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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는 한시
詩歌 언어가 유희적 성분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詩歌 예술 위에 신선한 호흡과 생동하는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시인이 문자 유희에만 탐닉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속에서 뜻밖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언어의 발랄한 생기를 일부러 멀리 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국수 한 사발
조선 중기의 학자 金馹孫이 젊어 山寺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가 띄운 편지 한 통이 장인에게 배달되었는데, 편지의 사연이 야릇하였다.
文王沒 武王出 周公周公 召公召公 太公太公
이를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文王이 돌아가시자, 武王이 나오셨네. 周公이여 周公이여! 召公이여 召公이여! 太公이여 太公이여!" 예전 殷나라가 임금 紂의 포학한 통치로 혼란에 빠지자, 제후였던 文王은 어짊으로 백성을 다스려 모든 제후들이 그를 존경하여 따랐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紂의 포학한 정치는 끝날 줄을 몰랐다. 이에 그 아들 武王이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周나라를 세웠다. 이때 武王의 수레를 막고 出兵의 불가함을 막았던 이는 伯夷와 叔齊이다. 이와는 달리 武王을 보필하여 周왕조의 기틀을 다진 세 공신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周公과 召公과 太公이다. 후세는 이 세 사람을 '三公'으로 기려 높였다.
다시 이런 역사 배경을 알고 다시 위의 편지를 읽어 보면, 어진 임금이 어진 임금의 뒤를 잇고, 다시 충직한 신하가 보필하는 아름다운 광경에 대한 찬탄이 된다. 그런데 山寺에서 공부를 잘하고 있던 사위가 뜬금없이 장인에게 보낸 편지치고는 웬지 괴이쩍다. 김일손은 과연 "장인 어른! 저 요즘 이렇게 열심히 중국 역사 공부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편지를 띄웠던가? 그런 것이 아니다. 文王은 이름이 '發'이고 武王의 이름은 '昌'이다. 周公은 이름이 '旦'이고 召公은 '奭'이다. 그리고 太公의 이름은 '望'이다. 이것을 音讀 訓讀 섞어讀을 하게 되면 요렇게 된다.
(신발) 창(昌)이 없어 발(發)이 나왔으니, 아침(旦)마다 저녁(奭=夕)마다 바라고 바랍니다(望).
쉽게 말해 "장인 어른! 신발 한 켤레만."이 위 편지의 진짜 사연이다. 맹랑한 편지를 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윽고 무릎을 친 장인은 두 말 않고 가죽신 두어 켤레를 山寺로 보냈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로원야화기》에도 이와 비슷한 장난시가 실려 있다.
굉장히 추운 漢高祖에게
陶淵明은 오지를 않네.
秦始皇의 아들을 치고자 하나
주머니에 項將軍이 없고나.
大寒漢高祖
陶淵明不來
欲擊始皇子
囊無項將軍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漢高祖 劉邦은 웬 때 아닌 추위에 떨고 있으며, 시대도 다른 陶淵明은 왜 그에게 오질 않는가. 진시황의 아들과 주머니 속의 項將軍은 또 무슨 관련이 있는가? 위 시는 이런 식으로 읽어서는 백 날 골머리를 냣혀 봐도 소용이 없다. 앞서 김일손의 편지를 읽는 것과 꼭 같은 讀法으로 해결해야 한다. 漢高祖의 이름은 '邦'이고 陶淵明의 이름은 '潛'이다. 始皇의 아들은 '扶蘇'이고, 項將軍의 이름은 '羽'이다. 이를 풀어 다시 읽으면 위 시는 이렇게 된다.
대단히 추운 방(邦: 漢高祖)에
잠(潛: 陶淵明)이 오질 않네.
부쇠(扶蘇: 始皇子. 부싯돌을 말함)를 치고자 하나
주머니에 깃(羽: 項將軍)이 없구나.
잠자리가 하도 추워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부시를 꺼내 불이라도 붙여 몸을 녹이고 싶은데 깃이 없으니 불을 붙일 도리가 없다는 타령이다.
김삿갓의 시 속에서도 이런 말장난의 예는 흔히 발견된다.
하늘은 길어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이 늙으니 나비도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에 곱게 피었고
나뭇가지 그림자 반쯤 드리웠는데,
강 가 정자를 가난한 선비 지나다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어졌구나.
달이 옮겨가자 산 그림자 바뀌고
저자에선 利를 구해 사람들 돌아오네.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
菊秀寒沙發
枝影半從地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
月移山影改
通市求利來
김삿갓이 방랑의 길목에서 한 집에 묵어 갈 것을 청하니, 주인은 난처해 하다 천장에 거미집이 어지러운 골방으로 안내하고는 식사라고 내 온 것이 국수 한 사발에 간장 반 종지가 전부였다. 창가에 흘러 드는 달빛을 보다가 바로 앞에 칙간에서 나는 구린내에 코를 막으며 그는 그날 밤 잠을 설치고 말았다.
