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도 갔을 ‘라켓소년단’(박미향)
박미향 문화부장
순한 맛은 인기가 없다. 고춧가루를 덜 넣고, 설탕을 빼면 밍밍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맛없다는 얘기다. 신선한 식재료의 고유한 성질에만 기대 조리한 음식은 대체로 순한데, 오래 씹고 공들여 음미해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참을성과 여유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느리게 사는 걸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선 순한 맛은 생존이 어렵다. 식당 주인이나 식품회사가 ‘더 맵고 더 단’ 경쟁을 하는 이유다. ‘뺄셈’보다 ‘덧셈’ 원칙에 충실한 양념이 힘을 얻는다. 정복자처럼 식탁을 점령한다.
순한 사람도 버티기 힘든 세상이다. 배려가 몸에 밴 이의 등 뒤엔 ‘만만한 사람’이란 평판이 유령처럼 따라다닌다. 그런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으려면 작은 손해에도 화를 내야 한다. 최소한의 자기방어 기제로 화가 작동하는 것이다. 일종의 생존 기술이다. 화가 런던의 밤안개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자욱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순한 사람은 기댈 언덕이 없다. 에스엔에스(SNS)에는 밍밍한 사람이 아니란 건 증명하기 위해 일상을 덧칠한 사진이 넘쳐난다.
드라마도 순하면 장사가 안된다. 화제가 됐던 <괴물> <모범택시> <마인> <마우스> 등은 진한 맛이다. ‘막장 중의 막장’ <펜트하우스>는 극단적인데, 너무 매운 맛은 독이다. 이런 풍토에서 드라마 한편이 배짱 두둑하게 ‘순한 맛’으로 순항 중이다.
<라켓소년단>은 아버지(김상경)를 따라 전남 해남에 가게 된 16살 중학생 윤해강(탕준상)이 해남서중 배드민턴부 부원이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중심축이다. 아버지는 잘못 선 보증으로 서울 거리에 나앉게 되자, 해남서중 배드민턴부 코치 자리 제안을 덜컥 수락한다. 너무 밍밍한데, 맛있다. 회마다 매듭짓는 에피소드의 결말에 웃고 운다. 무시무시한 미스터리도, 한류 스타도 없다. 주인공 탕준상은 낯설다. 다른 아역 배우들도 마찬가지. <동백꽃 필 무렵>의 필구 역을 맡았던 김강훈 정도 얼굴이 눈에 익다.
스포츠는 상대를 제압해 이기는 게 목적이다. 경쟁은 필수고, 패배는 지옥행 티켓이다. 하지만 <라켓소년단>이 경기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친구가 코트에 있기 때문. 이긴 이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대신 진 친구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이들 이야기는 스포츠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변변한 프로팀도 없고, 올림픽 때나 반짝 주목받았다가 금세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배드민턴이 주인공들의 우정과 성장을 엮는 장치인 건 눈여겨볼 만하다. 윤해강 아버지의 철학에서 이유를 발견한다. “져도 괜찮아. 사람들이 다 1등 하고 사는 거 아니야. (진) 사람이 열심히 안 했느냐, 그건 아니거든.” 배드민턴은 인기 종목이 아니다. 종목과 상관없이 선수들의 땀방울 크기는 같다.
이 드라마의 미덕 중 하나는 제작진이 설계한 구조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 스포츠계의 고질병인 폭력의 재생산, 상납과 인맥 우선주의 등도 들춰낸다. 폭력 사태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은 김상경이 시청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거로 끝을 맺는다. “이런 일(폭력 사태)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말았어야지. 선수들, 지도자들, 협회들 책임지고 방법을 찾아야 해.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게.” 농촌인과 귀농인의 갈등도 짚는데, 해결책이 명쾌하다.
오랜만에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순한 맛’을 만났다. 맛볼수록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나는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고, 내 잇속보다는 이타적인 선택에 집중한 순한 사람인가?’ 순한 사람이 느는 사회가 천국이 아닐까. 감칠맛이 끝내주는 찰진 전라도 사투리는 덤. 김강훈이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외치는 “디지네, 디져!”는 유행어 등극 직전이다.
19일 오전 11시15분, 우리 선수단 69명이 2020 도쿄올림픽 출전을 위해 출국했다. 현실의 ‘라켓소년단’도 함께했다. 그런데 걱정이다. 경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도 전에 선수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는 등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올림픽’을 지켜봐야 한다. 연일 수직 상승하는 도쿄 코로나19 확진 상황에 올림픽 연기 주장도 제기됐지만, ‘국대’가 인생의 목표인 <라켓소년단>이 눈에 아른거려 선뜻 찬성하기가 어려웠다. 부디 무사히 충분히 땀 흘리고 돌아오시라. “이겨도 같이! 져도 같이!”
mh@hani.co.kr
첫댓글 져서 돌아올 땐 풀이 푹 죽었던 귀국 길 선수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올림픽이고 코로나19로 많은 제약 속에서 무관중으로
경기를 치룬 우리 선수들에게 이번 만큼은 괜찮아 잘 싸웠어로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우리 선수들 화이팅 입니다.^^
"디지네, 디져!"가 유행어로 등극하도록 기쁜 성과들이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