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널링 증후군 ]
긴 터널 안에 들어가면 저 멀리 빛이 보이는 출구를 제외하고 모든 것들이 어둠으로 인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터널을 통과해야 밝은 세상을 만날 수 있으므로 터널에 진입한 사람들은 오직 빛이 보이는 출구만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터널의 출구처럼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대상만 바라보고 나머지 것들은 쳐다보지 않는 현상을 '터널 시야(tunnel vision) 현상' 이라고 합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터널링(tunneling)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의 인식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터널링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체계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예방할 수가 없고 단지 반응만 할 뿐입니다. 급전이 필요한데 돈이 없으면 이자가 얼마든 상관없이 돈을 빌려 쓰게 됩니다. 당장의 금전적 어려움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채를 빌린 이후의 비극적인 일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터널링 증후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도 터널링 현상이 발생합니다. 급한 일로 정신없이 바쁠 때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포기하거나, 매일 하던 운동을 건너뛰거나, 연말까지 받아야 할 건강 검진을 미루기도 합니다.
작업을 끝내야만 출구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서다 보니 일보다 더 중요한 다른 선택지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터널링 증후군은 조직 내에서도 발생합니다.
애니타 터커의 논문에 따르면 미국의 병원에서는 평균 90분에 한 번씩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가령, 사흘간의 연휴가 끝난 후 한 간호사가 자기 병동에 수건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 간호사는 임시방편으로 이웃 병동에서 수건을 몇 개 가져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산부인과에서는 퇴원을 준비 중인 아기의 발목에 있어야 할 보안 태그가 없어졌다는 걸 담당 간호사가 발견했습니다. 그 간호사는 아기가 누워있던 병동으로 되돌아가 요람 근처를 열심히 뒤져서 보안 태그를 찾아 무사히 아기를 퇴원시켰습니다.
이것은 애니타 터커가 병원 8곳에서 일하는 간호사 22명을 200시간 가까이 따라다니며 관찰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터커는 간호사들이 가장 흔하게 직면하는 문제 중 상당수가 누락되거나 잘못된 정보 처리, 없거나 파손된 장비에 대처하는 일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간호사들은 당장 닥친 일들을 처리하느라 터널링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병동에 수건이 없다고 다른 병동에서 수건을 가져옴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병동의 수건을 부족하게 만들었습니다.
퇴원을 앞둔 아기의 보안 태그가 3시간 사이에 2개나 없어졌지만 아무도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되묻는 간호사는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을 열심히 해결했고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갔을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조직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터널링은 더 많은 터널링으로 연결됩니다. 혼란스러운 터널 속에서 고군분투한 사람들의 영웅담은 어디서나 흔히 회자됩니다. 하지만 영웅이 필요하다는 건 대개 시스템이 실패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터널링 증후군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문가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이나 자원을 당장 투입하지 말고 일부러 미루라고 조언합니다. 개인적으로 추가적인 작업 부탁이 들어왔을 때 즉각적으로 승낙하지 말고 결정을 미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수건이 떨어졌으면 다른 병동으로 뛰어가지 말고 담당 부서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것이 문제 개선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출구를 향해 내달리지만 말고 여유 시간을 만들어서 시스템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일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눈가리개를 쓰고 앞만 보고 달립니다. 눈가리개를 쓴 경주마처럼 우리가 전진하는 데만 온 힘을 쏟는다면 그게 올바른 방향이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북미 대륙의 인디언들은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다가 가끔 멈춰서서 그들의 영혼이 뒤따라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고 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깊은 울림을 주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가끔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사)지역산업입지연구원 원장 홍진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