그러나 위 시를 의미로 읽어 나가면 그저 눈 앞에 보이는 景象을 시간의 전개에 따라 옮겨 적은 것일 뿐이다. 면밀한 독자들은 혹 가다 부자연스런 한 두 글자가 눈에 거슬린다고 느낄 것이다. 원시를 독음만 가지고 읽어 보면 어떻게 되는가 보자.
천장엔 거미집,
화로에선 젓불 내음.
국수 한 사발에
간장 반종지.
강정과 빈 사과,
대추와 복숭아
워리 사냥개,
통시에선 구린내.
시인은 이런 함정을 파 놓고 그럴듯한 포장을 해 놓고 독자들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구전도 있다.
연일 내린 장마비에 풀은 푸른데
국화는 찬 모래에 곱게 피었네.
草綠積雨裏
菊秀寒沙發
초록 저고리를 입은 아가씨가 시장한 길손에게 국수 한 사발을 내 오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독음으로 읽어 보라. 조선 후기 申光洙의 작품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작품도 있다.
네 나이 이제 열 아홉인데
벌써 비파를 갖고 다루네.
빠를젠 빠르고 높고도 낮게
知音에게 알리기 어렵지 않네.
爾年十九齡
乃操持瑟瑟
速速許高低
勿難報知音
문면 그대로 읽으면 열 아홉 난 기생의 능숙한 비파 연주 솜씨를 감탄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원문을 독음으로 읽게 되면 섹스 장면에 대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노골적인 묘사가 되어, 그녀와 하루 밤 농탕한 잠자리를 청하는 농지거리가 되고 만다. 위에 해석해 놓은 것은 독자를 현혹하기 위한 사탕 발림에 불과하다. 장난치고는 고약하리만치 지나치다. 그러나 이런 유의 문자유희가 단지 시덥지 않은 장난질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樂民樓 아래서 백성 눈물 떨어지니
宣化堂 위에 禍가 먼저 당하리라.
함경도 백성들 모두 놀라 도망 가니
趙基榮 집안이 복이 어찌 오래 가리.
樂民樓下落民淚
宣化堂上先禍當
咸鏡道民咸驚逃
趙基榮家祚豈永
함경감사 趙基榮이란 자의 탐학을 풍자 고발했다는 김삿갓의 시이다. 樂民樓와 宣化堂은 실제 함경 감영 안에 있던 樓堂의 이름이다. 시를 독음으로 읽어 보면 각 구의 앞 세 자와 뒤 세 자가 독음이 같음을 알게 된다.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즐거워 한다는 樂民樓에서 정작 백성들은 落淚를 하고 있으니, 敎化를 선양한다는 宣化堂에는 교화는 커녕 재앙 밖에 닥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감사 趙基榮의 토색질은 咸鏡道民이 '咸驚逃' 즉 모두 놀라 달아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각각의 단어 마다에 반어적 의미를 연결시킴으로써 서슬 푸른 풍자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
장님의 단청 구경
고려 때 李穡이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聲名이 천하에 크게 떨쳤다. 그가 한번은 한 절에 이르니 스님이 마중나와 말하기를, "그대가 동방의 文章士로서 중국의 과거에 장원하였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이제 직접 만나 보니 큰 기쁨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떡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니, 스님이 한 구절을 짓기를
僧笑가 적게 오니 스님 웃음도 적네. 僧笑少來僧笑少
라 하였다. 대개 '僧笑'는 떡의 별칭인데, 쟁반에 떡(僧笑)이 조금 밖에 없으니 스님의 웃음(僧笑) 또한 적다고 말한 것이다. 李穡이 갑작스레 대구를 지으려 하였으나 도저히 짝을 맞출 수가 없는지라 사과하며 "뒷날 마땅히 다시 와 알려 드리지요."하고 물러 나왔다. 뒤에 천리 밖을 노니는데, 그곳 주인이 호리병에 무엇인가를 담아 가지고 나왔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 보니 '客談'이라고 하였다. '客談'은 술의 별명이었다. 이색은 환호작약하여
客談이 많이 오니 객의 말도 많아지네. 客談多至客談多
라는 구절을 얻어 전날의 구절에 對를 맞추었다. 반년 뒤에 절에 돌아가 스님에게 말하자, 스님은 크게 감탄하며, "무릇 對句는 정밀함을 귀히 여기니 기일이 늦은 것쯤이야 무슨 상관이리요. 또한 천리를 멀다 않고 와서 알려주니 이 더욱 기이하고 기이한 인연입니다."라 하였다 한다. 한 구절의 시귀를 두고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았던 고인의 미담도 미담이려니와, 雙關의 묘미를 십분 활용한 멋드러진 응수가 절묘하다.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明나라 때 李夢陽이 江西 땅에 提學副使로 있을 때, 자신과 이름이 똑 같은 書生을 만났다. 李夢陽은 다짜고짜 이렇게 읊었다.
