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의 기본 기능은 상대방에게 메시지, 사진, 음성, 동영상 등을 전송하는 데 있으며, 보이스톡을 통해 음성 통화가, 페이스톡을 통해 영상통화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룹채팅이 가능하며, 채팅플러스 기능이 있어 드로잉톡, 필터카메라, 솜노트, 솜투두, 라쿤슬라이스, 불리2 등을 사용하면서 채팅을 할 수 있는데, 자신이 필요한 메모나 데이터를 모아놓을 수 있는 나와의 채팅이 있고,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채팅할 수 있는 오픈 채팅 기능도 있습니다.
검색을 통해 채팅방 입력창에서 바로 검색을 하고 결과를 채팅방에서 공유할 수 있고, 카카오페이 기능을 통해 송금이 가능하며, TV 시청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이템 스토어 등을 통해 이모티콘 등의 구매가 가능하며, 각종 상품을 구매하거나 선물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다음백과에 나온 “카카오톡”의 설명입니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카톡, 카톡’하는 소리 자주 들을 겁니다. 저는 제 폰에 소위 ‘카톡’ 을 깐 지가 3개월이 되었습니다. 저는 폰을 통해 필요한 통화나 문자를 보낼 수가 있어 카톡을 깔지 않고 지냈는데 초등학교 동창들에게 운동회 사진을 보내느라 어쩔 수 없이 깔게 되었습니다.
카톡을 깔면 시도 때도 없이 ‘카톡, 카톡’소리가 들릴까봐 소리가 나지 않게 설정을 해놓았고 쓸데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온다고 해서 신경이 쓰였는데 막상 보니 별로 없어서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단톡방이라고 하는 것은 제게 두 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동창회하고 대학 다닐 때의 동아리입니다. 뭐가 올라와도 보지 않고 있다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쑥 훑어보는 것이 다입니다.
<국민의 대부분은 자의 반 타의 반 카카오톡 단톡방(단체 대화방)에 참여한다.
만약 쥐도 새도 모르게 단톡방에서 나갈 수 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두말할 나위 없이 얼씨구나 반길 것 같다. 어쩌다 입장한 경우가 많고 한때 유용하게 썼지만 더는 참여의 의미가 무색한 단톡방이 많기 때문이다.
나가곤 싶은데 기록에 남으니 사람들 눈치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경험이 다들 있을 것 같다.
카카오가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지난달 선보이면서 사람들의 가려운 등을 긁어줬다. 불편함을 느꼈던 많은 사람이 단톡방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 기능을 활성화했다. 기능 추가 20여일 만에 무려 200만 명이 동참했다. 흔적 없이 단절될 수 있다니! 단톡방 노이로제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쾌재를 불렀다. ‘조용히 나간 200만명’,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가장 큰 교훈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시스템이 여전히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곳곳에는 집단적 규칙이 만연해 있다. 자율보다는 타율과 타성이 일터뿐 아니라 일상을 지배한다. 여기에 ‘빨리 빨리’로 대변되는, 효율을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도 한몫하고 있다.
단톡방은 업무와 일상을 가리지 않고 소통과 문제해결에 꼭 필요한 수단이 됐다. 사실 우리는 단톡방으로 인해 많은 편익을 누린다. 단톡방 덕에 우리는 더 효율적으로 연결되고, 의사결정을 더 쉽게 내리고, 결국 더 편리한 삶을 살고 있다.
효율적인 연결, 디지털 사회의 축복이 아닌가. 메타의 전신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가 ‘세상을 더 가깝게 연결하기’를 비전으로 내세웠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내가 왜 단톡방에 참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상사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 성화에 못 이겨 단톡방에 입장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목적과 효용을 다하면 폐쇄가 순리이지만, 뭔지 모를 압박에, 또 눈치에 누구도 선뜻 방을 떠나지 못한다. 단톡방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이지만,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선택을 존중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요즘 세대는 ‘느슨한 연대’를 원한다. 버스에 탑승하고 내리는 것처럼, 내가 원할 때 쉽게 참여하고 또 이탈할 수 있는 유연한 관계를 선호한다. 최근 직장인들의 최대의 화두가 근로의 유연화이듯, 경직된 팀플이나 일하는 방식은 내 가치에 역행한다고 여긴다. 가족과 일상도 그렇다.
비혼과 딩크족의 일상화가 말해 주듯 경직된 가족 형태나 또 ‘상명하복식’의 가족 모임도 경계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삶을 원하는 신인류에겐 타율화된 단톡방은 시작과 끝도 불분명하고 목적의식도 결여된 타성의 상징으로 비친다.
대안은 뭘까? 첫째, 업무와 관련된 소통은 가급적 이메일이나 공식화된 메신저를 통해 진행하는 게 바람직하다. 둘째, 필요를 다한 단톡방은 주저 없이 폐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셋째, 조용히 나간 사람들은 가급적 재소환하지 말자. 카카오를 위시한 플랫폼 기업들 역시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과 정책 발굴에 주력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단체사진을 유난히 좋아한다. 손가락 하트 사진이 특히 인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엇비슷한 손가락 모양과 웃는 표정으로 사진 한 장을 가득 채운다. 집단을 중시하는 미풍양속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과도하게 집단적이어서 늘 좋게만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집단 관념이 강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조용히 나간 200만 명’, 한 개인이 좀 더 행복한 유연한 사회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게 아닐까? 프랑스 등 서구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순 있지만, 디지털 유목민인 요즘 세대에게는 하나의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숨 막히는 초연결사회에서 숨통을 터주는 소중한 자산으로 볼 순 없을까?>세계일보.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
출처 : 세계일보. [구정우칼럼] 나는 연결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저는 단톡방에서 ‘나가기’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전달할 일이 있으면 저는 주로 문자로 합니다. 아직 문자를 사용할 줄도 잘 몰라서 단체로 보내야할 때는 유료서비스인 ‘아레오’를 이용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고 단톡방에 올리라고 얘기들 하지만 개인, 개인에게 각기 가는 것과 단톡방에 올리는 것을 많이 다를 거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저도 알지만 정말 너무 많은 굴레 속에서 원하지 않는 일에 끌려 다니는 것은 하루, 하루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일 겁니다. 주로 시골 출신들이 동창회 단톡방을 만들고는 거기서 또 분화해서 다시 작은 모임을 만들어 소통한다고 하는데 소통도 좋지만 괜히 시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폰으로 하거나, 최소한 문자 정도로 연락을 하면 될 일이지 특정인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을 단체로 보내는 것을 받는다면 부담이 될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다 내려 놓아야 한다고 말들을 하면서도 그게 쉽지가 않아서 힘든 것 같습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