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북한 탕감노정에서 승리하신 참아버님 참아버님께서는 흥남감옥에서 누구보다도 늦게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셨고 노동현장에서도 동료들을 위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셨다. ‘감옥의 성자’로 부를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하늘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모든 탕감복귀섭리의 조건을 세우셨다. 흥남 감옥에서는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한 이후 1950년 10월 12일부터 수감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참아버님의 처형 날이 10월 14일이었는데, 유엔군이 이날 총공격을 단행하자 북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참아버님과 수감자들은 모두 해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참아버님께서는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 도보로 10일 걸려서 평양에까지 오시게 되었다. 6 10월 14일은 흥남감옥에서 나온 날입니다. 그곳을 들어갈 때 내가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까? 어떻게든지 살아 나가야 합니다. 살아남으려면 죽겠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동하는 데서, 언제나 그 일터에서 표적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이 나였습니다. 그것이 살아나가는 비법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도 아닌 1천 명에 가까운데 간수들이 나를 선정해서 최고의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습니다. 아버님이 이런 길을 달려 나와서 뜻을 이루어 나왔습니다. 한 많은 복귀의 고개를 넘는 책임자가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민족의 원한, 세계 기독교가 실패한 원한, 저주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고 소화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 그분 편이 되어 내 길을 재창조해서 기독교문화권 이상을 나를 중심삼고 편성해 나왔습니다. 7 내가 흥남 비료공장에서 일하는 데에 챔피언이 되다 보니까 사람들 모두가 내 뒤만 따라다녔습니다. 아침에 나오면 조를 편성하는데 매일 같은 사람들과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를 편성하게 되면, 내가 변소에 갔더라도 오기를 기다렸다가 내 뒤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가운데서 제일 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거기서 내가 대장이 됩니다. 가마니를 묶는 것에서부터 끌어내어 화차에 싣는 것까지 하는 일이 아주 효율적으로 공식화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다른 생각을 합니다. 국가와 세계적인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아서 미래의 프로그램을 짜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남들과 똑같이 땀을 흘리지만 피곤한 줄을 모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매번 표창할 때마다 모범노동자로 뽑혀 상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8 6·25전쟁 중인 1950년 8월 1일 미군 B29 폭격기가 총공격하여 흥남을 크게 폭격하였습니다. 아버님은 이렇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님으로부터 직경 12미터 이내는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두 내 주위에 있도록 일렀습니다. 아버님은 그런 가운데서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폭격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금후의 이상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상이나 이상을 가진 사람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귀의 사명을 하는 사람을 영계에 데려가면 하나님에게는 천주적인 손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방비해 주고 싶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9 연합군이 폭격하기 며칠 전부터 공산당은 수인들을 처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삼베 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은 직감적으로 최후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님은 정말 심각한 기도를 했습니다. 간수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최후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우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 죽인 것입니다. 다음 차례가 아버님이었는데, 그날 밤 새벽 2시경 유엔군의 총공격으로 살아서 흥남감옥을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 1950년에 유엔군이 북한을 폭격했는데 먼저 흥남을 폭격했습니다. 아버님이 있던 흥남감옥이 근처에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그 유엔군에 의해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내력들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동해안에 있는 흥남에서 평양에까지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서쪽 지방의 평양에까지 걸어서 간 것입니다. 아버님은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면서 제자들을 찾아봤으나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11 1950년 10월 14일 석방되어 동해안을 통과해 평양을 향해 걸었습니다. 평안남북도 경계선인가 되는 곳에 왔을 때 인민군들이 도망가다가 고개를 넘을 적마다 불순한 사상이 있는 사람들을 숙청했습니다. 수십 명씩 줄을 세워 죽이던 그 고개를 넘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때 형무소에서 석방돼 죄수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나왔기 때문에 인민군들은 자기들의 적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네 번씩 죽음의 고개를 넘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함께 따라 나왔습니다. |