藺相如 司馬相如 名相如 實不相如
그 뜻은 戰國時代 趙나라의 대신이었던 藺相如와 西漢의 문장가인 司馬相如는 이름은 서로 같지만(相如), 실지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몽양은 書生에게 네가 나와 비록 이름은 같지만, 두 사람의 相如가 다른 것처럼 실지는 같지 않다고 하여 은근히 스스로에 대한 자부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자 서생이 즉시 대답하였는데,
魏無忌 長孫無忌 彼無忌 此亦無忌
라 하였다. 魏無忌는 信陵君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戰國時代 魏나라의 귀족이고, 長孫無忌는 唐初 大臣의 이름이다. 내용은 魏無忌나 長孫無忌나 저 사람도 꺼리낌이 없었고(無忌), 이 사람 또한 꺼리낌이 없었다는 뜻이다. 書生이 말하려 한 속뜻은 두 無忌는 이름도 같았고 둘다 꺼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는 권면이 된다. 네가 나와 이름이 같다고 해서 나와 같은 줄 알면 큰 오산이라는 식으로 말을 던졌던 李夢陽은 크게 부끄러워 하며 사과하였다. 古人의 이름을 두 가지 뜻으로 雙關하여 대구한 造語가 몹시 교묘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조선시대 權禝이 지은 시에 이런 것이 또 있다.
먼 나그네 산사에 오니
가을 바람에 지팡이 가볍구나.
곧장 절문을 들어서니
사방 벽엔 단청이 환하더라.
遠客來山寺
秋風一杖輕
直入沙門去
丹靑四壁明
가을 산사에 놀러 온 나그네의 절구경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시적 진술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싱겁다. 南龍翼은 《壺谷詩話》에서 위 시를 소개하면서, 권필이 절에서 놀다가 마침 장님이 절구경을 온 것을 보고 희롱 삼아 지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먼 나그네 遠客'는 곧 '눈먼 나그네 盲客'이다. '눈이 멀었다(盲)'를 '먼(遠) 나그네'로 농친 것이다. '멀다'의 동음이어를 활용, '遠'에 이중자의를 부여하였다. 남용익은 그밖의 구절도 시속에서 흔히 쓰는, '장님의 지팡이', '장님 곧장 문에 들어가기', '장님 단청 구경' 등의 말을 조합하여 배열한 것이라고 부연하였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위의 진술이 왜 시답지 않았는가를 깨닫게 된다. 표면적 진술은 풍자 의도를 감추기 위한 糖衣, 즉 사탕발림이다. 표면적 의미에만 집착하는 독자는 이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 이때 표면적 진술과 실질적 의미사이에 의도적인 괴리가 조성되어 있으므로 언어적 아이러니가 발생된다. 독자의 연상능력을 자극하여 시인의 교묘한 말장난을 깨닫도록 유도함으로써 지적 쾌감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역시 권필이 장님을 두고 지은 시에,
백중에 사업을 경영하고
삼척에 생애를 의지하네.
百中經事業
三尺杖生涯
라 하였다. 백중은 음력 칠월 보름이다. 무더운 때 생업에 열중하는 지팡이 짚은 늙은이의 모습을 말하는 듯하나, 위 번역으로는 작가의 진의가 파악되지 않는다. 이것을,
백발백중 점치는 사업을 한다면서
지팡이를 짚고서야 살아간데나.
百中經事業
三尺杖生涯
로 풀이하면, 한 치 앞도 못내다 보는 봉사가 다른 사람의 미래는 백발백중 맞춘답시며 점장이 행세로 떠듬떠듬 지팡이를 짚고 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드러난다. 점치는 행위에 일부러 거창하게 '사업'을 갖다 부쳐, 독자들이 금방 의도를 간파하기 못하도록 우회하였다. '百中'과 '三尺'은 쓰이는 용례의 여러 의미 때문에 처음 독자에게 모호성을 유발 시킨다.
牽牛와 소도둑
앞서 본 여러 예화들은 모두 戱筆에 불과한 것이지만, 언어를 구사하는 재치가 뛰어나고 기지가 반짝인다. 대개 시와 문자유희는 엄격하게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은 유희적 기분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同音詞나 多義詞를 활용한 雙關, 즉 말장난 Pun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접하게 되는 기교인데, 예전 한시에도 이러한 Pun의 예는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애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국 사람들이 쓰는 은어 가운데 기관지염에 걸렸다는 말은 恐妻家라는 의미로 쓰인다. 왜냐하면 '氣管炎'과 '妻管嚴'의 중국 발음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아내의 관리가 至嚴하니 바로 恐妻家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司馬遷의 《史記》 가운데서도 걸작으로 꼽는 것 중의 하나가 〈項羽本紀〉이다. 앞서 본 시에서도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 項羽와 劉邦의 鴻門宴 대목은 긴박과 스릴이 넘치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劉邦의 군대가 먼저 咸陽을 점령하는 凱歌를 올리자, 項羽의 진노는 극에 달하였다. 이에 項伯의 주선으로 劉邦은 겨우 수백 기만을 거느리고 項羽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 아닌 사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咸陽 정벌 이후 劉邦의 야심을 이미 꿰뚫어 본 范增은, 굽신대는 劉邦의 자세에 도취되어 기고만장해 있던 項羽를 향해 자신이 차고 있던 玉唎을 세 번 씩이나 들어 보였다. 項羽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부관 樊睫의 용맹과 기지로 이날 劉邦은 화장실에 가는 체 하고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范增이 '玉唎'을 세 번 씩이나 들어 보인 것은 무슨 뜻이었던가. '唎'은 '決'과 음이 같으므로 어서 決斷을 내려 劉邦을 죽이라고 신호한 것이다. 이날 項羽의 우유부단은 결국 뒷날 四面楚歌의 비극으로 끝맺고 말았다.
