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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수도없고 갈수없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오늘날 이 시대를 풍미하는 사상은 포스트모던이즘입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은 절대 진리를 부정합니다. 육체의 쾌락을 미화합니다. 돈을 신으로 섬깁니다. 지구촌이 소돔 고모라 화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와 비탄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상한 마음을 알고 품어야 합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유일한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복음으로 이 세상을 도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신자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이런 책임이 있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권능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어디서 옵니까? 성령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말했습니다. “불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중생이고,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준 메시지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날마다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던 시대의 모든 대적들을 이길 뿐 아니라,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I. 왜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는가(16-21)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개척된 소아시아 지방의 작은 마을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갈리다아 지방의 이방인들이 바울이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무와 꽃들과 풀 한 포기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세상이 달리 보였고, 심지어 돌덩이까지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부끄러운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일뿐입니다. 아기가 탄생했다고 사람구실을 합니까? 아닙니다. 젖을 잘 먹고, 엄마의 사랑과 돌봄으로 건강하게 성장해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도 성장의 과정 곧 성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중생했다고 사람이 갑자기 성자가 되거나 천사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한 사람도 아직은 죄악이 관영하고 유혹이 많은 실낙원의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또 전적으로 타락한 죄의 본성이 가득한 육체를 그대로 갖고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성자처럼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번번이 이전의 죄에 넘어졌습니다. 갈등이 되었습니다. 회개를 하고 결단을 하지만 얼마 지나면 또 넘어졌습니다. “복음에 정말 권능이 있는가?”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신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세 번 금식하고, 절기를 지키며, 규모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될 수 없고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의 가르침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해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마저 잃었습니다.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갈 5:4절에서 바울은 책망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간절히 증거한 후에 결론으로 명령했습니다.
16절을 봅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live by the Holy Spirit”, “성령에 의해 살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모든 면에서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명령입니다. 이 길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결론인 25절에서는 “성령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keep in step with the Holy Spirit”입니다. “성령님과 계속 발을 맞추어 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초등학교 운동회 때 2인 3각으로 한쪽 다리는 끈으로 묶어서 달리기 경기를 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때 잘 달려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사람이 발을 잘 맞춰야 합니다. 특히 잘 달리는 사람의 스탭에 맞춰서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성령님의 발에 내 발을 묶고 성령님의 스탭에 맞추어 계속하여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에 의해 살면 어떻게 된다고 약속하십니까? 16b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뒤집어 보면 이 말씀은 성령에 의해 살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을 이룰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 거스릅니다. 서로 대적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18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됨으로 육체의 일들에 종노릇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16), 육체의 소욕(17), 육체의 일들이 무엇입니까? 19-21a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 육체의 일들을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의 성적인 죄들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음행은 간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것은 성적농담을 말합니다. 호색은 성적인 죄에 대한 과도한 탐닉입니다. 인터넷 음란물 써핑이 오늘날의 대표적인 호색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이 세 가지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둘째, 종교적 죄악들입니다. 우상숭배와 주술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피조물을 마음 첫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물질이나 권세나 명예나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특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주술은 마술입니다. 한국에는 점쟁이들이 60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나 정치인들을 비롯해서 연예인들, 심지어는 신자들 중에도 점쟁이를 찾는 자들이 있답니다.
셋째, 대인관계에서 저지르는 여덟 가지 죄악들입니다. 원수 맺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잔 술로 원한을 쉽게 푸는데, 신자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쉽게 원수를 맺습니다. 다음으로 분쟁은 과도한 경쟁이나 다툼을 말하는데 우리도 쉽게 빠지는 죄입니다. 다음으로 시기심이 발동할 때 얼마나 많습니까? 분냄, 여러분 분내지 않습니까? 다음으로 당 짓는 것, 곧 이기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헐뜯고 뭉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분열함, 이단, 투기입니다. 투기는 심한 질투이며, 남의 것을 탐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취하려고 탈취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의 본성 속에 다 있습니다.
