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 차량 지원을 받습니다(쬐끔이지만 주유비 제공합니다)
제690차 나주 덕룡산 산행 + 천불천탑과 어우러진 튤립 화순 운주사 안내 | |
산행장소 | 나주 덕룡산 495m, 화순 운주사 |
산행날짜 | 2021년 4월 11일 (둘째일요일) |
산행코스 | 덕룡산코스 : 주차장-불회사-갈림길-산죽군락-덕룡산(빽)-깃대봉-일봉암-일주문-주차장 9.2km 4시간30분---차량으로 10분 이동후 운주사코스 : 일주문-구층석탑-석조불감-대웅전-불사바위-거북바위5층석탑-와불- 칠성바위앞칠층석탑-입구 2시간(입장료3,000원) |
산행회비 | 1/n |
출발장소 | 07:00 비엔날레 출구 도로변 출발 |
차량이동 | 4인1팀(팀별 차량 이용) 1시간 소요 |
산행준비물 | 여벌옷, 점심, 간식, 식수,구급약 등 |
산행신청방법 | 카페의 산행공지방에 댓글을 달아 신청해 주시거나 아래의 임원진에게 연락을 주셔서 신청하시면 됩니다. |
임원진연락처 | 회 장 뜸부기 010-9855-3143 산행이사 캔 디 010-3210-6338 번개산행이사 한고개 010-3646-0509 총무이사 비 니 010-8352-7400 |
협조사항 | 1.코로나 의심증상 발생시 빠르게 진단 검사 받으시고, 질병이나 합병증이 있으신 회원님은 무리한 산행을 삼가해 주십시오. |
본 산악회는 영리목적이 아닌 동호회로서 산행 중 및 차량 이동시 일어나는 모든 사고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며 본 산악회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 |
◆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는 동진 태화 원년(서기 366년) 인도의 마라난타 스님께서 창건하였고, 당나라 현경 초에(서기 656년) 신라의 희연조사(熙演祖師)께서 재창하였으며, 원말 지원(至元) 초 (서기 1264년경) 원진국사(圓眞國師)께서 삼창(三創)하였습니다. 조선 정조 22년(서기 1798년) 2월 덕룡산에 큰 불이나 사찰의 전각이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지명(知明)스님이 기미년(서기 1799년) 5월 15일 상량하였고, 1808년에 전각을 모두 복원였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인해 몇 개의 전각만을 남겨두고 모두 모두 소실된 것을 불회사 회주 정연스님이 1991년에 주지로 부임하여 25년 간의 불사를 통해 6.25때 소실된 것을 모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를 보면 불회사는 과거에 불호사(佛護寺)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창건 때는 불호사로 불리다가 1808년(순조 8) 무렵부터 지금과 같은 불회사로 절 이름이 바뀐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회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원진국사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을 중건하게 되었습니다. 공사가 이루어지자 원진국사는 좋은 날을 택하여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새 해가 저물고 말았습니다. 이에 원진국사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이때 원진국사가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일봉암이라고 합니다. (불회사 홈페이지 발췌)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 진나라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래하였다. 왕은 385년, 마라난타를 위해 새 도읍 한산주(漢山州/현, 경기도 광주시)에 절을 지어주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 마라난타는 인도의 승려로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인물로 나온다. 중국 동진(東晉)에서 옴. 마라난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영광 불갑사에 가면 마라난타에 대한 자료가 있을까? 홈페이지의 366년과 삼국유사 384년은 많은 차이가 난다. 어쩌면 360년 경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와 포교하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384년 왕의 부름으로 궁궐에 가서 왕을 만나고 침류왕은 불교를 인정하였는지도 모른다. 1264년 원진국사가 삼창하였다는 홈페이지 내용도 의심스럽다. 