또 漢나라의 장수 李陵이 5천의 보병으로 흉노의 본진을 유린하고 돌아오다가 사막 가운데서 흉노의 8만 기병과 장렬히 싸우다가 투항하자, 격노한 漢 武帝는 陵의 어머니와 처자를 族滅하였다. 반면 흉노의 왕은 그의 딸을 李陵의 아내로 주고 右校王을 삼는 등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武帝가 세상을 뜨고 여덟살 난 弗陵이 왕위에 올라 흉노와의 화평 교섭이 재개 되자, 한나라에서는 李陵을 다시 불러 오려고 任立政을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마침내 한나라의 사신을 환영하는 흉노의 연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任立政은 어떻게 해서든지 李陵에게 함께 돌아가자는 뜻을 전하려 하였지만 좀처럼 기회를 만들 수 없었다. 답답하기 그지 없던 그는 다만 李陵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짓을 하며 칼 고리의 環을 만질 수 밖에 없었다. '環'은 '還'과 음이 같으니 함께 '돌아가자'는 뜻을 그렇게 전한 것이다. 그러나 李陵은 대장부가 어찌 두 번 욕을 당할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함께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흉노의 땅에서 비운의 생을 마쳤다.
이렇듯 '唎'로 '決'을 나타내고, '環'으로 '還'을 전달하는 것은 한자의 同音詞를 활용하여 雙關義를 나타낸 예이다. 예전 한시에서는 이러한 雙關義의 활용을 통해 시적 함축을 제고시키는 기법이 널리 활용되어 왔다.
趙瑗의 첩 李氏가 능히 시를 잘 지었다. 마침 시골에 어떤 남자가 소를 훔친 혐의로 관가에 끌려갔다. 답답한 그 아낙이 이웃의 李氏에게 남편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訴狀을 써달라고 부탁하니, 李氏는 그 말미에 이렇게 써 놓았다.
첩의 몸이 織女가 아니옵거늘
낭군이 어찌 牽牛시리요.
妾身非織女
郞豈是牽牛
牽牛는 글자 그대로 풀이 하면 '소를 끌다'가 되니 소를 끌고 간 도둑이 된다. 자신이 織女가 아니니 낭군이 牽牛일 까닭이 없다는 말은, 곧 낭군은 결코 소를 끌고 가지 않았다는 호소가 되는 것이니, 그 언어의 재치가 놀랍고 뛰어나다. 이 시를 본 태수는 기특하게 여겨 그 사람을 바로 풀어 주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인다.
明나라 때 사람 程敏政은 어려 神童으로 소문 나 한림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재상 李賢이 그의 재주를 몹시 아껴 사위로 삼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짐짓 그를 초청하여 대접하고는 상 위에 있던 蓮根을 가리키며 시를 지었다.
연꽃을 인하여 연뿌리를 얻었도다. 因荷而得藕
그러자 程敏政은 식탁 위에 있던 살구를 가리키며
살구가 있으니 梅實은 필요 없네. 有杏不須梅
라고 댓구하였다. 겉으로 보면 상 위의 음식을 놓고 한 마디씩 덕담을 주고 받은 것이지만, 속으로는 '나는 너를 사위로 삼고 싶다'고 한 말에 '영광입니다'라고 대답한 내막이다. 왜 그런고 하니, 李賢이 던진 '因荷而得藕'는 '因何而得偶'와 雙關되어 "어디에서 짝을 얻으려는가?"라는 질문이 되고, 程敏政의 '有杏不須梅'는 '有幸不須媒'와 雙關되어 "다행히도 중매쟁이가 필요 없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되어, 당신의 딸을 주신다면 중매 없이 혼인할 수 있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얼마 뒤 程敏政은 재상 李賢의 사위가 되었다.
또 明末의 소설가 金聖嘆이 죄를 입어 사형을 당하기 직전 아들에게 두 구절을 지어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연밥은 그 속이 매우 쓰고
배는 속살이 맛이 시다네.
蓮子心中苦
梨兒腹內酸
다 죽어 가는 마당에 웬 연밥과 배 맛 타령이란 말인가? 김성탄의 이 구절은 그가 유난스런 美食家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속뜻은,
너희들 보고파서 내 마음 괴롭고
헤어질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憐子心中苦
離兒腹內酸
이었던 것이다. 雙關義의 활용을 통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비통한 심정을 심상한 언어의 포장 속에 감추고 있는 절묘한 표현이다.
수양 버들 파릇파릇 강물은 넘실넘실
강 위에선 그 님의 노래 소리 들리네.
동쪽엔 해가 나고 서쪽에는 비 오니
흐렸나 하고 보면 어느새 개였구나.
