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낙심과 분개 속에서 희망을 보아야 하는데 어쩐지 우울합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일단 선택을 해야지요. 누구 말대로 안 되면 국민이 만들어서라도 써야지요. 달리 갈 곳도 없고 넘어야 할 시간도 안 되고 그냥 여기서 해야 하니 도리가 없습니다. 이왕 할 거면 빨리 하자는 마음들인 모양입니다. 사전 투표율이 꽤 높게 나오는듯하니 말입니다. 아무튼 앞으로 또 5년을 이끌고 갈 나라의 지도자가 새롭게 탄생할 것입니다. 이런저런 허물도 많지만 우리가 만들자 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그런 허물이 많기에 좀 더 겸손히 국민을 섬기며 나아갈 수도 있겠지요.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조그만 땅덩이가 이렇게 편할 날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는가 봅니다. 한 백년 살기가 이다지도 쉽지 않습니다. 지구를 떠나든지 해야지 원!! 그럼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여기가 좋다고 더 있기를 원하고 바라고 연구하고 개발하고 만들어 냅니다. 거참! 하기야 여기가 나쁜 게 아니라 여기에 빌붙어 사는 인간들이 문제지요. 한 세기 세들어 살다가 떠나는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는지 모르겠습니다. 연기 좀 그만 피우고 조용히 살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살아있으니 건강해야지요.
3월입니다. 하루라도 건강하게 행복하게 만들며 살아갑시다. ^&^
2022년 3월 5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잠언 5 : 18 - 19)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옛사람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주의(경고)를 왜 만들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살다보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좀 과장되었다 싶은 생각은 듭니다. 그만큼 강력하게 뜻을 나타내고 싶었을 것이라 이해합니다. 하기야 요즘은 성장이 하도 빨라서 그에는 못 미치더라도 십대 초반만 되어도 아마 가능한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싶습니다. 그러나 남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육체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야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야 도덕과 윤리, 사회질서가 제대로 서겠습니까? 그에 따른 부작용과 책임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이야 가장 염려되는 임신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으니 서로가 요령껏 피하며 행할 수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몸만 즐기는 수준으로 살면 안 되겠지요. 그 좋은 말 ‘사랑’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쾌락입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악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정당한 환경에서 만드는 두 사람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행하는 섹스야말로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겠지요. 사랑이라는 구실을 붙이며 불륜으로 만들어내는 섹스는 자칫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관계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피하는 것이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를 위해서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판단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동정도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요. 이해는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을 이해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른 한편 충분히 격분하여 모두를 처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 살인사건으로 연결되는 사건들을 현실과 사건들 속에서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 전혀 다르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람됨에 경의를 표합니다. 덕에 그는 아들을 하나 얻은 셈이기도 하지요.
다른 또 하나의 생각도 있습니다. 왜 하필 북한을 배경으로 하였을까,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철저한 계급사회입니다. 그러니 그의 지위에서는 그까짓 병사 하나쯤은 즉결심판 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르게 문제를 받아들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분노가 먼저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렇다면 두 남녀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신무광’도 그 두려움을 꿈에서 보았습니다. 그게 보다 현실적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사단장의 판단과 처신이 보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일반 사람들이 택하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마음의 상처는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이만 든 것이 아니라 성기능불능입니다. 어쩌면 결혼하지 말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만한 지위에 있으려면 특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총을 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뭐가 잘못 되었을까? 특히 남자가 성기능 불능이라면 매우 자존심 상하고 무엇보다 남자답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도 받습니다. 일단 사람들의 시선은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를 택하였습니다. 그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도 세울 수 있을 만큼의 여성을 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을 만해야지요. 물론 여자의 입장에서도 그런 배우자를 얻었다면 대단한 출세(?)지요. 서로가 대만족이었을 것입니다. 그 밤이 오기까지만.
사람이 자의적으로 독신을 택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리고 스스로 금욕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억지로 견딘다는 것은 곧 지옥생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욕구를 어떻게 매일 이기며 살아갑니까? 언제까지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달도 아니고 한두 해도 아닐 것입니다. 기약도 없이 마냥 참고 살라고요? 죽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용케 참으며 지냈는데 마침 아주 가까이 젊고 건장한 젊은 병사가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남편은 장기 출장입니다. 둘이서만 한 지붕 아래 거하게 됩니다. 아무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보장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물론 사모님 하기 나름입니다. 그런데 참아왔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어쩌면 사실 여자가 두 남자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만한 자신과 확신이 없다면 어찌 감히 그런 행각을 저지르겠습니까? 더구나 그러고서도 자기 위치를 지키며 병사의 뒤까지 봐줄 수 있다니 말입니다. 결국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뒤의 이야기는 다 큰 아들 하나 남겨두고 영영 집을 나갔다니,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간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곳이 그렇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은 아닌데 말입니다. 더구나 조금 비현실적인 장면은 당시 북한 병사들의 복장입니다. 너무 깔끔합니다. 우리도 그 때는 어려웠는데 말이지요.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SERVE THE PEOPLE)을 보았습니다.