北朝鮮・興南での蕩減路程において勝利された真のお父様 真のお父様は、興南監獄で、誰よりも遅く休み、誰よりも早く起きる生活をされ、労働現場においても、同僚のために尽くしながら、最も難しい仕事を一手に引き受けられた。「監獄の聖者」と呼ばれるほど模範的な生活をされたため、天が感動せざるを得なかったのであり、すべての蕩減復帰摂理の条件を立てられた。興南監獄では、国連軍が興南に上陸したのち、一九五〇年十月十二日から、囚人たちを処刑し始めた。真のお父様の処刑日は十月十四日だったが、国連軍が、この日、総攻撃を断行すると、北朝鮮の人民軍が退却するとともに、真のお父様と収監されていた人々はみな、解放された。そして、真のお父様は、監獄から解放された直後、徒歩で十日かけて平壌に向かわれた。 6 十月十四日は、興南の監獄から出てきた日です。そこに入っていくとき、私はどれほど深刻だったでしょうか。何としてでも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生き残ろうとすれば、死ぬと思われるような状況を通過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労働する所で、いつでもその仕事場で模範となる人物として登場する人が私でした。それが生きていく秘法です。 働く人たちは数十人ではなく、千人近くいるのですが、看守たちが私を選定して、最高の実績を上げ得る材料にするのです。そのようになるのはたやすいことでしょうか。そのようにして生き残ったのです。 お父様は、このような道を走ってきて、み旨を成し遂げてきました。恨多き復帰の峠を越える責任者はどこに行ったのかというのです。民族の怨恨、世界のキリスト教が失敗した怨恨、呪ゐるそのすべてのことに対して、私が責任をもって消化してきました。神様と共に働く人になり、その方の味方になり、自分の道を再創造して、私を中心としてキリスト教文化圏以上のものを編成してきたのです。 7 私が興南の肥料工場で働くことにおいてチャンピオンになったので、人々はみな私のあとにばかり付いてきました。朝、出ると班を編成するのですが、毎日同じ人たちと仕事を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すから、班を編成するとき、私がトイレに行っていたとしても、戻ってくるのを待って、私の後ろに付くのです。 そうすると、その中で最も仕事ができる人たちが集まり、そこで私が隊長になります。かますを縛ることから、引きずり出して貨車に積むことまで、することがとても効率的で、公式化され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仕事をしているとは考えず、他のことを考えます。国家的、世界的なあらゆることを材料にして、未来のプログラムを練るのです。そのようなことを考えながら働いていると、時間が過ぎるのも忘れます。ですから、他の人と同じように汗を流しますが、疲れを知りません。このようにすることが、精神的に力になるのです。このようにしていたところ、表彰があるたびに、毎回模範労働者に選ばれて賞をもらいました。そのようにして生き残ったのです。 8 「六・二五動乱」中の一九五〇年八月一日、アメリカ軍のB29爆撃機が総攻撃をし、興南を大々的に爆撃しました。お父様はこのようになることを予見していただけではなく、お父様を中心に直径十二メートル以内は、神様が守ってくださる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近い人たちに、みな私の周りにいるように告げました。お父様は、その中でじっと瞑想をしていました。爆撃のことは考えずに、今後の理想世界について考えていたのです。 結局、思想や理想をもった人こそ価値があるのです。このように復帰の使命を担った人を霊界に連れていけば、神様にとっては天宙的な損害になるので、神様はいかなる犠牲を払ってでも防備することを願ったのであり、そのようにせざるを得ませんでした。 9 連合軍が爆撃をする数日前から、共産党は囚人たちを処分し始めました。ある日、彼らが麻ひもを集め始めたのです。お父様は、直感的に最後の時が近づいてきたことを感じました。お父様は本当に深刻な祈りを捧げました。 看守が、一人一人を呼び出して別の場所に移動すると説明しました。それが最後の道でした。そして、一人一人、井戸の中に逆さまに落として殺害したのです。次の番がお父様でしたが、その日の夜の午前二時頃、国連軍の総攻撃により、生きて興南監獄を出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10 一九五〇年に国連軍が北朝鮮を爆撃したのですが、最初に興南を爆撃しました。お父様のいた興南監獄がその近くにありました。お父様は、その国連軍によって自由の身になったのです。そうなるまでに多くのいきさつがあります。 お父様は、東海岸にある興南から平壌まで歩いて帰ってきました。西側の平壌まで歩いていったのです。お父様は、以前に従っていたすべての人たちに、私が帰ってきたことを知らせながら弟子を捜してみましたが、ほとんど戻ってきませんでした。しかし、何人かの人を集め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11 一九五〇年十月十四日に釈放され、東海岸から平壌に向かって歩きました。平安南北道(ピョンアンナムプクト)の境界線付近に来たとき、人民軍が、逃走しながら、峠を越えるたびに敵対する思想をもつ人たちを粛清していました。数十人ずつ並ばせて処刑していた、その峠を越えてきたのです。 その時は、刑務所から釈放されて、囚人服ではないほかの服を着て出てきていたので、人民軍は(私たちが)自分たちの敵ではないと思いました。死の峠を四回越えたのです。その時、四人の人が一緒に付いてきました。 |
True Father prevails While in Heungnam Prison, True Father went to sleep later than anyone else and woke up before anyone else. At the labor site, for the sake of his fellow inmates he always volunteered for the most difficult tasks. Because his lifestyle was so remarkable, True Father was nicknamed the Saint of the Prison. Heaven could not but be moved by his absolutely sacrificial heart. In this way, he set all the conditions necessary for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through indemnity. After the UN troops landed in Heungnam on October 12, 1950, the North Korean army began executing prisoners. True Father’s execution was scheduled to take place on October 14, but on that very day UN troops launched a full-scale attack and the North Korean army retreated. This enabled True Father and all the remaining prisoners to be freed. Right after he came out of prison, True Father set out for Pyongyang on foot, arriving there ten days later. 6 October 14 is the day I came out of Heungnam Prison. Can you imagine how miserable I must have felt when I entered that prison? I had to survive it by all means. To survive, I had to go through a course in which I was willing to die. We did forced, hard labor, but even so I became the prison's model worker. That was the secret of my survival. There were not just dozens of workers, rather there were close to 1,000 workers there. Even from among that number the jailors chose me as the worker with the best results. Do you think that was easy to accomplish? That is how I survived. By taking this kind of path, I was able to proceed toward the fulfillment of the Will. Where is the leader who will overcome the obstacles of restoration, filled with bitter sorrow? I took responsibility to digest everything—the sorrows of the people, God's bitter grief resulting from the failures of world Christianity, and all the difficulties related to those. As God's co-worker, I stood on His side and recreated my path. I organized the ideal Christian cultural