楊柳靑靑江水平
聞郞江上唱歌聲
東邊日出西邊雨
道是無晴却有晴
劉禹錫의 〈竹枝詞〉이다. 수양버들 가지에 물이 오르니, 강물도 넘실넘실 물이 불었다. 청춘의 봄날, 사랑의 단꿈이 익어가는 강변의 스케치이다. 연잎 사이로 배를 띄웠던 아가씨는 저 건너 방죽 가에서 그 님이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듣고 있다. 아가씨는 갑자기 화제를 돌려 날씨 타령을 늘어 놓는다. 저편에선 비가 오는데 또 이편에선 햇살이 비친다. 개였나 싶으면 흐린 날씨처럼, 아가씨의 마음도 싱숭생숭 한게다. 요랬다 조랬다 하는 날씨처럼, 흥! 제까짓게 하다가도 어느새 어떤 멋진 도련님일까 싶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게 되는 그 심정.
이 때 4구의 '晴'은 개인다는 뜻이지만 애정의 '情'과는 중국음으로 발음이 같다. 개였다 흐렸다 하는 날씨를 가지고 無情한듯 有情한 알 수 없는 봄날 아가씨의 마음을 절묘하게 집어낸 절창이다. 漢詩에 있어서 雙關義란 이렇듯 하나의 글자가 同音이나 多義에 의해 한 가지 이상의 뜻을 함축하게 되는 경우를 이른다. 이러한 雙關義의 활용은 表意文字인 漢字의 특성 상 한시에서 매우 빈번하게 활용된다.
가을 긴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 매어두고,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 나절 무안했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係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許蘭雪軒의 〈采蓮曲〉이란 작품이다. 가을 날 푸른 창공처럼 아스라히 펼쳐진 파아란 강물 위로 배를 띄웠다. 벽옥처럼 흐르는 강물. 하늘과 물이 어우러져 시릴듯 푸른 빛이다. 아가씨는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연꽃이 무성한 속에다 타고 온 목란배를 가만히 매어 두고는, 만나기로 한 님을 기다렸다. 배를 숨겨 놓은 것은 혹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다.이윽고 방죽 위로 님이 나타나고, 님은 내가 연꽃 속에 숨어 그를 지켜 보고 있는 줄도 까맣게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다. 그가 하는 양을 숨어서 지켜보다가, 안타까운 나머지 그녀는 님의 발치에 연밥을 던지고 말았다. 수줍어 '저 여기 있어요' 라고 말은 못하고 말이다.
3구의 '蓮子'는 연밥, 곧 연꽃의 열매를 뜻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蓮子'는 '憐子' 즉 '그대를 사랑한다'는 속뜻을 담아 사랑의 고백이 된다. 말하자면 그녀가 물 건너로 던진 것은 그저 심상한 연밥이 아니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한시에서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 '千絲'를 '千思'로 雙關하여 두서 없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야릇한 봄 마음을 나타내는 것도 모두 비슷한 예이다. 만해 한용운의 〈심은 버들〉이란 작품도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뜰 앞에 버들을 심어
님의 말을 매렸더니
님은 가실 때에
버들을 꺾어 말채찍을 하였습니다.
버들마다 채찍이 되어서
님을 따르는 나의 말도 채칠가 하였더니
남은 가지 千萬絲는
해마다 해마다 보낸 恨을 잡아맵니다.
위 시에서 '남은 가지 千萬絲'는 님을 향한 '남은 생각 千萬思'와 雙關된다. 그러므로 '보낸 恨'을 잡아 매는 것은 '千萬絲'의 얽히고 설킨 버들가지이면서 동시에 '千萬思'의 부질 없는 기다림과 집착이 된다.
오늘 핀 꽃이 내일 빛남 없음은
한 꽃으로 두 아침 햇살 부끄럽기 때문이라.
해바라기 날마다 기움을 업신여겨 말한다면
千秋의 옳고 그름을 뉘 있어 분별하리.
甲日花無乙日輝
一花羞向兩朝暉
葵傾日日如馮道
誰辨千秋似是非
尹善道의 〈木槿〉이란 작품이다. 木槿은 무궁화다. 무궁화는 꽃의 생리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까닭에 흔히 朝開暮落花라 불린다. 이를 두고 '一日榮'이라 하여 덧 없는 소인배의 작태에 견주기도 하나, 시인은 오늘 아침에 핀 꽃이 내일 아침까지 빛나지 않은 것은 두 아침의 햇살과 마주 향해 서기가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날이면 날마다 태양만을 향해 하염 없이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의 줏대 없는 一片丹心도 하냥 기릴 것은 없겠다. 따지고 보면 千秋의 是非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니던가. 오늘의 '是'가 내일엔 '非'가 되고, 어제 쏟아지던 비난이 오늘은 기림이 되어 쏟아진다. 어찌 이깟 是非에 一喜一悲 할 것이랴.
