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당 잡힌 몸
박서정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인지 살아지는 것인지 한번 씩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지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 보내는 것 같다.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뜨고 어둠이 무르익을 때쯤 그 날을 마감하는 사소한 일들이 무의미해지면서도 다들 살아가는 모습이라 생각하고 안도를 하게 된다.
삼십 대만 해도 또래 집단의 만남에서 화두는 아이 자라는 이야기, 남편 흉보기, 시댁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는데 요즘 우리 사십대는 만나면 건강이야기로 모든 지식과 상식을 쏟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어제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연사해 주위를 놀라게 한 일, 몸이 조금 이상해서 병원에 갔는데 암 선고를 받고 수술한 일 등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주고 받는 말들은 무거운 하루를 더 무겁게 만들기만 한다.
지금 우리 부모 세대는 어려운 시대를 거쳐서인지 웬만한 일들을 견디는 힘들이 강해 몸과 정신이 대체로 건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수하는 동네가 많이 생기기도 하고, 부지런한 모습을 잃지 않고 노후를 보내며, 토속적인 음식들을 선호하며, 우리 세대들보다 모든 면에서 강인하고 좋아 보인다.
나 같은 경우엔 병원을 나의 구세주라 생각하기보다 되도록 가지말자주의였다. 무슨 사형선고를 받을지 모르는 곳이라 생각하고 웬만해선 가지 않는 곳이 돼 버렸다. 의료보험공단에서 건강 검진하라고 안내문이 몇 차례 나왔지만 계속 그냥 지나쳐왔다. 하지만 나도 나약한 사람인지라 몸 상태가 괜찮을 땐 안 가기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막상 어느 한 곳이 아프면 이렇게 늦장을 부려서 더 큰 병을 키우는 것은 아닌가 하고 살며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왼쪽 아래 배가 아파서 힘들었다.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힘줄이 늘어났는지도 모른다는 자가 진단으로 집에서 간단한 처치를 해 보았다. 하지만 나을 기미도 없을 뿐더러 아파서 오른 쪽으로만 눕다보니, 목 쪽에 무리가 갔는지 움직일 때마다 목까지 당기기를 계속했다. 혼자서 민간요법을 다 동원해도 차도가 없어 큰 마음 먹고 병원을 찾았다. 환자들이 참 많았다. 링거를 꽂고 병원 주변을 도는 사람 깁스를 하고 절룩거리는 사람, 목을 고정하고 온몸을 돌려 시선을 맞추는 사람, 난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내 몸을 분석해 보았다. 아마 대장에 용종이 생겼거나 암일 수도 있을 거야. 아니면 자궁에 염증이 생겨 아픈 걸 거야. 그것도 아니면 아주 작은 신체 부분이 탈이 난 걸 거야. 난 앉아서 잠시도 내 몸을 편안히 두지 않고 괴롭혔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허무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아픈 거만 생각하고 몸에 열나는 것은 못 느꼈는데 열도 꽤 많이 난다고 하셨다. 신장염이라는 병이 나를 침범한 것이다. 난 콩팥이 어디 있는지조차도 관심이 없었는데 위치를 확인하고 계속 엉뚱한 곳을 의심했던 게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많이 심하다는 의사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조금씩 아파왔던 게 꽤 오래 됐다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 몸을 소홀히 대했던 게 어쩌면 병을 더 악화시켜서 치유기간도 길어졌고 고통도 커졌다는 걸 뒤늦게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지인은 치통이 심해서 병원에서 치료하는 중에 귀찮다는 생각과 아픔 때문에 그냥 영원히 잠을 자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참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라고 못마땅해 했는데 약을 먹고 열과 함께 통증이 수반되고 잠을 못 이루자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오르며 고통은 정말 사람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는 기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식욕이 감퇴되어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지만 약을 먹기 위해선 억지로 먹어야 했기에 기분이 정말 낯설고 싫었다. 맛있게 먹었던 고구마의 맛도 못 느끼고, 김치의 맵사한 맛도 모른 체 입으로 받아 넘기는 것이 곤욕스러웠다. 어떤 진수성찬도 입맛을 찾아주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복부의 통증이 느껴져 내 손을 기다리는 일들이 모두 휴식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마음만은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겼지만 몸은 여전히 누워서 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내 몸이 고장이 나니 그동안 흘러들었던 말들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가며 뇌리를 스친다.