동사열전엔 원진국사는 1414년 입적하였다 한다. 무려 150년을 살았다는 이야기. 1355년에 형과 함께 과거급제하였다면 이때가 대략 20세 전후이지 않을까? '원진국사'를 인터넷 검색을 하니, 원진국사(1171~1221), 나주 불회사 원진국사탑 또는 원진국사부도 등으로 검색됨. <고려중기의 원진>과 <고려 말, 조선 초의 생존했던 원진>은 다른 승려일까? 부도탑의 명문은 고려 중기를 가르키고 있다. 사찰의 중창과 호랑이와 처녀 관련 전설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원진을 이야기하고 있다. 포항 보경사에도 원진국사탑이 있다. ◆ 화순 운주사 전남 화순 운주사(千佛千塔, 어떤 절이고 누가 세웠는가?) 1 화순 운주사(雲柱寺 또는 運舟寺) * 운주사는 조계종 제21구 송광사의 말사이고 출토된 유물을 보면 늦어도 11세기초 이전에 건립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다. 임란때에는 왜적이 해상으로 호남을 침공하려다가 이순신장군과의 해전에서 대패한 덕택으로 호남은 피해가 적었으나 정유재란때에는 왜적이 아예 육지에서 소규모부대를 편성하여 호남을 유린하면서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했다. 1800년경 자우스님이 중건하여 약사사라고 한 이래 수차 중건되었다. * 운주사라고 하면 千佛 千塔으로 유명한데 근대에 관리가 소홀하여 불상과 탑이 촌집담장으로 쓰이는 등 흩어져서(1942년 석불213기 석탑30기가 있었다 한다.) 현재는 석불91기 석탑21기가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석불과 석탑의 규모가 주먹하거나 기와장만한 작은 것이 다수 있으므로 현재 남아 있는 숫자에 대하여 셈이 일치하지 않는다. 석재는 인근 바위(웅회암석)에 틈을 내어 나무를 꼽고 물을 부어서 때어내었고 조각솜씨는 동일인의 작품이라 한다. * 석조불감, 9층석탑, 원형다층석탑의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지형적으로는 밑바닥이 평평한 길다란 직사각형의 계곡이고 대웅전뒤에 큰 거북이 내려오고 청백에 몇 개의 거북형체가 보인다. 2 운주사의 신비 운주사는 역사이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의 석조조형물, 천개씩에 이르는 석불과 석탑, 그리고 누구가 언제 창건하였는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 신비한 사찰로 각인되고 있다. 창건설화로 도선국사說, 혜명스님 說, 고려 토호說, 백제난민說, 마고(麻姑)할미說이 있다. 필자는 운주사에만 있는 특이한 점을 들어 운주사를 누구가 언제 세웠는지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운주사에만 있는 특이한 점으로, ① 천불천탑의 숫자이다. 요즈음은 장사속으로 금형으로 프라스틱을 찍어 천불천탑을 만들고 판매하여 돈벌이를 하지만 예전엔 그런 발상을 하지 않아 천불천탑을 조성한 사찰은 없었다. 기껏해야 목각으로 정성들여 조각한 오백나한상을 만들었다. 나한들의 모습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똑 같은 모습은 없는지 찾아 본 경험이 있다. 각기 다른 모습을 궁리하는 일도 쉽지 않을 듯하다. 3. 창건설화 * 도선국사 창건설---도선국사가 우리나라 지형이 배와 같은데 운주사는 배의 중심되는 곳이고 배에 중심잡을 물건이 없으면 안정되지 않으므로 도술을 부려서 하룻밤새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설화가 있다. 도선국사(827~898)의 비보풍수에 걸 맞는 이야기이지만 허구이다. 풍수는 불가에서 탐구목적이 아닌 바 도선은 젊어서 화엄종에 정진하다가 선종으로 전환하였고 35년간 옥룡사에서 수백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도술을 부릴 승려가 아니다. 도선이 중국에 유학갔다는 건 허구이지만 북방 대승불교에 속하였으므로 북방불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불상을 조성할 리 없고 그가 있었던 옥룡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 운주사의 불상에 유사한 면모의 불상은 없다. 도선이 하필이면 유독 운주사에만 특이한 석불을 조성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 고려 혜명스님說---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 1656 유형원 편찬)에 고려승 혜명이 천여명의 무리와 함께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혜명은 조정의 명으로 968년(고려 광종때) 논산 관촉사에 은진미륵을 조성했다. 