무궁화를 두고 소인배라 비웃으면 씩 웃어줄 일이요, 두 조정을 섬기지 않는 忠臣으로 기리면 고개를 돌리고 말 일이다. 해바라기의 일편단심을 충신으로 기리면 침을 뱉을 일이요, 줏대 없는 아첨배라 한 데도 상관 말 일이다. 인간 세상의 是非曲直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여기서 2구의 '兩朝'는 '두 아침'이면서 동시에 '두 조정'의 의미를 雙關하고 있다. 烈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했던가. '槿花一日榮'의 상식을 뒤엎어 여기서 '不事二君'의 의미를 읽고 있는 시인의 讀法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녔던 毁譽曲折을 떠올리면 다른 설명이 필요 없겠다. 이와 같이 雙關義는 시의 함축미를 효과적으로 제고시켜주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된다.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새벽녘 말을 달려 외론 성에 들어서니
울타리엔 사람 없고 살구만 익었구나.
나라 일이 급한 줄을 뻐꾹새는 모르고
숲 곁에서 종일토록 봄갈이를 권하네.
凌晨走馬入孤城
籬落無人杏子成
布穀不知王事急
傍林終日勸春耕
고려 때 시인 鄭允宜의 〈書江城縣舍〉란 작품이다. 새벽녘에 말을 달려 성에 들어 서고 있으니, 그는 지금 밤새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는 외로운 성 뿐이다. 혹시나 사람이 있을까 싶어 울타리를 기웃거려 보아도 보이는 것은 주인 없는 마당에 잘 익어 매달린 살구 열매 뿐이다. 그런데 뻐꾹새는 급한 나라 일도 알지 못한 채 철도 없이 숲 가에서 봄 밭갈이를 어서 하라고 울고 있다는 것이다.
布穀은 뻐꾹새이다. 布穀은 중국음으로는 '뿌꾸우'가 되니 '뻐꾹'의 음차인 셈이다. 그런데 이를 의미로 읽으면 '씨 뿌려라'가 되므로, 뻐꾹 뻐꾹 울어대는 그 소리는 곧 씨 뿌려라 씨 뿌려라 하고 들린다. 살구가 익었으니 계절은 여름이다. 그런데도 철 없는 뻐꾹새는 씨 뿌리라고 야단이다. 뻐꾹새를 두고 철이 없다 함은 계절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 아니다. 봄이 다 가고 살구가 열매 맺도록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 파종도 못한 채 잡초만 우거져 있는 들판을 바라보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고려 말 대몽항쟁기에 지어진 작품이다. 무심한 자연의 질서는 주인 없는 뜨락 나무 위에 먹음직한 살구 열매를 얹어 놓았지만 정작 이를 따서 먹을 사람은 없다. 급한 王事를 전하려 피난을 떠나 텅 빈 성으로 밤새 말을 달려온 시인은 뻐꾹새 울음 속에 허탈한 한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뻐꾹 뻐꾹
뻐꾹새 울음 속에 봄은 무르익었는데
사내들은 전쟁 나가 시골 동네 텅 비었네.
저물 녘엔 들리느니 과부의 울음 소리
씨 뿌려라 울지만 누가 있어 씨 뿌리나
들판엔 아득하게 풀빛만 자옥해라.
布穀 布穀
布穀聲中春意足
健兒南征村巷空
落日唯聞寡妻哭
布穀啼 誰布穀
田園茫茫烟草綠
權禝의 〈布穀〉이란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임진왜란 당시이다. 때는 바야흐로 봄날, 뻐꾹새의 울음 소리 속에 春耕의 일손이 한창 바쁠 시절이다. 그러나 남정네들은 모두 남쪽 전장터로 징발되어 시골 동네는 텅 비고 말았다. 저물녘에 들려오는 과부의 울음소리는 이미 많은 남정네들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음을 알려준다. 뻐꾹새가 씨 뿌리라고 목청을 뽑을 수록 그녀들의 기 막힌 울음 소리는 더 커져만 간다. 그렇게 또 봄이 가고, 파종조차 못한 들판엔 어느덧 잡초가 자옥히 푸르러 가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布穀은 '뻐꾹'이라는 새울음 소리의 음차이면서 동시에 '씨 뿌려라'는 의미를 雙關하고 있다. 언젠가 학술 토론의 자리에서 이 작품을 두고 어떤 분이 '씨 뿌려라'의 '씨'와 '과부'와의 연관에 주목하여 남녀상열지사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내놓아 一座의 경탄을 자아낸 일이 있었는데, 뻐꾹새의 울음소리 속에 담긴 의미는 이래 저래 심장하기만 하다.
새가 새가 나러든다 復國鳥가 나러든다
이 山으로 가며 復國 뎌 山으로 가며 復國
靑山盡日 피나도록 復國 復國 꽬히 우니
志士魂이 네 아니냐
1908년 〈大韓每日申報〉에 실려 있는 〈依杖聽鳥〉 가운데 한 수이다. 망한 나라의 뻐꾹새는 이제 더 이상 '씨 뿌리라'고 우는 것이 아니라 '復國' 즉 '나라 찾자'고 울고 있는 것이다.
거무야 왕거무 거무야 네 줄을 길게 느려
날김생 길김생 날버러지 길버러지 모도 다 폑부로 슬슬 억드라도 寂寞空山 古木上에 홀노 안자 슬피 우鏅 져 復國鳥 행혀나 얼글셰라
아모리 나도 蜘蛛螩망뎡 滿腹經綸이 아니 얼거.
