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은 형식과 내용의 일대 갱신을 보인다. 한국 시가 가지 뻗고 자라 오면서 내장한 여러 성과와 경계를 공교한 화법으로 고개를 넘는다. 그의 메타포는 슬픔을 경쾌한 기억의 금속성으로 변형시킨다. 비극이 우울로만 남을 수 없는 “빛의 문자들”(「DMZ」)로 시가 된다. “햇살이 흙 속 유골을 찾듯 붓질하는”(「감은 눈」) “동백꽃 찢어진 그늘”(「그늘 무늬」) 등은 시간을 앞지른 감각의 재현이다. 그 밑자락은 “이번 생을 당신과 함께해 미안하다”(「밤눈」)고 한다. 시는 눈송이 사이로 빠져나가면서도 삶의 정면을 통해 현대사라는 ‘그녀’와 대면한다(「현대사」). 그것은 아주 사적인 언어인 둥근 “마침표./마침표./마침표.”(「분꽃」)의 까만 씨앗의 약속이고 믿음일 것이다. 또 “옅은 살구 냄새가 딸아이 첫울음처럼 올라와”(「처가에서」) 그 울음과 이별을 만나게 할 줄이야. 역사와 사적 오브제가 이렇게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니! 그리하여 두 톱니바퀴로 맞물려 시는 다른 방향으로 돌면서 먼 곳의 슬픔을 자아낸다. “여수 밤바다 아픈 물숨 소리”(「여수」)는 “청주 식물대학 목련과 재학 중인/함박꽃”(「오늘의 강연」)과 함께하는 우리 시의 한 진경이다. 죽음의 이별에서 터지는 목소리는 쓰라린 언어로 빛난다. 죽음이 이런 의식의 씨방을 보여 줄 줄은 몰랐다. “봄날 어린 샅 근처”에 “다시 찾아오라던 복숭아뼈 하얀 그 여자”의 「사월」은 우리 시의 다른 사월이다. 삶이든 죽음이든 역사든 사랑이든 이 모두가 “어디로 흘러가는 아픈 꿈일까”(「먼 곳」). 능선에 걸린 해의 산 그림자 안으로 들어선다. 가고 없는 그녀의 “밥물 끓는 소리”(「떠난 사람」)가 들린다. 우리는 “누구의 아름다운 서쪽일까”(「서쪽」), 나는 그 누구의 동쪽 삶일까. “반짝, 눈뜨는 아기별”(「빈집」)과 눈마주친다. “캉캉을 추며 캉캉 눈이 내리”(「캉캉」)는 하늘을 쳐다보고 침묵을 깨뜨린다. 함기석 시인의 시가 그립고 아름답고 외롭다! “내가 일생을 똑바로 걸어가서//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가는지//검안하라고 빛이 보낸 검시관”(「걷는 사람」)을 마주하리. 우리는 끝에서 자신의 「겨울 화형식」을 마주하게 될 것인즉, 빼어난 시상이다. “탯줄 달린 시뻘건 해가” 보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시실리」로 나도 가겠다. 소주 한잔으로 눈송이처럼 헤어질 터. 다른 계절 하나가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