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어저께.
늘 그랬듯, 차가운 강풍을 몰아내고 숨가쁘게 와버렸다.
한번쯤은 나도, 처마 밑에서 봄이 왔다느니 대들보 밑에서 봄이 왔다느니 해야, 이 세계에 발붙이고 있을 것 같은데,
시드니의 봄은 눈치도 없다.
지붕의 기왓장을 날려버리고, 길가에 가로수를 쓰러뜨리고,
낙엽과 흙먼지 쓰레기를 도시 곳곳에 한바탕 솎아놓더니, 놈이 포효를 한다.
이런 봄을 나는 무척이나 오래 보았다.
축축한 막을 걷어치우고, 이제부터 봄이라고 시치미를 떼고 앉아있는 봄의 정오.
하얀 보트들이 출렁이는 바닷가 공원에 앉아, 예기치 않게 꽃순이와 달랑 깍두기를 놓고 점심을 먹는다.
둘이 이런데서 앉아 점심을 먹기는 30년 만에 처음이다.
“나, 믿지? 걱정마! 자신 있어!”
오늘같이 화창한 그날, 어린 꽃순이는 이런 공원에서 어떤 놈한테 엮였다.
나는 그때 정말로 시드니 하늘이 만만하게 보였었다. 모두가 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손을 뻗기만 하면 언제든 그 하늘은, 내 수중에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 하늘이 그렇게 높은 줄은 나는 꿈에도 몰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내는 늙어있다.
늙지 말라고 내가 꽃순이란 이름까지 붙여 주었는데, 꽃순이의 눈가에도 주름이 진다.
꽃순이는 눈 밖에 볼 게 없는 여자다.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웃음을 잃지 않던 눈이었다.
‘꽃순이’는 본래, 내게 꿈이나 동경,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환상이나 문학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것은 절대 늙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노래방에 가면 언제나 판을 깨가며, 나는 “꽃순이를 아시나요”를 기어이 불렀다. 그리고는 눈물을 삼켰다.
그런 나의 ‘꽃순이’가 늙어가고 있다.
엊그제, “아내에게 바치는 글”을 생일 이벤트랍시고, 아내 몰래 신문과 잡지에 광고를 실으려고 했었다.
밤새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또 지우고 하기를 여러 차례, 그런데 결국 자신이 없어 고생만 하고 끝이 났다.
팔불출이라고 할 것 같고, 한심하다고 비웃을 것 같았지만, “이 순간은 그대와 나만 세상에 존재한다.”라며
젊은이들처럼, 쓰러진 용기를 주워 모아 하얀 종이에 담았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피함보다도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려웠다.
글은 여자와 같다.
밤에 보는 것과 아침에 보는 것이 다르다.
아내에게 바치는 글은 쉬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까다롭다. 온갖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식어 자빠진 사랑 얘기도 다시 꺼내야 하며, 다정하고 감미로운 글들과 함께, 말미엔 멋진 여운을 남겨야 한다.
글에 푹 빠지고, 감정에 빠져서, 한꺼번에 몰아 써야 한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오줌도 싸고 똥도 싸다 써지는 글이 아니다.
거기다 우리(?) 꽃순이는, 내공을 5할쯤만 사용해야 한다. 8할이 넘어가면 이 웬수가 뭔 소린지 모른다.
밤새 쓰고 나서 엄청 욕먹는다. 그래서 어렵다.
봄의 햇살이 찬밥을 맛있게 먹는 아내의 눈을 비춘다. 눈이 오늘따라 예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하얀 보트들이 떠있다. 그리고는 이내 깍두기가 출렁인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들어 종이컵을 뺏어갔다.
바람이 따스하다. 봄이 왔긴 왔나보다.
가을이 떠나야 하는 계절이라면, 봄은 만나야 하는 계절이다.
산도 만나고 들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고 사랑도 만나고, 무엇이든 모두 만나야 하는 게 봄이다.
그래서 겨울보다 더 크고 위대한 봄을, 사람들은 모두 기다린다.
오늘 이 봄에 나는, 잃어버린 그녀를 다시 만나고 있다.
겨울이 가지 않아도 봄은 온다.
하얀 꿈을 꾸며 파랗게 온다.
이 봄을, 나는 고생만 시킨 그녀에게 들어 바친다.
봄이 온다.
미소를 지으며 온다.
하늘 끝 저기 저 바다에서,
덩실덩실
어머니를 따라 온다.
첫댓글 아내를사랑하는마음
지금가진것
다른어느보화못지않게
소중하게여기며
살아가는님에모습
아름다워요
나이먹어가며
서로를배려하는마음들이
넘처흘러나는듯
향기가풀풀날리네요
신문잡지가아니라도
충분하게
박수처드릴게요....
촛불사랑님 고맙습니다. 누추한 곳까지 오셔셔 보아 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