얼마 전에 위암 수술을 받은 사람이 치료 중에 너무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병실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프지 않아서 그 고통을 몰랐기에 건성으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반문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그 고통에 비하면 내 아픔은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겠지만 사람은 이런 저런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살다가 영원한 안식처로 가는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삶은 병마와 맞딱드릴 수밖에 없는 동반자가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듯이 비슷한 처지가 되어야 그 사람을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매사에 의욕이 넘쳐 물러섬을 몰랐던 내가 해야 될 일을 자꾸 미루게 되고 몸이 아파서 못하겠다는 말을 자꾸 사용하게 된다.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벌떡 일어나서 배를 채워줬는데 지금은 시켜먹으라는 말들이 자꾸 튀어나온다. 현관까지 나가서 학교 잘 갔다 오라고 배웅도 했는데 침대에 누운 채로 잘 갔다 오라는 말도 하게 된다. 엄마의 위치를 망각한 체, 병의 노예가 된 내 모습이 몹시도 미워진다. 죽을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귀찮아지고 짜증스러워 뭐든지 대충하게 되었다.
식욕이 회복되지 않아 어떻게 할지 몰라하다가 집 부근에 생긴 맛죽집이 생각이 나서 입맛이 돌 것 같은 죽을 시켜서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입맛을 회복시켜 주지 못했다. 맛있는 과일을 먹으면 입맛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봄의 향기를 담은 산딸기를 사 먹어 보기도 했다. 어릴 때 정말 좋은 군것질거리였던 추억의 맛을 살려 맛있게 먹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씹는 느낌은 얻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입맛이 회복되지 않아 안타깝기만 했다. 내 몸이 왜 이렇게 비싸게 구는 건지 용서가 되지 않고 가족에게 미안했다.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님을 애통해 하기만 했다.
이 아픔이 지나고 나면, 나는 새로운 시선으로 삶을 껴안고 몸에 조금이라도 빨간 불이 켜지면 망설이지 않고 병원의 도움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자가진단으로 민간요법을 적용하다보면 벌써 버스는 떠나고 없을 것이다. 된장, 고추장처럼 묵히지 말고 갓 무친 나물의 고소한 참기름 맛이 남아있을 때 달리기 선수되어 뛰어가리라 다짐해 본다. 병에 저당 잡혀 사는 날이 누군가에게 생길 것인데 저당 잡히는 기간을 줄여야 후회를 하지 않을 것 같다. 아픔 만큼 성숙해진 내 마음은 건강 검진하라는 통지서를 이제 반갑게 받고 싶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박서정 선생님, 수필 당선을 축하 드립니다. 너무 상심 마시고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몸조리 잘 하시고요.^^
이제 걸음마 하는 저의 글을 읽어 주시고 용기 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따뜻한 손 잡아보고 싶습니다. 이민화 선생님 김금희 선생님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몸이 아파 본 후에 말입니다. 그래도 병원은 가기 싫은 곳입니다..ㅎㅎ 수필가 박서정님 당선 축하 드려요. 마음의 글 기대하겠습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동안 이름에 대한 열등감으로 고민이 많았는데 선생님은 영예로운 이름을 가져 행복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삶이 묻어나는 글, 함께 공감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이 아프셨군요 제가 알았다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이얀 쌀밥을 수북히 들고 달려갔을 텐데요...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수필로 당선이 되셨군요 축하드려요 아름다운 이름으로 개명하시고 좋은일이 많이 생기길 바랄께요....^^
정이 묻어나는 얼굴 만큼이나 정다운 마음을 전해 주어 감동입니다. 연암동을 허락도 없이 떠나서 미움이 존재했는데 이 순간부터 미움을 없애겠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관심 가져 주시고 힘을 실어 준 점 오랫동안 기억할게요. 권오정 선생님
저당 잡힌 몸,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김금희 작가님께서 수필에 당선되셨다고 하니 내용은 아직 잘 모르지만 당선을 축하합니다.
귀한 시간 내셔서 부족한 글 읽어 주시니 기쁩니다. 본은 어디신지요? 저는 밀양입니다.
탄탄한 글맵시와 진솔한 이야기에 흠뻑 젖었다 갑니다. 저도 당선 축하드립니다.
처음으로 올린 작품에 좋은 반응 보여 주시고 따뜻한 마음 주시니, 더 열심히 작품활동 하고 싶습니다.
섬세한 이미지 전개로 여린 감성을 잘 다룬 작품, 등단 신작으로 편집할까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작품을 예쁘게 봐 주셔서 많이 기쁩니다. 고칠 부분 있을 때 솔직히 지적해 주시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시는 일이 많으실 텐데 챙겨 주시니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