넷째, 술 취함과 방탕함입니다. 방탕함은 술에 취해 흥청거리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술은 다 끊었을 것이니 이 두 가지 죄목은 벗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이상의 구체적인 죄의 항목들로 다 포함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롬1:28-32절에서 육체의 일들을 더 많이 언급했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악독, 수순수군, 비방,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를 거역함, 우매, 약속 안 지킴, 무정함, 무자비함, 이상의 행위들에 동조함 등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들의 해당 사항이 상당히 많습니다.
21b절을 보십시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의 내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받지도 못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해지려고 애를 썼지만 이런 육체의 일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듯이, 우리도 자신의 의지력으로 이런 육체의 일들을 벗어보려고 결단하지만 얼마 못 가서 또 넘어집니다. 혈서를 쓰고 냉수마찰을 해도 효과는 얼마 못 갑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오직 성령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까?
첫째, 성령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거듭납니다. 이 때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임하여 내주, 곧 함께 사십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성령을 ‘기’ 혹은 ‘스피릿’ 으로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은 ‘기’ ‘스피릿’을 갖고 있으나, 그렇게 제한적이고 피조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더불어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으로 살아 계신 3위의 하나님이십니다. 고후 3:17절은 성령님을 ‘주’로 부르는데, ‘주’는 구약에서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고전 2:10절에 성령님의 전지전능성을 말합니다. 요 14:17절은 성령님의 편재성을 말합니다. 히 9:14절은 성령님의 영원자존성을 말합니다. 마 28:19절은 성부, 성자, 성령님의 동등하심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사역을 하셨고, 성자 예수님과 함께 구속사역도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이십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창조자요, 수여자요, 죽은 자도 부활시키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 곧 위로자요 상담자이십니다. 성령님은 죄인이 회개할 수 있게 하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도록 하십니다. 성령님은 성도를 가르치고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상담해주시고, 붙들어주시고, 도우십니다. 영적 권능을 주시고, 영적 분별력을 주시고(고전2:10), 지혜를 주시고(약1:5), 젊은이에게 환상을 주시고(행2:17), 외국어를 구사할 능력을 주시고(행2:4), 복음전도의 능력을 주시고(행2:41), 질병을 치유하기도 하십니다(행19:12). 우리는 내 안에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내 곁에 계셔서 언제든지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성령님과 긴밀하게 교제하면서, 성령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늘 깨어 회개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나를 온전히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하십니다.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사소한 죄라도 철저하게 회개하고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혈관에 피가 늘 정상적으로 흐르고 순환해야 합니다. 그런데 혈관에 콜레스트롤과 같은 찌꺼기들이 쌓이면 혈관이 막힙니다. 그러면 죽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때 성령의 파이프가 하나님께 연결됩니다. 그 성령의 파이프를 통해 성령을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일들, 곧 죄가 성령을 공급하시는 관을 막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름수양회 때 혈관이 잠깐 뚫었다가 또 막힙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예배 때 조금 뚫리다가 막힙니다. 한 번 중생을 체험한 이후에 계속 그 관이 막혀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육체의 소욕들을 회개하여 성령의 공급관을 청소해야 한다. 우리가 소돔성의 악영향 가운데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의 95%입니다. 아침에 회개하고 오후에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회개할 것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로마서 1장을 읽거나, 십계명을 읽으면 회개할 것이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사실 UBF에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회개는 잘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도 성령에 의해 맺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는 잘 하는데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스스로 맺으려 합니다. 얼마간 효과가 있으나 며칠 못 가서 같은 죄에 넘어집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전적 무능을 인정하지 않아 성령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지만, 회개의 열매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맺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데는 더욱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잘 해보려고 자기 힘이 다시 들어가면 또 넘어집니다. 여러분, 수영을 배울 때 코치가 무엇을 강조합니까? “힘을 빼세요!” 합니다. 힘을 빼면 물에 빠져죽을 것 같아 온 몸에 힘을 주고 어찌하던지 물에 안 빠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빠집니다. 힘을 빼고 물의 부력에 몸을 맡기면 빠지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배울 때도 그렇습니다. 중심이 흔들리면 기를 쓰고 반대쪽으로 몸을 트는데 그러면 넘어집니다. 자전거의 움직이는 방향으로 몸을 맡기고 페달을 밟으면 안 넘어지고 앞으로 갑니다. 성령에 의해 사는 것은 전폭적으로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주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셨던지 그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보였습니다.