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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국보와 보물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국보 11호(익산 미륵사지 석탑)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익산 미륵사지는... |
▲ 미륵산에서 내려다 본 미륵사지 전경(미륵사지내 전시된 사진 찰영) |
전라북도 익산하면 대표적인 문화유적이 미륵사지입니다. 미륵사지내에 있는 국보 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은 몇 년째 해체 중에 있으며, 현재는 2층까지 완전 해체가 완료되었습니다. 완전 해체와 복원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대로 복원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미륵사지는 금마면 사거리에서 8Km를 더 갑니다. 미륵사지는 표지판만 따라 가다 보면 오른쪽에 넓은 공간과 주차장이 있는 곳이 나옵니다. 이 곳이 미륵사지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미륵사지 정문으로 가면 정문앞의 공간도 상당히 넓습니다. 정문에는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입장료는 받지 않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미륵사지 복원을 위한 조감도를 찍은 것입니다. 현재, 미륵사지는 양쪽의 당간지주와 복원이 완료된 오른쪽의 동원9층석탑 그리고 왼쪽의 국보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이 복원 중에 있습니다. 조감도에 있는대로 모두 복원이 완료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
▲ 미륵사지 복원을 위한 조감도 |
익산 미륵사지는 사적 15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는...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로『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
▲ 미륵사지 정문 전경 |
▲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
▲ 미륵사지 출토 석재 전시 |
정문을 지나면 정면에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있으며, 안에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오른쪽으로 나오면 중앙에 연못이 있으며, 오른쪽 끝에도 연못이 한 곳 더 있습니다. 저는 맨 오른쪽에서부터 보면서 돌아 나왔습니다. |
▲ 호수 앞에서 본 미륵사지 전경 |
▲ 미륵사지 출토 석재 |
▲ 미륵사지 출토 석재 |
오른편의 호수 앞에는 아래의 사진과 같이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석재들을 분류하여 놓았으며, 석재들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앞에는 아래 사진의 미륵사지 당간지주 중에 오른쪽 당간지주가 있으며, 당간지주 앞에는 복원된 미륵사지 동원9층석탑이 있습니다. |
보물 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 |
▲ 왼쪽 미륵사지 당간지주(미륵사지 석탑 앞에 위치) |
▲ 오른쪽 미륵사지 당간지주(복원된 석탑 앞에 위치) |
대부분은 당간지주가 하나인 것에 비하여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9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좌우로 한 쌍(조감도 참조)이 서 있습니다. 지주의 높이는 4미터로 다른 당간지주에 비해서 지주가 굵거나 높은 편은 아닙니다.
서편(왼쪽) 당간지주와 동편(오른쪽) 당간지주의 기단은 두 곳 모두 앞뒤 좌우로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져서 오래 되기도 했지만 당간과 지주의 하중으로 인하여 균열이 생겨서 갈라진 것 같습니다. 또한, 동편 당간지주 왼쪽에는 1미터 정도되는 돌기둥이 하나 서 있는데, 이 것을 당간석이라고 합니다. |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m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경북 영풍군의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 |
복원된 동원9층석탑 |
▲ 복원된 동원9층석탑 |
▲ 동원9층석탑의 복원 전 모습(문화재청 사진) |
동편 당간지주에서 앞의 나무계단을 오르면 복원된 동원9층석탑이(동탑) 있습니다. 위의 왼쪽 사진이 복원된 탑이고 위 오른쪽 사진이 복원되기 전의 탑지 모습입니다.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로 보아 동원 탑지에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 탑 자리에 1991년부터 석탑의 복원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공하였습니다. |
▲ 동탑 입구 전경 |
▲ 기존 석재도 일부 사용됨. |
▲ 통탑 내부 전경 |
복원된 탑은 하층 기단이 1번 12.5M, 상층 기단이 10.5M인 2중 기단이며, 9층으로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층 높이는 27.8M이고, 탑의 내부는 1층 탑신에서 십자형 통로가 있고 2층부터는 공간이 없이 막혀 있습니다.
옥개석과 상륜부에 달린 풍탁은 동탑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며, 탑 복원에는 익산에서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총 2,000여개, 2,700여톤이 사용되었고, 백제시대 석탑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동탑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으며, 안의 통로는 좁고, 높지 않아서 안으로 들어 가서는 다소 머리를 수그려야 합니다. |
▲ 고려시대 기와 가마터 |
▲ 기와 가마터에서 바라본 전경 |
▲ 석등 하대석 |
동탑의 오른쪽 구릉진 곳에 무덤 같은 것이 있길래 가 보았더니 고려시대의 기와 가마터라는 안내판이 있었습니다. 복원된 동탑과 복원 중인 서탑 사이에는 건물 터들이 여러 곳 있으며, 뒤의 넓은 공간은 여러 건물터를 구획하여 놓았습니다. |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 |
▲ 미륵사지 석탑의 수리전, 후와 일제시대의 모습(전시된 사진 촬영) |
익산의 미륵사지를 가는 이유는 이 석탑을 보기 위한 것인데, 지금은 해체중이라 위의 모습은 볼 수 없으며, 건물 내부로 들어가서 해체되고 있는 1층 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해체가 빨리 끝나고, 복원된 모습이 기다려 집니다. 여러분들은 복원된 후에 한 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미륵사지 내에 있는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서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현존하고 있는 국내 최고 최대이며, 석조 건축술 역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한국석탑의 시원이라고 합니다.
우표로 발행된 미륵사지 석탑 도안과 아래 사진이 똑같습니다. |
▲ 해체중인 미륵사지 석탑의 외부 전경 |
▲ 해체 전의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문화재청 사진) |
미륵사지 석탑 해체 이전의 남아있는 층수는 6층 이었습니다. 그나마 이렇게 이 탑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일제 강점기(1915년)에 이루어진 붕괴방지 보수공사로 서남쪽이 시멘트로 메꾸어져 있어서 보기는 흉하지만 임시 방편적인 보수 공사 덕분이라고 합니다.
탑의 층수에 대하여 7층과 9층 설로 논란이 있었지만 80년대에 발견된 노반석의 크기와 남아 있는 탑신의 비례 관계 등을 조사한 결과 9층탑이었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
▲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중인 현장 모습 |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현재는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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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위치도 |
빨간 압정이 있는 곳이 익산 미륵사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