은진미륵은 높이18.2m, 둘레9.9m, 귀의 길이3.3m로 국내 최대석불이고 몸매가 8등신이 아닌 4등신인데 얼굴을 크게 만든 것은 참배객이 가까이서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석굴암 부처님 상호가 4m높이이고 약간 숙인 자세인데 6m거리에서 가장 잘 보인다는 점을 상기하면 알 수 있다. 100여명의 석공이 37년간 조성하였고 상반신과 얼굴을 연산에서 옮겨 오는데 천여명이 동원되었다 한다. 은진미륵불의 상호가 특이 하지만 운주사와는 다르다. 혜명작품이라면 기록이 없을 수 없다. * 고려 토호(土豪)설---신라 말기부터 왕건이 918년 고려를 세우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는 혼란기로서 왜구의 행패가 심했다. 고려 토호가 창건하였다면 왕건이 토호세력을 이용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권과 토호세력이 안정된 950년경(3대 성종~4대 광종)으로 보아야 된다. 그때쯤이면 기록에 남았을 것이고 설화는 없다. 그리고 천불천탑이 한사람의 통일된 작품인 점을 고려하면 토호가 주도하였다기 보다는 불교에 심신 깊은 장인이 초기부터 완성시까지 일관되게 주도하였다고 보아야 된다. * 백제인 창건설---교려치하에서 억눌려 살던 백제인(후백제인을 말하는 듯)이 미륵부처의 출현을 기원하며 세웠다는 주장이다. 백제는 미륵신앙이 강하여 견훤과 궁예가 자칭 미륵불이라 하였다. 독일 힐트만이 미륵이란 책에서 운주사를 미륵사찰이라 하고 그 징표로 미륵두상(1.2m 사찰입구 9층석탑뒤 잔디밭에 있고 많이 훼손되어 오른 쪽 눈부위만 온전)을 들고 있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기간에 걸친 대역사는 경제적 뒷받침을 하는 창건주도세력이 있어야 하고 관청의 비호가 있어야 된다. 그러다보면 은진미륵처럼 자연히 문헌상 기록이 남게된다. 견훤등 후백제 세력은 활동지역이 충남지역이었고 전쟁 때문에 장기공사를 할수 없었다고 추정된다. 운주사를 미륵사찰로 볼 특별한 징표도 없다. * 마고할미說---무당할매가 창건하였다는 말이다. 운주사 불상처럼 자유분망하고 파격적인 모습 그리고 부부불상은 계율이 느슨한 남방불교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사람의 지식은 이전에 획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쌓아 올린 것이다. 우리나라 불상밖에 보지 못한 사람이 남방불교적 조각을 할 수 없다. 다수는 와불은 장차 일어켜 세워둘 기획으로 세겼다고 하고 와불이 일어설 때 신천지가 온다는 설화도 있다. 그러나 다른 석불은 석재를 때내어 조각하였는데 와불은 바위에 그냥 새겼고, 때어낼려고 시도한 흔적도 없다. 장소도 칠성석과 연관될수 있으므로 와불은 바로 세울 계획이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기서 부부와불, 북두칠성과 공사 감독바위에 착안하여 상상을 해보면 아래와 같은 假說(무당부부 창건설)이 가능하다. 신라말 서남해안 출신의 청년이 선원으로 취업한 뒤 우연히 태국등지의 남방으로 들어가서 남방불교 조각을 보고 귀국하였다. 귀국후 그는 사교교주 노릇을 하던 무당여자와 결혼하여 강진등지에서 살았는데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하자 다수의 무당신자들과 장흥 유치면을 거쳐 내륙으로 피난가서 화순 운주사 계곡에 정착하고 운주사를 창건하였다. 그곳은 해안지역으로부터 침입하기 어렵고 동구밖은 농토가 풍부하다. 무당 남편은 남방불교에서 본 불상에서 영감을 얻어 불상을 조각하고 항해에서 방향타가 되는 칠성석을 설치하였는데 그가 공사 감독바위에 앉아 공사를 총괄 지휘한 덕으로 공사가 일관성있게 진행되었다. 추종집단이 신심으로 무아지경에서 새긴 것이다. 어떤이는 백성을 강제 동원하여 조성한 것이니 당시 동원된 백성의 고통에 연민한다는 기행문을 올렸다. 강제동원되면 만리장성은 쌓을 수 있으나 감동을 주는 불상은 만들 수 없다. 여기 불상은 초연한 듯 보이기도하고 약간 슬픈 듯 보이기도 한다. 서방외국인이 불상특유의 미묘한 느낌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저 큰 바위 밑에 있는 주먹만한 불상은 석공이 자신만의 부처를 새겨둔 것이리라. |
첫댓글 갑니다
일등~
난최고 중전 천불 천탑에 튜울립 보러갑니다
포근한 봄날입니다~
크루즈감사님 모시고 갈랍니다
참석합니다
짱입니다
저와 지인 신청합니다.
나주시민이라 불회사주차장으로 바로가겠습니다.
환영합니다
갑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