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에게 버림받고 능욕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밤 새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이를 행할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먼지와 티끌과 같은 우리 인간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권능을 덧입기 위해 얼마나 기도에 매달려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눅11:13절에서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 충만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간절한 갈망 가운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열흘 간 간절히 회개하며 기도했을 때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넷째, 성령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섬세하게 살피며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일하십니다. 이스라엘에 요셉과 마리아 선교사 한 가정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대사관에서 일하고 한 사람은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이스라엘 대학생들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를 합니다. 히브리어 메시지를 정성껏 준비해서 첫 번째 바이블 미팅을 열었는데 오겠다던 양들마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께서 일하심을 믿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목자요 성경선생으로 불러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과 히브리어 메신저로 세우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로 가슴에 설렜습니다. 이런 마음을 주신 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깨닫고 계속 감사하고 기도했습니다. 설렘으로 두 번째 미팅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양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했습니다. 기도와 설렘으로 세 번째 미팅을 준비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양들이 참석하여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떤 양은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말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일하십니다. 양이 안 온다고, 일대일 하던 양이 굿바이를 선언했다고 성령님이 일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이 돌아가셨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안달을 하고 절망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령님을 쉽게 판단해버리고 불신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를 그르칩니다. 섬세하게 성령의 하시는 일을 살피고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II. 성령을 따라 행하면 어떤 결과가 있는가(22-26)
첫째, 육체의 일들 대신에 성령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22,23절을 봅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앞의 육체의 일들은 복수형을 써서 ‘행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단수를 썼습니다. 이는 사람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해 맺으시는 열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열매들은 그리스도의 성품들입니다. 이 열매들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범주는 내적이고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입니다.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이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를 드러내셨습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이고 변함없고 희생적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이 사랑의 열매가 맺혀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희락입니다. 이는 환경과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원망하거나 슬픈 생각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에 거룩한 기쁨이 충만하여 절로 찬송이 나왔습니다. 성령님께서 맺어주시는 이 기쁨은 참된 기쁨이요 온전한 기쁨입니다. 다음에는 화평입니다. 이는 역경 속에서도 지속되는 내적인 고요함과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에 대한 신뢰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의 내면과 삶에 이 화평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피스 메이커가 됩니다.
둘째 범주는 이웃들과의 관계와 관련된 세 가지 덕목의 멸매입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오래 참음은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인내하며 용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목자로서 생명의 열매를 맺으려면 정말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고 양육함으로 어머니가 되듯이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기 위해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양을 어렵게 피싱하고 일대일을 하다가 양이 낑낑거리고 반발하고 속을 썩일 때 우리가 끝까지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그 양은 즉시 토끼같이 달아나 버립니다. 우리가 오래 참는 목자가 되려면 매 순간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을 따르는 데 힘써야 합니다. 다음으로 자비입니다. 이는 관용과 너그러움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 개성이 다릅니다. 자기 기준이나 취향에 맞는 양을 잘 영접할 수 있으나 취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면 영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 관용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다음은 양선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그럴 자격이 없다 해도 선을 행하며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또한 악에 대응하지 않고 그것을 용납하며 긍정적인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셋째 범주는 성도의 삶에 안내자가 되어야 하는 세 가지 열매들입니다. 그것은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충성은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이 한결같은 것입니다. 온유는 겸손하고 타인에 대해 동정심이 있으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죄악 된 욕망에 대한 통제력입니다. 이런 충성과 온유와 절제도 인간이 가진 자연인의 것으로는 곧 한계가 드러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을 따라 살 때, 성령께서 열매로 맺으시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온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사람은 율법을 훨씬 더 잘 성취합니다.
