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60) 끝.
다부동전투·평양탈환작전 참전한 서종구 옹
입력 2023. 11. 27 16:49
업데이트 2023. 11. 27 16:57
선두에 선 백선엽 장군 지휘 모습에 두려움 이겨내
파상공세 끝 평양 함락 태극기 보며 만감 교차
참혹했던 전투 현장 평화는 쉽게 못 얻어
1948년 국군1사단서 군 생활
“북한군 남침, 전 병력 38선 이동”
기습당한 국군, 북 공세에 계속 후퇴
한강 다리 폭파할 수밖에 없어
최대 격전 다부동전투
치열한 백병전 끝 북한군 저지
발목 관통상 입었지만
어떤 공격도 막아낼 자신감 생겨
전장 복귀 후 평양탈환작전 참가
상상 초월하는 저항 뚫고 전공 올려
전우 잃은 슬픔·승리 기쁨 교차
참전용사 위해 세심한 배려 필요
우리가 바라는 건 한 가지
“희생을 잊지 말아 주세요”
6·25전쟁 참전용사 서종구 옹이 부산 동구 보훈회관에서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쓰러져 가는 전우들. 그래도 지켜야 하는 내 조국. 다부동전투와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한 서종구(94) 옹은 그때의 기억을 잊고 싶어도 쉽게 잊을 수 없다고 털어놨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의 마지막 주인공인 서옹은 참혹했던 전투 현장을 전하면서 “평화는 쉽게 얻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서옹을 부산 동구 보훈회관에서 만나 그가 겪은 시간을 듣고 왔다. 글=박상원/사진=김병문 기자
70년이 흘러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들
대구 출신인 서옹은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가족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는 이유로 6·25전쟁이 발생하기 전인 1948년 군에 입대했다. 국군1사단 15연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서옹은 상급부대의 비상소집을 받고 전쟁터로 향했다.
“중대장이 ‘북한군이 쳐들어와 전 병력이 38선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병력 대부분이 농촌 일을 돕기 위해 휴가를 떠난 데다 휴일이라서 당직자만 부대에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늦은 밤 춘천에 도착한 서옹은 전쟁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포탄 소리로 귀는 먹먹하고, 동서남북조차 파악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죠.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북한군은 남침을 위해 칼을 갈고 있었기 때문에 기습당한 국군이 방어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서옹의 설명. 그런데도 어린 나이의 그는 그저 맡은 임무를 다했다.
“전우들과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흐르는 냇물을 마시며 전투에 임했습니다. 갈아입을 군복이 없을뿐더러 피 냄새 나는 속옷은 벗지도 못한 채 다시 전투에 임했습니다. 밤이 되면 근처 야산 소나무에 기대 ?아 쪽잠을 잤습니다. 그래도 우리 부대는 오로지 조국을 위해 전투에 임해야 했죠.”
하지만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계속 후퇴한 서옹과 부대원들은 서울 한강까지 도달했다.
“어느새 북한군이 전차부대를 앞세워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입했습니다. 결국 한강 다리를 폭파할 수밖에 없었죠.”
서옹은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가용 수단을 총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회상했다.
“제가 인솔했던 분대가 북한군 전차 위에 올라가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넣었습니다. 잠시 북한군의 기동이 멈췄지만 얼마 가지는 못했죠.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서옹이 관통상 당한 상처 부위를 보여 주고 있다.
국군에 자신감 가져다준 다부동전투
서옹은 6·25전쟁 최대 격전으로 불리는 다부동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는 다부동전투를 “지휘관의 중요성을 알게 된 전투”라고 평가했다.
다부동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30일까지 고(故) 백선엽 장군이 이끈 국군1사단이 미 제27연대와 함께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한 전투다.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전 낙동강을 건너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선 다부동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야간 역습을 감행했습니다. 새벽까지 진행된 전투에서 북한군의 대부분 전력이 손실됐습니다. 반면 우리는 다부동의 주요 능선을 탈취했죠. 치열한 백병전 끝에 북한군이 결국 후퇴를 결정했습니다.”
서옹은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이 선두에 서서 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추억했다.
“다부동전투에서 승리한 뒤 북한군이 더 이상 대구를 점령하기는 쉽지 않겠다고 느꼈습니다. 이후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전투 과정에서 서옹은 발목에 관통상을 입어 부산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됐다. 아직 그 흉터는 서옹 몸에 깊게 새겨져 있다. 그래도 그는 괜찮다며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6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호텔을 개조해 만든 임시 병원이었는데, 엄청난 인파가 계속 몰렸습니다. 처음 3개월은 걷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빨리 전장으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서옹의 국가유공자 배지(왼쪽)와 보통상이기장.
서옹이 가지고 있는 호국영웅기장.
태극기 게양으로, 자존심과 명예 회복
그의 간절한 바람이 놀라운 회복력으로 이어졌을까? 서옹은 부상을 입은 지 6개월 만인 1950년 9월 17일 다시 부대로 돌아왔다. 그는 옛 전우들과 인사할 틈도 없이 곧바로 평양탈환작전에 투입됐다.
“우리 부대는 반격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에 성공해 승기를 잡은 상황이기 때문이었죠. 병력이 부족해 학도병부터 시작해 군에 입대하지 않은 남성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주요 병력이 큰 타격을 입은 북한군은 평양을 지켜낼 수단이 없었다. 평양과 원산항을 제외한 기타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그리고 서옹이 속한 1사단이 평양탈환작전 조공부대(주요 공격부대의 성공을 돕기 위한 보조 공격을 실시하는 부대)로 선정됐다.
“10월 18일 밤이었죠. 북한군도 쫓기고는 있었지만, 평양만은 내줄 수 없었는지 저항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도로 사이사이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지뢰를 촘촘히 매설해 우리 군의 피해도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이 파상공세를 퍼부으며 평양을 함락했다. 이 과정에서 1사단은 퇴각하는 북한군 1사단과 수도방위사단을 포위, 섬멸해 큰 전공을 올렸다.
“10월 19일 평양을 함락한 뒤 김일성 대학에 태극기가 게양된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사한 전우들을 잃은 슬픔과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기쁨이 교차했죠.”
전우를 회상하며 경례하는 서옹.
“후손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
서옹은 1950년 10월 이등상사로 명예롭게 전역했다. 그리고 지금은 6·25참전유공자회 부산 서구지회장으로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돕겠다는 신념 때문이다.
“국가에서 참전용사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조금 더 세심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영웅의 제복’도 하계용이라 겨울에는 입기 힘들어요.”
끝으로 서옹은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국민들이 알아줬으면 한다는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참전용사들은 지난날의 경험과 희생, 민족의 얼을 후세에게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건 한 가지뿐입니다. 저희의 희생을 잊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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