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대표 세 사람의 말로
회담 대표로 나섰던 남일은 1970년대에 비명(非命)으로 세상을 떴다. 교통사고였다. 겉으로는 그렇다. 북한에선 요인(要人)들이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발표가 많다. 그러나 자동차가 별로 없는 북한에서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가 김일성으로부터 정치적 견제를 받아 사망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부산 동래 출신으로 회담 현장에서 늘 험상궂은 얼굴로 도발을 일삼던 이상조의 말로도 그리 편치 않았다. 그는 소련주재 대사를 맡다가 망명했다. 그는 말년에 벨라루스 민스크의 한 연구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보냈다.
또 한명의 북한군 대표 장평산은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그는 중국 팔로군(八路軍)에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공산주의 및 항일 투쟁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연안파(延安派)’로 통했다. 1950년대 말에 김일성이 주도한 연안파 숙청 과정에서 장평산도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 김일성(왼쪽)과 남일
미군 대표의 “니하오(你好)”라는 인사말에 밝게 웃었던 중공군 대표 셰팡(解方)도 마찬가지다. 그는 동북지역의 군벌 군대에서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지만 결국 항일전쟁과 국민당 군대와의 싸움, 나아가 한반도 참전 등의 경력을 쌓으면서 명예롭게 은퇴한 뒤 평안한 삶을 살았다. 그는 참전을 지휘한 펑더화이로부터 “비상한 판단력과 뛰어난 사고력을 갖춘 훌륭한 장수감”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첫 휴전회담에서 만난 공산군 측의 대표들이 나중에 어떤 인생의 길을 걸었느냐는 내 관심거리였다. 북한과 중국은 정전 뒤에 비슷한 길을 간다. 북한은 김일성이 연안파 등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면서 본격적인 개인숭배의 길로 치달았다. 중국 또한 비슷했다. 마오쩌둥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져 그와 유사한 형태의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 장평산(왼쪽)과 정율성. 정율성은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조선족 음악가였다.
김일성을 따라 남침을 벌인 군대의 선봉은 마오쩌둥이 6.25전쟁 전에 김일성에게 보내준 중국 홍군(紅軍) 소속 한인(韓人) 병력의 부대였다. 숫자는 어림잡아 5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김일성의 의도에 따라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들어온 북한군의 주력이었다. 그럼에도 그 병력을 이끈 지휘관들은 김일성이 벌인 연안파 숙청과정에서 대부분 비명으로 생을 마감했다.
중국은 마오쩌둥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뒤 홍군에서 활약했던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인물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 뒤의 결과는 오늘 우리가 지켜보는 그대로다. 불과 30여 년의 개혁과 개방을 통해 이른바 ‘G2’라고 이야기하는 세계 2강의 위치에 올랐다. 특히 그들은 경제발전과 함께 우선 국방력의 신속한 확장에 성공했다. 전쟁을 늘 회고하는 내 시선으로 볼 때 그들은 ‘싸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북한의 공산주의와 중국의 공산주의를 비교하는 일은 거창한 주제다. 여기서 내가 자세히 다룰 항목은 아니다. 그럼에도 전쟁을 겪은 내 입장에서는 둘이 겉은 비슷해 보여도 어딘가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남일과 이상조, 장평산이 풍기는 분위기와 노련한 전략전술가였던 덩화와 셰팡이 주는 느낌이 달랐듯이 말이다.
- 남일(오른쪽)과 덩화
언론사가 자리를 마련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분명하진 않다. 서울 시내 모 호텔에서 나는 그와 두 차례 정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꽤 늙어 보였다.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당시 한국 언론을 접촉하면서 김일성을 아주 날카롭게 비판했다.
서울에서 처음 나와 마주쳤을 이상조는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신의 신분이 어색했을 것이다. 북한군을 대표해 휴전회담에 나왔던 사람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자신이 옹호했던 북한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수도를 방문했으니 그랬을 법하다. 게다가 그는 한 때 자신이 따랐던 김일성을 비난하는 입장이었다. 쑥스럽고 민망한 심정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서울서 다시 만난 이상조
우리는 거의 38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이었다. 전선에서 지휘관을 지냈던 군인들은 서로 만났을 때 제가 치렀던 전쟁 이야기를 먼저 입에 올리기를 꺼려한다. 특히 전선의 양쪽에서 서로 적대(敵對)하며 죽느냐 사느냐를 다퉜던 사이의 군인들은 그 전쟁 이야기를 꺼내기가 아주 어렵다.
- 1953년 4월 21일 문산 휴전 천막에서 유엔군 측 회담 대표인 백선엽 육군소장이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가 고 임인식씨가 촬영한 작품./경기문화재단 제공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서로 뻔히 아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슴에 지니고 있는 상처도 깊은 법이다. 그래서 섣불리 전쟁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1980년대 말 서울에서 이상조가 그랬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극력 피했다. 그는 전쟁 이야기를 피하는 대신에 김일성을 언급했다.
“김일성이가 개인숭배 벌이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와 의견이 갈렸어요. 주체사상이고 뭐고 하는데, 다 같은 짓입니다. 김일성에게 개인숭배는 해선 안 된다고 여러 번 말을 했는데, 결국 먹히지 않았어요….”
그는 북한군 부참모장을 지냈고, 전쟁 뒤 고위직을 거쳤던 사람이다. 김일성을 수시로 접촉하는 위치에 있었을 테니 그의 말이 거짓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러면서 김일성에 대해 가시 돋친 비판을 털어 놓았다.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노년에 들어서는 인상이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주름이 늘었고, 머리에는 어느덧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으니 그랬다. 그는 1915년 출생했으니, 나보다는 5년이 연상이다. 당시 70대 중반에 접어들었던 그의 표정은 1951년 휴전회담장에서 마주 앉았을 때보다는 풀이 꽤 꺾여 있었다. 험상궂기만 했던 인상이 그래서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나는 어느덧 그의 얼굴을 기어다녔던 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파리에 관한 일화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고 했던 대목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내 장난기가 슬쩍 동했던 모양이다. 왜 그가 그랬는지를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시 망명객으로 서울을 방문한 이상조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첫 휴전회담 때 당신이 나더러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써서 내게 보여준 일 기억하느냐?”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이상조가 자세를 고쳐 앉는 듯했다. 조금 어색했던 모양이다. 이어 그는 마른기침을 한 두 번인가 하더니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말했다.
그는 1996년에 타계했다. 그에 앞서 남일과 장평산 모두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와 정치적 숙청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말년도 좋지 않았지만, 1951년 휴전회담장에서 마주했던 그들 셋의 자세는 한결같이 딱딱하고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에 비해 중공군 대표 덩화와 셰팡은 그들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느긋했고, 여유가 있었으며, 아울러 매우 냉정했다. 회담을 이리저리 저울질하는 분위기도 역력했다. 기싸움과 말싸움은 남일에게 맡겨 놓고서 냉정하게 판을 들여다보려는 자세를 취했다.
실제 휴전회담의 막후에서는 중국의 입김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나는 기싸움을 시도하는 이상조나 남일, 장평산보다는 왠지 모르게 덩화의 냉정함, 셰팡의 여유로움에 더 눈길이 미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