둘째, 성령의 권능을 덧입게 됩니다. 행1: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권능을 받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을 때 사람이 변화되고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과 지혜를 얻습니다. 스케일과 비전을 갖게 됩니다. 복음서의 제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너무나 다른 두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동일한 인물들이고,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정확히 50일입니다. 복음서의 제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전혀 딴 세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큰 소리를 잘 쳤습니다. “내가 죽는 데까지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죽기를 각오하였노라!” 이를 꽉 물고 각오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제사장들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다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소심하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민족 문제에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얼굴을 폈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야! 이자가!” 하며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다투기를 잘 했습니다. 얼마나 세상 것들을 사랑했어요? 이기적이었어요? 무엇보다도 무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셨지만 기도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하려고 시도를 하지만 기도보다는 잠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 전도여행을 보내실 때 성령을 주심으로 권능을 행한 때도 있었습니다. 한 번뿐입니다. 일시적이었습니다. 복음 전파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혈과 육은 살아 있었으나, 가슴에서 타오르는 하나님의 열정은 없었습니다. 비전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 날에 한 자리 하고자 하는 야심은 있었으나 하나님의 비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 판결한 공회에 붙들려갔을 때 공회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과 너희 말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정복했습니다. 대범해졌습니다. 스케일이 커졌습니다. “주여,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입니까?” 이게 아니라, 이제는 그들의 가슴속에 “천하 만국”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세계 만민의 구원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가장 가까운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고, 동역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기도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전파를 통한 열매가 많이 맺혔습니다. 현실의 난관과 어떤 장애물들도 뛰어 넘는 믿음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이 다 비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비전이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타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온 천하를 누비면서 복음을 전했고,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1세기 구속사의 주역들로 쓰셨습니다. 문제는 그 전환의 사건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오순절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말씀의 종들은 기도 가운데 성령님의 조명과 도움을 받아 메시지를 써야 합니다. 완벽하게 작성된 메시지라도 이를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메신저들은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많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말씀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일대일 성경공부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된 노트를 가졌다 해도 그 노트가 일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일하셔야만 사람의 마음에 말씀이 심겨지고 회개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일대일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기도로 성령님의 역사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렇듯 매사에 우리가 성령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24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완료형입니다. 우리는 먼저 옛 자아가 죽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25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모든 성도들은 성령 때문에 살아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나란히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26절에서 책망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을 구하면 서로 노엽게 하게 됩니다. 서로 시기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멈추라고 합니다.
결론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성령을 통해 새 사람으로 살아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이는 명령입니다. 성령에 의해 사는 것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길입니다. 권능을 갖는 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성령의 열매 맺는 길입니다. 신자로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성숙해 지는 길입니다. 생명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을 의식하고, 오직 성령에 의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아멘!
금지할 법이 없는 성령의 열배들
요절/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지난 강의에서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열매들 중 앞의 세 가지, 즉 사랑, 희락, 화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넷째 열매부터 아홉째 열매들은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오늘은 이 열매들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넷째 열매 : 오래 참음(patience, longsuffering)
성령님이 맺으시는 넷째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인내를 말합니다. 인내란 어떤 가치 있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기꺼이 참고 견디고 지속하는 것입니다. 인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튜미아’는 ‘긴’ ‘느린’의 뜻의 ‘마크로스’와 ‘노여움’의 뜻의 ‘튜미아’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어원적인 의미로는, 인내란 화내는 것을 늦추는 능력입니다.
신자들도 까다로운 사람이나 어려운 상황들을 만납니다. 참기 힘든 일들도 만납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일들은 인내라는 덕목을 키워주기 위해 변장을 하고 찾아오는 기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만나는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도리어 자녀들의 성품이 성화를 향해 빚어지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하십니다.
롬 5:3-5절은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 ‘연단’은 본래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품’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성품은 온전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품을 성화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되는 소망을 이룹니다.