1910년 7월 12일《大韓民報》에 실린 〈蜘蛛〉, 즉 거미를 노래한 사설시조이다. 역시 뻐꾹새를 復國鳥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반에서 뻐꾹새가 復國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가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한시에는 이렇듯 새 울음 소리를 음차하여 訓讀함으로써 이중 의미를 담는 禽言體라는 것이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노고지리를 '老姑疾'로 표기하여 늙은 시어머니의 병환을 노래한다든지, 아예 '負鍋者'라 하여 '노구(鍋) 솥을 등에 질(負) 사람(者)'이라고 풀기도 한다. 소쩍새는 솥적다고 '鼎小'라 하고, 까마귀는 '姑惡'이라 하여 시어머니를 향한 며느리의 푸념을 늘어 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소쩍새의 다른 이름인 주걱새를 '死去'(죽어)鳥로 표기하여 '나 죽겠네'의 탄식을 털어 놓기도 한다. 모두 雙關의 妙味를 활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솥적 솥적
쌀이 많아 밥 지을 수 없다지만
금년엔 쌀이 귀해 끼니 잇기 어려우니
솥 작아 근심 없고 곡식 없어 근심일세.
다만 동이 속에 남은 곡식 있어서
불 때어 두 끼만 먹어도 오히려 좋겠네.
鼎小 鼎小
飯多炊不了
今年米貴苦艱食
不患鼎小患無粟
但令椵中有餘粮
乘熱再炊猶可足
張維의 〈鼎小〉란 작품이다. 소쩍새는 자꾸만 솥이 적다고 아우성이지만, 실제로는 말할 수 없는 흉년이다. 곡식은 많은데 솥이 적어 하는 근심이라면 근심이랄 것도 없겠다. 뒤주를 박박 긁어도 남은 곡식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柳得恭은 〈東禽言〉 4수 중 〈鼎小〉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솥적 솥적
쌀은 많고 솥은 작네.
아낙은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하는데
낭군 와서 웃으며 아낙에게 하는 말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가뜬가뜬 배 불리 먹어 치웁시다.
鼎小鼎小
粟多鼎小
婦憂痗痗
夫來笑謂婦
朝朝夕夕
兩炊喫了
봄부터 솥이 작다고 소쩍새가 울더니 大豊이 들었다. 배불리 먹을 욕심에 쌀을 잔뜩 얹고 보니 솥이 작아 넘칠 판이다. 아까운 쌀밥이 넘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아낙은 안절부절 못하는데, 타작을 마친 낭군은 활짝 웃으며 아침에도 저녁에도 배불리 먹읍시다 한다. 참으로 흥겨운 정경이다. 이런 걱정이라면 아무리 해도 기쁠 것만 같다.
이러한 禽言體의 문학 전통은 앞서 뻐꾹새가 復國鳥로 되는 예에서도 보았듯이 개화기에 와서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1920년 6월 창간된 《開闢》 창간호에 실렸다가 압수 삭제된 시 〈금쌀악〉과 〈옥가루〉에서도 새울음 소리의 음차를 통한 시대 풍자를 읽을 수 있다.
北風寒雪 가마귀 집 貴한줄 닷고 家屋家屋 우누나
有巢不居 저-가치 집 일홈을 부러 可恥可恥 짓누나
明月秋堂 귀리 집 일흘가 저허서 失失失失 웨놋다 〈금쌀악〉
黃昏南山 부흥이 事業 復興하라고 復興復興 하누나
晩山暮夜 속독새 事業督促 하여서 速速速速 웨이네
驚蟄 맛난 개구리 事業 저다 하겠다 皆皆皆皆 우놋다 〈옥가루〉
둥지를 짓지 않은 까마귀는 북풍한설을 만나고서야 집 귀한 줄 알고 家屋家屋 울고, 제가 지은 둥지를 남에게 빼앗긴 까치는 그것이 부끄러워 可恥可恥 하며 우짖는다는 것이다. 모두다 나라 잃은 슬픔과 치욕에 대한 암유이다. 그래서 남산의 부엉이도 다시 일어서자는 다짐으로 復興復興 울고, 속독새는 한 밤중에도 자지 않고 빨리빨리 잃은 국권을 회복하자고 速速速速 운다는 것이다. 경칩을 만나 몸을 푼 개구리마저도 그 사업에 저마다 참여하겠다고 皆皆皆皆 울어대니 진정 겨레의 독립은 요원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적 전통은 장만영의 〈소쩍새〉로까지 이어진다.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 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 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三國遺事》 〈紀異〉편에 보면 '善德王知機三事'란 항목이 있다. 그녀가 재위 16년 동안 미리 알아맞춘 세 가지 일을 적은 것이다. 그 첫번 째는 당 태종이 붉은 빛과 자주빛, 그리고 흰 빛 등 세 가지 빛깔의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 석 되를 보내왔는데, 여왕은 그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꽃이 피었는데 그 말과 같았다. 여러 신하가 어떻게 그렇줄 알았느냐고 묻자, 여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나의 혼자 지내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신하들을 탄복시켰다.
