기 위해 내달리는 삶, 중년인 나에게도 버거운 그 무게를 ‘필수과목’이요 ‘숙제’인 양 당연히 떠안고 하루씩 살아가는 동안, 계속 내면의 빛을 잃어가는 네 모습을 보며 이렇게 선생의 오지랖을 부려본다.
네 가족 상황의 절실함을 몰라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2008년 경제위기 상황에서 아버지의 작은 가게가 문을 닫은 이래로 아버지가 경제활동을 안 하고 계신다는 것, 급한 대로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용직 일을 하시던 어머니께서 병으로 누우신 것, 아래로 고등학생 동생 둘이 있다는 사실도 네가 들려주어서 내 가슴에 아프게 새겨져 있단다. “그래도 아버지가 네 말은 좀 들으시잖니.” “언니, 빨리 오면 안 돼? 아빠가 또 이상해.” 가부장의 권위와 가정폭력을 혼동하신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한 방패막이가 되고 감정받이가 되어버린 너의 정서적 고단함도 비수처럼 꽂혀있단다. 그런 이야기들을 할 때마다 너의 맺음말은 늘 그랬어. “하지만 제가 장녀잖아요. 제 몫이죠.”
그런데 은혜야. “제가 장녀잖아요”라는 말보다 먼저 너 자신에게 해주어야 하는 말이 있단다.
“나는 스무 살이잖아.”
“나는 부모가 아니라 딸이잖아.”
“나와 동생들은 겨우 두 살 터울이 날 뿐이잖아.”
물론 가족은 ‘공동체’이지. 서로 함께 생존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원과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는 공동체. 법으로 규제하지 않아도 힘으로 위협하지 않아도 사랑의 이름으로 더 강한 자가, 더 배운 자가, 더 건강한 자가 짐을 더 지는 공동체가 가족의 이름이기는 해. 하지만 나를 내어주는 기꺼움은 자기를 잘 돌본 사람이 감당할 때 서로에게 건설적이란다. 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내어주심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로, 무조건적 자기희생을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덕목이라고 강조하지만, 그건 하나만 본 거야. 예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부양한 분이셨어.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일을 해야 가장 나다운지, 무엇보다 누구와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비로소 나다울 수 있는지. 그 우선성과 중요성을 아셨기에 예수께서는 늘 새벽 미명에 홀로 기도할 곳을 자주 찾으셨던 게 아닐까?
일상 속에 ‘숨표’를 만들어보렴
사랑하는 은혜야, 내 제자가 계속 외부의 힘에 떠밀려 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너에게 쉼을 허락했으면 좋겠구나. 숨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생계 걱정 없이 팔자 좋은 교수의 낭만적인 조언은 아니야. 이건 성서의 조언이기도 하지. 안식일의 정신은 그것이 핵심이거든.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생명이 된 우리가 계속 생기발랄하기 위해서는 태초의 숨,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 내 존재 안에서 이를 잘 가꾸어나가야 한다는 것, 그걸 위해 우리는 제도가 부여한 ‘당연’들에 잠시 괄호를 치고 쉬어야 한다는 것. 굳이 멀리 떠날 필요도 없고, 화려하고 멋진 휴양지가 아니어도 된단다. 그저 쫓기듯 밀려가는 너의 일상 속에 가능한 ‘숨표’를 만들어보렴. 얼마만큼이냐고? 거기에도 네 상황이 있겠지. 하지만 분명한 점은, 외부에서 계속 몰아치는 숙제들에 눌려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에게 너무 아픈 일이라는 사실이야. 엄마가 되고 선생이 되면서 그 마음과 시선을 조금은 배운 듯해. 그래서 부탁한다, 은혜야. 하늘을 보든, 나뭇잎을 만지든, 아니면 크고 긴 숨을 쉬어보든, 네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오롯이 너만의 시간, 너만의 수행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자기를 부양하는 삶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