약 1:12절을 보십시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 5:11절은 말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이시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 어려운 문제들이 있고, 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신자들에게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문제들과 시련은 성도들에게 고난이 학교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능성이 꽃피고 절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고난의 학교에 들어가 인내와 끈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도 잘 참는 성품을 타고 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내는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그 내면에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실 때, 그는 어떤 고난도 참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나 한국의 초대교회 시대에 무수한 조상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름다운 순교자들의 오래 참음은 곧 성령님께서 맺으신 열매들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래 참음의 열매 맺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조그만 일에도 분을 내게 만들고, 못 참도록 충동질을 합니다. 이러한 사탄의 충동질에 패하여 어려운 일을 끝까지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한다면 성령님은 무척 슬퍼하실 것입니다. 못 참고 못 견뎌 분을 내고 미워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성령님은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사탄의 충동질에 말려들거나 패배하게 되지 않도록 기도 가운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 순간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인내의 열매를 맺으며, 주님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섯째 열매 : 자비(kindness)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다섯 번째 열매는 자비입니다. 자비는 친절을 말합니다. 이 친절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열매로서의 친절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친절은 상대방이 어떻게 나를 대하느냐에 따라 반응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그의 자녀들의 내면과 삶에 친절의 열매를 맺으심으로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반응하지 않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충만한 상태라면 신자는 친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때때로 친절을 잃어버립니까? 사탄이 이기심과 자기중심성과 무관심의 죄를 충동질하여 성령의 열매를 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점점 불친절해저 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타락한 우리의 본성 속에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성대로 살게 되면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사람을 불친절하게 대하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본성대로 행동하도록 틈만 나면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지배를 받음으로 본성을 따라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본성을 자극해 상대방을 불친절하고 쌀쌀맞게 대하게 만드는 사탄과 싸워 이김으로 친절의 열매를 지켜야 합니다. 때로는 사탄이 상대방의 거친 말과 행동을 이용해 우리의 친절의 열매를 골아 떨어지게 만듭니다. 사탄에게 분노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눅 6:36절에서 명령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예수님은 자기의 친절을 받을 만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친절에 감사하지도 않고 친절을 인정해주지도 않는 사람들에게도 친절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친절의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에게도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친절하게 말 한 마디를 건네는 것, 친절하게 짧은 편지를 쓰는 것, 친절하게 손을 잡아주는 것의 힘은 매우 큽니다. 젊은이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연장자들을 배려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고, 강자와 약자에게 모두 관용을 베푸는 것, 여기에 강함이 있습니다. 특히 절망의 구렁텅이와 불행의 골짜기와 슬픔의 고통의 길에서 방황하며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 친절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과 행동으로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여섯째 열매 : 양선(goodness)
성령님이 맺으시는 여섯 번째 열매는 양선입니다. 양선은 선하게 되는 것, 또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눅 18:1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선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선’(good)이라는 단어는 ‘하나님’(God)에서 나왔습니다. ‘안녕히’(Good-bye)라는 인사말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God be with you)의 줄인 말입니다. ‘선한’(good)이라는 말은 문자 적으로는 “하나님처럼 되다”입니다.