그런데 예전부터 모란꽃을 그릴 때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았다. 牡丹은 富貴를 상징하는데, 나비는 80 늙은이를 나타내므로 모란에 나비가 곁들여 지면 80이 되도록 부귀를 누린다는 뜻으로 의미가 제한되어 버린다. 나비는 왜 80 늙은이가 되는가? 나비 '蝶'자는 중국음은 '디에'인데, 80 늙은이 '珫'자의 발음이 또한 같으므로 서로 雙關된 것이다. 욱일충천 하던 대제국의 제왕이 변방의 조그만 나라 신라의 여왕이 시집 가고 안 가고에 무슨 관심이 있었겠는가? 그저 모란꽃 그림으로 귀국의 부귀영화를 바란다는 의례적 인사를 보내온 것이었는데, 재치가 넘쳐 흘렀던 여왕은 자격시심에 그만 오버센스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적어도 모란꽃 그림에 굳이 나비를 그려 넣어 80 먹도록 시집도 안 가고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식의 격조 없는 농담을 청할 당 태종은 아니었을 줄로 안다. 일연 또한 이를 대서특필 한 것으로 보아 쌍관의 원리로 전개되는 이러한 讀畵의 원리를 몰랐던 듯하다.
흔히 모란에 나비를 그릴 양이면 으례 고양이도 함께 등장하는데 고양이는 또한 70 늙은이를 의미한다. '猫'자의 발음이 70 늙은이 '悛'자와 발음이 '마오'로 같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을 보면 古木 등걸 아래 고양이가 새끼 세 마리와 함께 앉아 있고 까치와 참새가 나무가지에 앉아 있는 구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자식을 셋 둔 70세를 맞은 노인의 古稀를 축하하기 위한 祝畵이다. 古木은 수명 장수를, 까치와 참새는 '鵲'과 '雀'으로 음이 같아 기쁨을 상징하며, 고양이가 70 늙은이를 지칭하게 되는 까닭이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 보면 흔히 표범을 그려 놓고 그 배경에 소나무와 까치를 그려 둔 민화와 마주하게 된다. 이 그림은 일종의 歲畵로서 정월에만 붙이는 것이다. 반드시 표범이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표범을 본 일이 없어 슬며시 호랑이로 둔갑해 그려져 있기도 한다. 이를 鵲虎圖라 하여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와 까치를 친근하게 여겨왔고 운운 하는 설명이 친절하게 붙어 있기도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표범과 소나무와 까치는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코드일 뿐이다. 표범을 나타내는 한자 '豹'는 '빠오'로 읽혀지니, 알린다는 뜻의 '報'와 발음이 같다. 까치는 '喜鵲'이라 하여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까치와 표범이 합쳐지면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뜻이 된다. 소나무 '松'은 보낼 '送'과 발음이 같으니, 결국 이 그림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送舊迎新, 新年報喜의 의미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갈대 숲에 기러기를 얹은 그림은 蘆雁圖라 하여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때 갈대를 나타내는 '蘆'는 '老'와 기러기 '雁'은 '安'과 쌍관되어 늙어 편안하시라는 '老安圖'가 된다. 또 버드나무 밑에 오리 두 마리를 그려 놓으면 이는 科擧 시험에 연달아 장원 급제하는 행운을 기원하는 그림이 된다. 버드나무 '柳'자는 머문다는 뜻의 '留'와 쌍관되고, 오리 '鴨'은 破字하면 장원급제를 나타내는 '甲'의 뜻이 되는 때문이다. 두 마리는 초시와 복시에 잇달아 패스함을 뜻한다. 예전에 한시에서 버들가지 꺾는 것이 이별의 정표임을 말한 바 있는데, 이 또한 쌍관의 讀法으로 읽으면 떠나지 말고 머무시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개 동양화에서 이러한 雙關義를 활용하여 立象盡意 하는 수법은 연원이 매우 오래고 다분히 관습적이다. 이러한 관습은 너무나 일상화 되어 뒤에 오면 그 본래 의미에 변질을 가져오기도 한다. 또한 실제 경물과는 동떨어진 인습적 화풍의 모방복제를 되풀이하는 폐단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물과 언어를 결합하여 쌍관할 줄 알았던 선인들의 정신이 낳은 상징과 함축의 예술임도 부인할 수 없다. (동양화의 이러한 상징 원리에 대해서는 조용진 교수의 《동양화 읽는 법》(집문당, 1992)에 설명과 예시가 자세하다.)
이렇듯 漢字의 발음과 의미상의 연관을 통해 깊은 함축을 담는 雙關義의 활용은 한시 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를 노래하고 있는 민요 "갑오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과 같은 예도 모두 雙關義의 활용이 돋보이는 예이다. 물론 시는 문자유희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언어 예술로서 詩歌 언어가 이러한 유희적 성분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詩歌 예술 위에 신선한 호흡과 생동하는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시인이 문자 유희에만 탐닉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속에서 뜻밖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언어의 발랄한 생기를 일부러 멀리 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첫댓글 諷刺詩나 絶妙한 對句나 遊戱的 詩歌 등
언어의 발랄한 생기를 엿볼 수 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재밌게 잘읽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