<더 이퀄라이저>
사소한 일이 큰 사건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싹이 노랄 때 빨리 잘라버리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나이 든 한 남자,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아주 젊은 한 여자, 이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다만 새벽 2시라는 특별한 시간에 카페에 있다는 것이 공통의 사항입니다. 그 시간에 손님이 많을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눈에 띄겠지요. 물론 이 남자는 별 관심도 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책을 덮고 나갑니다. 그렇게 한 동안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었을 것입니다. 무료해 하는 여성이 먼저 말을 겁니다. 무슨 책이에요? 노인과 바다.
고기는 잡았나요? 잡았지. 아주 큰 고기를. 그래요? 가지고 왔대요?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오면서 거대 상어가 다 뜯어 먹었지. 헛수고 했네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시간 일은 한 거지. 그렇게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여자에게 전화가 오면 빨리 챙겨서 나갑니다. 창밖에는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태우고 떠나지요. 어느 날은 승용차가 와서 남자가 나와 여자를 불러내더니 싫다는 여자를 강제로 태웁니다. 걱정스러워 뒤따라 나온 남자에게 간섭하지 말고 관심 있으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건네주고 떠납니다. 다음 날 여자는 눈언저리가 멍이 들어 나타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그냥 다쳤다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며칠 안 보입니다. 알아보니 병원에 입원하였답니다.
엉망이 되어 인사불성이 된 ‘테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맥콜’의 삶에 변화가 옵니다. 명함을 받아둔 것이 있습니다. 테리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포주와 일당을 찾아가서 처단해버립니다. 아주 감쪽같이 말입니다. 세간에 뉴스로 나오지만 경찰은 이 집단 살해 사건을 그 관련 조직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그 술집을 경영하며 성매매를 업으로 하는 업주는 자기 식구가 무참히 당했는데 가만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세력다툼은 곧 돈벌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상부까지 보고된 상태에서 지시가 내려옵니다. 그리고 막강 킬러를 파견합니다. 그야말로 일이 뜻하지 않게 확대되어 갑니다. 자기 사업의 일부일 뿐이지만 소위 자존심 문제입니다. 여기저기 권력과도 손을 잡고 있는 마당에 어떤 놈이 감히?
낮에는 마트에서 일합니다. 함께 일하는 젊은 청년이 소방관이 되겠다고 시험 준비하는 것도 도와줍니다. 그런데 시험을 앞두고 갑자기 직장을 떠났습니다. 찾아가니 어머니가 경영하는 가게가 화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도와야 한답니다. 어느 날 경찰 두 명이 와서는 그 어려워하는 가게에서 자기네 자릿세(?)를 등쳐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장 쫓아가서 닦달을 내고 다음 날 그 돈을 가게에 돌려주게 합니다. 부패 경찰들은 얼마 후 누군가에게 사살됩니다. 자기네끼리 처리한 것이겠지요. 마트에 좀도둑이 들어와 계산대 직원의 자기 어머니 유품인 반지까지 빼앗아 도망갑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반지가 직원에게 돌아옵니다.
그런 사소한 사건들은 세상의 큰 사건들 사이로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당사자들 아니면 알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조직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의 상대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네 이익을 위하여 버금가는 권력과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을 대주고 대가로 권력의 비호를 받습니다. 돈으로 맺어진 관계는 끈끈하면서도 목숨이 걸려 있게 마련입니다. 아마 그런 줄 알면서 그 연줄에 매어달릴 것입니다. 그만큼 돈의 매력이 대단하다는 뜻이지요. 세상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바로 돈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돈 앞에는 성인군자도 없습니다. 성직자들 안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맥콜이 그러려고 시작한 일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호기를 부린 것입니다. 여린 한 여성의 인생이 무참히 깨지는 것을 보며 숨었던 의기가 터진 것이지요. 그저 한 여성을 위해 도우려고 한 일이 그렇게 커집니다. 이제 막강 세력, 조직과 대결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전직 동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상대 쪽에서도 냉혹한 킬러가 드디어 조직을 해(?)하는 실체를 찾아내어 뒤쫓습니다. 드디어 실력자들이 맞서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영웅(?)을 원합니다. 도무지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들이 많은 줄 압니다. 하기야 그 많은 시민들,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찌 다 돌보겠습니까? 사회가 지탱하는 것은 사람들의 양심적 의식의 힘이 크다고 봅니다. 그래도 그런 의식을 깨며 자기 뱃속을 챙기려는 악한 무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일반 시민으로서는 현실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홍길동 같은 의적이라도 나타나서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라도 대리만족을 하려나 봅니다. 시원한 끝장과 ‘테리’의 밝은 미래를 기약하며 끝납니다. 잠시나마 기분이 좋습니다. 영화 ‘더 이퀄라이저’(The Equalizer)를 보았습니다. 2015년 작품이네요.
질문 4
예수님을 믿는 집사님, 예수님을 믿는 권사님, 예수님을 믿는 장로님,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목사님, 거듭나셨습니까?
예수님은 불신자에게 거듭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인정하여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요 3 : 1 - 3)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집사님, 예수님을 믿는 권사님, 예수님을 믿는 장로님,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목사님, 거듭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