선한 일은 옳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완전하신 분이 눅 6:4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예수님에 의하면 선은 지식의 문제도 행위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문제요, 바로 우리의 본질의 문제인 것입니다. 선은 머리의 문제도 아니요, 손의 문제도 아닙니다. 선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지배하시면 우리의 본질이 변화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계셔서 우리를 주장하시면 우리는 선하게 되고, 선한 말을 하게 됩니다. 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경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격적이고 고결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령님의 충만으로만 가능합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선함보다는 일시적인 유익과 쾌락을 좇으라고 속삭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도록 부추깁니다. 옳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도록 조종합니다. 그리하여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선함의 열매를 소멸케 만듭니다. 사탄에게 넘어가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매 순간 회개하고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사탄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성령님이 맺으시는 선함을 좇아 선한 사람이 되고, 선을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일곱째 열매 : 충성(faithfulness)
성령님이 맺으시는 일곱 번째 열매는 충성입니다. 충성은 첫째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전 9:10a절은 말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또한 딤전 4:15절은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영적인 싸움, 곧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가리킵니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 기도하는 것,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그의 자녀들이 충성된 일꾼이 되라고 하십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은사와 능력을 100% 발휘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요, 성령을 소멸시키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최선을 다해서 사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계 2:10b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충성은 둘째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나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나 보지 않을 때에나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이 있을 때나 유익이 없을 때나 한결같은 것입니다. 딤후 2:2절은 말합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타락한 본성대로의 우리 마음은 쉽게, 그리고 자주 변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을 받음으로 성령님이 충성의 열매를 맺으실 때, 우리는 변함이 없는 충성된 자가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한결같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충성은 하나님의 속성의 한 부분이십니다. 계 1:8절은 말합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히 13:8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우리는 우리의 물질에 충성되어야 합니다. 돈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아니면 그 중 얼마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쌓으려고만 하는가? 다른 사람과 나누는가? 이것은 충성의 문제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에 충성되어야 합니다. 시간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이것도 충성의 문제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사와 재능에 대해 충성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좇는데 있어서 한결같은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가 나고 고난이 닥쳐도 변함 없이 한결 같은가? 현재의 유익을 따라서, 혹은 고난을 피하여 타협하지는 않는가? 질문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일이든, 드러나지 않는 일이든, 어떤 일이든지 이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가? 아니면 사람 앞에서 행하는가 질문해야 합니다.
타고난 성품이 비교적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계적입니다. 성령님이께서 충만으로 임재하셔서 충성의 열매를 맺으실 때, 진실로 충성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에게 큰 일도 맡기셨습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눈가림만 하면서 대충하라고 속삭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며 안일하게 살도록 부추깁니다. 사탄은 우리가 충성의 열매를 맺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탄에게 당하지 않도록 깨어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충성의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누리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덟째 열매 : 온유(gentleness)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여덟째 열매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첫째로 부드러움입니다. 성품이 본래 부드러운 사람이 있으나 이런 사람도 자기를 모함하거나 사납게 대적하는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부드러움의 열매를 맺으실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부드러움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닙니다. 부드러움은 진짜 강한 것입니다.
온유는 둘째로 따뜻함입니다. 따뜻함도 마찬가집니다. 성품이 비교적 따뜻한 사람이 있으나 자기를 해치려 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이 충만으로 임재하셔서 따뜻함의 열매를 맺으실 때, 우리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는 셋째로 겸손을 말합니다. 본래 겸손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존심이 있고 높아지고자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인류의 조상 아담을 유혹하여 넘어뜨린 것이 무엇입니까? 교만에 빠뜨린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하셨습니다. 하늘의 보좌와 특권을 버리고 자기를 비워 종이 되셨습니다. 온갖 죄로 추하고 병든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으로 임재하여 온유의 열매를 맺으실 때, 우리는 겸손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강한 자입니다.
부드러움, 따뜻함, 겸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요 성령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마 11: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과 삶에서 온유의 열매를 맺으십니다. 모세는 혈기가 많고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의 미디안 광야의 양치는 훈련을 통해서 자아가 깨어지고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았을 때.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사탄의 본성 중 하나가 교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이런 사탄은 우리 신자들의 내면에 틈타고 들어와 성령님을 소멸시키고,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훼방합니다. 여덟째 열매를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고, 사납고 거칠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항상 성령님의 충만을 받고, 성령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온유의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마 5: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아홉째 열매 : 절제(self-control)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조절하는 힘입니다. 본성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절제하지 못합니다. 절제는 중요한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는 충동을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절제는 해야할 말은 하고, 해서는 안될 말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해야할 행동은 하고, 해서는 안될 행동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절제하지 못함으로 이 세상에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마약, 알콜 중독, 미성년자들의 성폭행, 음란물, 어른들의 사기, 정치인들의 쌈박질, 과소비, 도박,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회문제들이 날마다 일어납니까?
