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출퇴근, MT 짐 싸기까지…
지난 5월 미국의 유명한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는 자녀를 독립적으로 키우는 방법에 관한 칼럼이 실렸다. 자녀의 공부나 교우관계 등을 일일이 체크하며 따라다니는 한국의 극성스런 자녀 사랑이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닌가 보다.
일반적으로 자녀를 독립적으로 키우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이지만, 최근의 세태는 예전과는 달라진 부모들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국 부모들의 변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 바로 ‘헬리콥터 부모(helicopter parents)’다. 다 자란 자녀들의 주위를 헬리콥터처럼 끊임없이 맴돌며 모든 것을 점검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인생 ‘코치’나 다름없다. 몇몇 극성스런 부모들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헬리콥터 키즈’ 또한 부모의 컨트롤을 부담스러워하거나 거부하기는커녕 이를 당연히 여기고 심지어는 의존한다는 것이다. 세계 제일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간섭 당연시하는 부모와 응석받이 자녀
올해 서른한 살이며 미혼인 김모(여) 씨. 서울 양재동에 있는 국책연구원에 다니는 김씨는 매일 아침 집이 있는 개포동에서 직장까지 통근버스가 아닌 어머니의 차를 타고 출근한다. 불과 10분여의 거리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한번도 딸의 출근길을 혼자 보낸 적이 없다. 김씨 모녀의 유별난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씨의 ‘엄마 사랑’도 만만치 않다. 남자친구와의 사소한 문제도 모두 어머니와 상의하고 데이트 코스까지 코치받는다. 그녀를 오랫동안 봐온 친구들은 중고등학교 소풍이나 사생대회 때도 항상 어머니의 차를 타고 오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김씨의 어머니는 요즘도 무남독녀 외딸이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 잠을 청하지 않는다.
ㄱ대학 국어국문과에서 조교를 맡고 있는 김주영 씨는 자신이 학교에 다닐 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환경에 한 학기 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고 말한다.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씨. 1990년대 초 학번인 그와 요즘 나이 어린 후배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녀가 몸이 아프다며 리포트를 대신 들고 오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시험 결과가 성에 차지 않는다거나 이해가 안 된다며 담당교수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를 심심찮게 받는다. 심지어는 수강할 과목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 휴대폰을 들고 부모와 상의하는 모습을 본 김씨는 “그런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올해 서른두 살인 박모(여) 씨. 딸 둘인 집안의 장녀이지만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는 유독 그녀를 챙겼다. 학창시절에는 과 선택과 학업을 모두 어머니의 뜻에 따랐고, 장성해 직장에 다니는 요즘도 남자친구 문제를 어머니와 상의하곤 한다. 직장에서 엠티를 떠나거나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어머니께 말을 하고, 1박2일이냐 2박3일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장보기와 짐꾸러미 싸기는 역시 어머니의 몫이다. 박씨는 이제까지 자신의 속옷을 한번도 빨아본 적이 없을뿐더러 청소를 해본 기억도 없다고 한다.
골치 아픈 직장생활 대신 ‘M&F 펀드족’도 늘어나
보통 자녀의 대학 입학과 동시에 막을 내린다고 생각됐던 부모들의 자식 챙기기가 최근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학과 선택과 이어지는 공부를 일일이 코치하고, 졸업 후에는 직장 선택과 배우자 선택, 이후의 삶까지 부모들이 책임지고 있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헬리콥터 부모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서구에서는 이런 부모 밑에서 큰 ‘마마보이’와 ‘파파걸’들로 인한 폐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은 20~24세까지의 남성 가운데 절반 이상, 여성의 3분의 1 이상이 정규교육을 마치고도 여전히 부모와 동거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이탈리아에서는 30~34세의 젊은이 3명 중 1명이 아직도 부모에 얹혀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도 ‘헬리콥터 부모가 자녀의 직장까지 찾아간다’는 기사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말했다. 기사는 미국의 대기업인 GE와 보잉(Boing)사 인사 담당자의 말을 빌려, 구직 중인 자녀를 뽑아달라고 회사에 직접 부탁하는 부모가 상당한 수에 이르며, 입사 여부를 부모와 상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루는 젊은이도 많다고 보도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엄마와 아들이 꼭 붙어다니는 것을 뜻하는 ‘캡슐모자(母子)’가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정은 이미 국내도 마찬가지다. 한 어학연수 기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어학연수 비용을 본인이 마련하겠다’고 응답한 경우가 전체의 16%에 불과했다고 한다. ‘워킹 홀리데이’ 같은 경우처럼 자신의 힘으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평균 1,000만원이 넘는 연수비용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하는 학생들이 훨씬 많은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2004년 보고서에 따르면, 가정을 꾸리고 부모와 떨어져 사는 독립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경제력을 의지하며 사는 가구가 10%를 차지했다. LG경제연구원도 부모와 동거하는 20~34세 독신자 수를 2000년 말 기준으로 467만 명으로 추산했다. 부모에게 얹혀산다는 의미로 ‘기생독신자’로 불리는 이들은 의식주를 비롯해 가전제품, 자동차 등 거의 모든 것을 공짜나 다름없이 누리며 살고 있다. 최근 강남에서는 골치 아픈 직장생활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금력이 넉넉한 부모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M&F(Mother & Farther) 펀드족’이 늘고 있다고 한다.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이 기생생활에 대해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이들의 안이한 태도가 더 큰 문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헬리콥터 부모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해진 경제력, 줄어든 자녀의 수, 고학력 부모 등이 원인이라 분석한다. 풍족해진 시간과 돈을 한두 명의 자녀에게 집중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라는 뜻. 초등학교에선 교실 청소를 직접 학생들이 하는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순번을 정해 학교를 찾는 엄마들이다. 아이들의 숙제나 준비물, 책가방 챙기기도 역시 부모들의 몫.
서울대 아동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과거에 비해 경제력이 신장되고 양육해야 하는 자녀수가 감소함에 따라 부모들의 과보호 현상이 심각해졌다”고 진단하며 “특히 사회에 진출하지 못한 고학력 출신의 어머니들이 자아실현을 위해 자녀에게 집착하는 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태어나서 부모에 의해 양육돼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하지만 다 자라 충분히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가야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행복할까? 전문가들은 대학 입학시까지는 어떨지 몰라도 결국에는 부모의 과도한 관심이 자녀의 삶을 망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것에 익숙한 아이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에 인색해질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부모의 경우, 헬리콥터 키즈들은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고 결국엔 부모와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자녀를 싸고도는 부모도 문제지만, 별다른 거부감이나 수치심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자녀들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본질적으로는 위험과 책임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편한 세태만을 좇는 젊은이들의 안이한 태도가 헬리콥터 부모를 양산하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세계적인 ‘부모-자녀 관계’ 전문가인 펜실베이니아대 미사 머리 이튼 교수가 한 말에 정답이 숨어 있을 듯하다.“아이들은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키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대학입시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들. 학생들이 앉아야 할 자리를 엄마들이 차지한 지 이미 오래다.
첫댓글 회장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