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날씨가 시원하다. 사실 미국에 와서 더운 지역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이런 시원한 느낌들을 마음껏 만끽하지는 못했었던 것 같다. 특별히 내가 사는 지역인 텍사스는 계절이 여름과 겨울 밖에 없다고 말들을 한다. 이곳은 평소에는 여름이 훨씬 더 길어서 선선한 날씨를 만끽할 수 있는 날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오늘은 오랫만에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시원함은 나에게 설레임을 준다.
2. 한국을 떠나온 지 어느덧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나온 세월 만큼이나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학교에 들어갔다가 졸업을 했고, 회사에서 일도 하였으며, 지금은 사역자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변했음에도, 내 마음의 기억들은 흐르는 세월을 거슬러 예전 그 자리 가운데 멈추어 있는 듯 하다. 어린시절 부모님께서 사역 등으로 바쁘셨을 때 돌보아 주셨던 할머니, 외할머니와의 시간들, 내가 속상할 때 나를 안아주시던 어머니의 품, 추운 겨울이면 따뜻하게 온 몸을 녹일 수 있었던 이불 덮인 장판까지.
3. 언제부터인지 그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옛것을 그리워 한다고 들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먼 타국에서 오랜 시간동안 지내면서 추억할 만한 옛것을 바라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4.지금 나의 시간이 들어가는 곳은 대부분 가정과 직장, 교회 밖에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나의 삶을 되돌아보자면, 나는 마치 멈춰버린 시간 속에 사는 듯 하다. 그러한 내게 세월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소식들이다. 작년 12월, 어린 시절 추억에 있던 사촌 형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이후로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추억에 있는 분이기 때문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나의 외할머니께서도 소천하셨다. 나의 어린 시절을 업어키우셨던 외할머니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손주라 말씀하셨었다. 그랬던 그분이 인생의 말미에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더라. 사람의 생이란 무엇인지.. 마음 한켠이 슬며시 아려온다.
5. 미국에서의 11년 동안 나의 기억에 있던 많은 것들이 바뀌어졌다. 우리 아버지의 머리는 그렇게까지 하얗지는 않았다. 우리 어머니의 눈매는 이렇게 쳐지지는 않으셨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통화하는 아버지의 머리는 어느덧 하얗게 새셨고, 어머니의 눈매는 참 많이도 내려 앉으셨더랬다. 따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함께 하지 못한 세월의 발자국이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6.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또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어린시절에는 무엇을 찾고 이루기를 원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순간들을 보는 것이 인생의 목적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또한 그러하셔서, 내가 먼 타국에서 아이들을 잘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의 행복으로 여기지 않으셨을까? 그렇지만 나에게는 사랑하는 부모님,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한 없이 야속하기만 하다.
7. 예전에 내가 군대에 갔을 때 어머니께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아들이 군대에 가니 마음 한구석이 비어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도 동일한 마음이셨으리라. 그 때에는 그러한 말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8. 오늘의 시원한 날씨가 나에게 옛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 때에 이 시원한 날씨는 오늘의 이 시원한 날씨와 같은 날씨였을까? 오늘의 날씨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을 보니 아마도 같은 날씨였을 것이다. 10년 뒤 오늘의 날씨는 나에게 무엇을 떠올리게 할까? 오늘의 내가 사랑하며 산다면, 10년 뒤 나는 오늘의 내가 사랑했었던 기억을 떠올릴까? 부디 그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10년 뒤 인생에 있어 사랑의 기억이 떠오르는 행복한 오늘로 살고 싶다.
9. 오늘도 학교를 마치고 해맑게 뛰어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아이들에게도 오늘의 기억이 내일의 행복한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