적을 정복한 사람보다 자기 욕망을 정복한 사람이 더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절제는 인생의 게임에서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승리할 것이요,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패배할 것입니다.
승리자는 시간을 관리합니다. 시간 사용훈련이나 시간에 대한 청지기 정신이 중요한 것은 시간관리가 곧 자기 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승리자는 자기의 혀를 관리합니다. 승리자는 화를 낼만한 상황에서 참을 수 있고, 불쾌한 상황에서 친절할 수 있고, 자기를 높일 수 있는 상황에서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탄은 참지 못하게 만들고, 방종하게 만듭니다. 화를 내게 만듭니다. 자기 욕망을 좇아 행동하도록 충동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본성과 욕망을 자극하고 충동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령님이 맺으시는 열매 아홉 가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것들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친절), 양선(선), 충성, 온유, 절제들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열매를 맺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며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풍성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은 자가 됩니다. 그만큼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복 덩이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탄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소멸시키고 열매를 소멸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나의 삶에서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시게 하려면, 사단과의 싸움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매 순간 회개하고 성령님의 충만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으로 사탄을 물리쳐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님 안에 거하기 위한 투쟁, 성령님의 충만을 받기 위한 영적 싸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님의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앞선 강의에서 다루었습니다. 요 15:5절은 말합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엡 5:18절은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성령 하나님께 붙잡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을 중심에 충만하게 모시고, 내가 성령님 안에 거하기를 힘씁시다. 또한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거하심으로 나를 통해 아름다운 성령님의 아홉 가지 열매들을 풍성히 맺으시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히 비워드립시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간구하오니 성령 하나님을 제 안에 충만하게 보내어주소서. 제 위에 충만하게 내려주소서. 제 곁에 충만하게 임하게 하소서. 성령 하나님께서 저를 사로잡게 하소서. 저를 주관하게 하소서. 제가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께 복종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 맺으시는 열매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나타나게 하소서. 아멘!
(간증) 25년전에 처음 목사 사명을 받는 후에 주님께서 사도 바울과 같이 고후12장1절에 나오는 삼층 천를 한번 보여 주셨다. 철야 기도하는데 나의 영이 육에서 빠져 하늘나라 보좌를 잠깐 보여주셨다. 즉 생명수강 옆에 열매 맺은 과일과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뒤에 무지개를 보여주셨고 그리고 에스겔서 책을 보여주시면 에스겔 사명을 주셨다. 목사안수 받은날 소직이 무릎 끊고 있는데 주께서 "약콘(성경, 권능)같은 것을 주는데 소직이 "이것은 여러 수십억짜리"라면서 받는 것을 그림 한장으로 보여 주셨다. 즉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 통달의 은사를 주셨다. 그 은사로 통해서 하나님나라 확장하는데 파수꾼으로 쓰임 받게 하셨다. 주님께서 태백에 있는 예수원(토레이 목사) 같이 성령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해라는 그림 한장을 보여 주시여 성령원이라는 간판을 달게 되었다.(계4;2-3.겔1:27-28) 성령이 역사 하는 교회 김 에스겔목사.(2019.11.23.)
(간증: 20년전에 대구시 달서구 대곡동 소재 남부교회 부교역자로서 시무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보내오 주어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사역을 하였다. 그 때 당시 화원에 권창수 목사님의 장모 되시는 분이 골다공증으로 다리뼈가 썩어가는 통증이 있어 치유 안수하였다. 즉 백부장과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헌금(1만원)드리고 소직이 안수 기도를 하였다. 그날 꿈에 주님께서 치유가 되는 그림 한 장을 보여주셨다. 즉 벼 모판에 심어진 새싹들이 피어나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골다공증으로 썩어가는 뼈가 새 싹같이 새 생명을 얻어 치료가 되는 그림을 보여주셨다.
