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보리암에서/김원각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 되지 못한 몸
여기 와 무슨 기도냐
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
<시 읽기> 남해 보리암에서/김원각
위 시가 수록된 김원각의 시집 『민박』을 처음 본 날, 저는 언어의 생태적 건강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이나 지구의 생태적 건강성뿐만 아니라 문화의 생태적 건강성이 이 시대에 확보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내적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문화의 핵심인 언어의 생태적 건강성이 요구된다는 생각이 사라지지를 않았습니다. 제가 생업으로 탐구하고 있는 문학(시) 언어들의 최근 실상을 살펴볼 때, 그 건강성에 의심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우리 시단의 언어들은 김지하가 생태적 건강성의 전제요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자발적 가난’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언어들이 너무 쉽게 너무 많이 너무 화려하게 풀려나오고 있습니다. ‘디지털 수다’라는 말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의 언어를 보면 이와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언어의 과잉이자 낭비입니다. 언어의 현학이자 제스처입니다. 침묵의 아랫도리가 너무 빈약한 채, 이파리만 무성한 여름나무의 꼴입니다.
김원각의 시와 시집을 읽는 일은 이런 언어의 생태적 건강성이 회복되는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어의 생태적 건강성이란 인간의 욕망조차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시인의 마음과 언어에 깃들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김지하가 말한 바 자발적 가난이란 것도 실은 인간들이 지닌 생물학적, 사회적 욕망조차도 넘어서려고 하는 고처高處의 욕망에 의하여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꿈꿀 뿐만 아니라 그 욕망조차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지님으로써 인간들의 그들의 내부에 지닌 영혼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이 세상의 독특한 존재입니다. 이런 영혼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일은 인간이 지닌 가장 높은 단계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치스러운(?) 욕망이 있음으로써 인간들은 세속적 잣대와 관습을 넘어선 영역에 자생하는 영혼의 정원을 창조할 수 있고, 자발적 가난에 의거한 언어의 생태정원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김원각의 시와 시집을 읽으면서 자생하는 영혼의 정원과 앞서 말한 언어의 생태정원을 산책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 욕망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 때문에 강원도 인제군의 산골에 가서 생활의 터를 잡았고, 그곳에서의 생활을 보고라도 하듯 이 시집을 세상으로 내보낸 것 같습니다.
위 시의 제목은 ‘남해 보리암에서’입니다. 남해도, 보리암도 많은 시인들이 손때가 묻은 소재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접할 때마다 언젠가 시간을 내서 가보고 싶다는 낭만적 소망을 접기가 어렵습니다. 남해도, 보리암도 모두 세속의 경계를 조금 벗어난 곳의 땅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남해 보리암에서 김원각 시인은 남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는 남해를 보고, 보리암의 부처를 보고 자기확산의 기도를 올리지 않고, 자아수축의 한 형태인 자기점검과 자기성찰에 몸 둘 바를 몰라합니다. 생이란 확산과 수축의 반복작용입니다. 확산의 넓이가 주는 기쁨도 있지만, 수축의 깊이가 주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위 시에서 시인은 수축의 깊이가 주는 아름다움의 순간을 전하고 있습니다. 막상 남해의 보리암에 갔지만 소원을 빌어서 자신을 확산시키고 싶은 마음보다는 머리 위의 텅 빈 하늘 아래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은 자기 겸허의 다른 이름입니다. 자아의 해체와 무화를 꿈꾸지 않는 한, 이 자기겸허가 주는 부끄러움이 감정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높은 선의 단계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함으로써 우리는 안쪽으로 그윽해집니다. 그리고 공격성으로 딱딱해졌던 몸이 한없이 부드러운 대지처럼 열리기 시작합니다. 김원각 시인이 위 시의 첫 연에서 남해 보리암 앞에 서니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고 한 말에 우리가 소리 없이 이끌리는 것은 바로 이 부끄러움의 유혹 때문입니다.
김원각 시인은 이어 다음의 제2연과 제3연에서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 되지 못한 몸//여기 와 무슨 기도냐”고 그의 부끄러움을 더욱 깊이 있게 심화시킵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움의 대상을 갈망하고 그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실의와 절망 속에서 당혹해했을 뿐, 우리 자신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싶은 소망을 간절히 지녀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전략과 권력에 의한 무서움이 대상이 아닌, 진정 순정과 진실에 의한 사모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한 존재가 후자와 같은 사모의 대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향해 사랑과 신뢰의 눈길을 부드럽게 보낼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싶은 소망,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의 한 모습입니다. 시인은 그런 자신의 욕망을 점검하면서 자신이야말로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가를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이기에 남해의 보리암에서 함부로 세속적인 욕망의 확장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아검열 기제는 욕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에서 성공하지 못한 그 자신을 먼저 나무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 세속적 욕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자, 그런 자들이 언어는 수다스러울 필요가 없습니다. 언어야말로 엄청난 자기과시와 자기확산의 세속적 욕망기계이고, 그 기계가 과열되었을 때. 언어의 장이란 소란스러우면서도 파괴적인 도심의 풍경을 닮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닐 때, 언어의 생태적 건상성은 흔들리고 맙니다. 이것은 시에서도 동일합니다.
언어가 튼실함 뿌리를 지니지 못하고 표면을 미끄러져 다닐 때, 그것은 언어의 경박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말이 진실과 진정성의 샘에서 솟아오르지 않고 표면만을 유영할 때, 그것은 언어의 장식성이 지닌 한계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김원각은 위 시에서 더 이상 소원을 담다 기도를 올리지 않고, 그냥 텅 빈 하늘이 별 아래서 취하여 잠을 잤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소원과 기도의 수다스러움을, 그것이 지닌 자기중심성의 소란스러움을 그는 알았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냥 별이 뜬 하늘 아래서 대취하여 잠이 듦으로써 그는 말 대신 누구에게라도 그리움이 되고 싶은 속마음을 키워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그리움의 대상을 외부에서만 찾느라고 눈도 마음도 늘 피곤해 있습니다. 그리고 불만도 분노도 많습니다. 피곤한, 불만, 분노, 이런 것들을 모두 마음의 생태적 건강성을 해치는 요소들이고, 그런 기운들이 발산됨으로써 사회적 생태계도, 언어적 생태계도 많이 흔탁해졌을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처럼, 아니 그 자신의 이런 마음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현명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싶은 소망을 뜨겁게 안으로 키우며, 적은 말로써 마음의 생태계와 언어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위의 짧은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따스해지고, 몸이 환해지고, 그 마음과 몸에 촉촉한 생기가 스며드는 것은 이 시를 쓴 시인의 내면에 그런 지혜와 소망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