sphere that could resonate with my mission from God. (220-078, 1991/10/14) 7 I was the champion laborer at the fertilizer factory in Heungnam. Because of that, all the prisoners followed me around. Every morning, the guards organized us into teams for work. We were not allowed to work with the same people every day. So, when the time came to organize teams, if, for instance, I had gone to the toilet, others waited for me to come back and then lined up behind me. In this situation, all the best workers ended up joining my team and I became their leader. I made a science out of how to tie a bag, carry it, and load it onto the train. I designed the most efficient method to accomplish these tasks. Therefore, when I worked I did not have to think about what I was doing, but was freed to think of other things. I was making plans for the future, thinking about the nation and the world. While I formulated such plans, I often lost track of time and the working hours flew by. Consequently, even though I was sweating as much as the others, I did not feel exhausted. Working in this way was mentally empowering. Every time they gave out the awards, I received the award for being the model worker. This is how I survived there. (222-295, 1991/11/03) 8 On August 1,1950, during the Korean War, American B-29 bombers launched an all-out attack on Heungnam. I knew this would happen. I foresaw it. Additionally, I knew that God would protect me, providing a circle of safety 12 meters around me during the attack. I told those who were close to me to stay near me. As the bombs were falling, I meditated silently. I was not thinking of the bombing but was rather thinking about the ideal world in the future. Ultimately, the most worthy people are those with a clear vision of the ideal. If a person is carrying out a mission of providential restoration, sending that person to the spirit world would be a loss for God and for the cosmos. So, God desired to protect me at any cost, and in fact He had no choice but to do so. (035-189, 1970/10/13) 9 A few days before the UN bombers attacked, the communists began to lead some of the prisoners away. One day they started to collect hemp strings, such as are used for corpses. I intuitively felt that some kind of final reckoning was imminent. I offered a very serious prayer. The guards called the prisoners one by one and explained that they would be transferred to another place. The prisoners did not realize it, but I knew it was their final call. They threw each of the prisoners upside down into a well, killing them. The next day it would have been my turn, but that very night, at 2:00 a.m., the UN troops launched an all-out attack, and it was thanks to them that I was able to leave Heungnam Prison alive. (035-189, 1970/10/13) 10 The UN troops bombed North Korea in 1950. The first place they bombed was the Heungnam area. The place they bombed was very close to Heungnam Prison where I was being held at the time. Thanks to those UN troops, I was able to walk out of prison. There are many behind-the-scenes stories of how this came about. From Heungnam, which is located on the east coast, I returned to Pyongyang on foot. I walked from the shores of the East Sea all the way to Pyongyang, which is situated in the west. Once I arrived in Pyongyang, I informed every person who had followed me previously that I had returned. I searched for all my disciples. Even though most of them did not come back, I was able to gather a few people together. (052-156, 1971/12/27) 11 I was set free on October 14, 1950, and, after following the coast of the East Sea for a short distance, I walked to Pyongyang, accompanied by four followers who had been in the labor camp with me. When we reached the border between North and South Pyeongan Provinces, we discovered that the North Korean soldiers who were fleeing over the mountain passes were executing anyone whom they believed harbored defiant thoughts towards communism. Our path brought us directly through just such a mountain pass. Dozens of people were being lined up and killed. But we were not in our prison uniforms, so the North Korean soldiers did not recognize us as the enemy. Four times during that journey we faced such life-and-death situations. (549-208, 2006/12/26) |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