또한 경북 청도에 있는 순복음 수양관 담임목사님이 암병수술후 재발의 증세로 어려운 가운데 있는데 금요일 성령집회하면서 부르짖는 능력의 감람유 기도회를 2-3시간하면서 치유기도한바 주님께서 치유가 되는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청도의 큰 황소가 그 목사님 속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황소와 같은 마귀가 들어와 암병을 오게 했고 고집과 아집으로 목회 한것을 회개하니까 마귀가 나갈 때와 암병의 완전히 치유되는 현상을 보여주셨다. 그 후 완전히 치료가 되었고. 그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배드리고 치료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보혈 찬송가 202장(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부르고 통성기도와 예수이름으로 치료가 되었다. 지금도 마귀에 잡힌자 들이 축귀 현상등으로 치유가 되어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롬14;17. 성령수도원 김 에스겔(김 종표목사) 목사.2020.1.1. 전화 010 – 2215-7127 )
(간증: 우한 코로나 전염병 대해 주님의 성령께서 증세와 죽음에 대하여 그림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모세시대 애굽의 마지막재양이 유월절 어린양피를 인방과 무설주에 발랐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죽음의사자 재양이 넘어가는 유월절 현상을 그림 한장으로 보여주셨다. 즉 “사람의 폐가 검정색으로 변하여 호흡이 중지” 되어 죽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렇나 예수를 믿고 거듭난자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재양이 넘어가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예수이름으로 죽음의 마귀의 세력이 넘어(유월)간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 어떤 성도가 얼굴이 검정색으로 변하여 독감에 걸려 심히 어려움가운데 있는데 안수기도하면서 예수이름으로 명령하였는데 “그 성도 입에서 나는 독감마귀이다 성령의불이 들어와 떠거워 못 살겠다고 하면서 무저갱으로 들어 간다”하면 빠져 나가는 현상을 보여주셨다. 즉 예수이름으로 명령하면 성령의 역사의 능력으로 독감의 죽음의 사자는 넘어갑니다. 출12:21-28. 성령수도원 김 에스겔 목사.2020.1.29.)
(간증:우한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가 불안하고 있다. 즉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것을 가르쳐준다. 2020,2.2. 주님께서 이 재양에 대하여 꿈에 그림한장 보여주셨다. 즉 한 도시에 홍수가 나서 도시를 삼킬정도의황토물이 다리를 넘쳐 흘러가는데 경찰(파수꾼. 두 증인 사역)들이 나타나 경계를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지금이 이처럼 나타나는 마지막 때의 재양의 징조인 것 같다.
그렇나 창조주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음사자들이 애굽의 장자를 멸할 때에 어린양의 피를 안방과 문설주에 받으면 죽음의재양이 넘어가는(유월)것 비결을 가르쳐주셨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요한계시록7장 3절에 예수님께서는 여섯째 인을 떼실때에 온 지구가 온역과 큰 지진이 날때에 “이마에 인 맞은 자를 해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것은 주님의백성이라는 것과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한 코로나로 인하여 온 세계가 불안하다, 예수 믿고 거듭난자, 주님의 백성들은 임마누엘로 보호해주신다는 성경적인 진리를 믿어야한다. 즉 하나님의 종말의 시간표가 어디쯤 왔는가를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부 단장를 해야 합니다. 이번 우한 폐염, 전염병의 기간이 장기전으로 여러곳에 펴진다는 것을 그림 한장 보여주셨다. 즉 주께서 상징적으로 남한 지도를 보여주시면서 공원 의자 위에 컵 라면을 먹고 난후에 다 먹지 않고 남은 찌끗이들이 부패된 악취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펴지는 그림을 보여주셨다.즉 성경적으로 적용한다면 다웟이 교만하여 자아실현(국가 지도자들의 청홍색말 꼼수의 독재 및 대형교회의 세습과세속로 자기우상화)으로 인구조사하여 하나님께 전염병으로 징계를 받는 사실이있다. 다웟이 회개한후 전염병이 멈추었다. (다윗의 교만 사무엘하 24장은 1-9절까지의 인구조사와 10-17절에서는 다윗에 대한 형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성령수도원 김 에스겔 목사.2020.2.2.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