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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대철(子)와 성 유진길(父) 성화>
▶유대철 베드로 순교축일(10.31)◀
1.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홈피
축일:10월 31일(순교일)
* 가톨릭 성인록 /축일: 9월 20일
<소년성인 유대철베드로 축일>
[ 1826-1839(14세)포청옥에서 교수형
1925년 7월 5일 시복.
1984년 5월 6일 시성. ]
· 소년 성인 유대철(劉大喆)은 성인 유진길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과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 성 유진길아오스딩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하는 서울의 유명한 역관(譯官) 중인 집안 이었다.
천주교에 대해 적대시하고 방해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는 괴로움을 당했는데,
그때 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보여주었으나 신앙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항상 기도했다.
·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교우들의 순교사실과 아버지의 체포소식을 듣고 순교하기로 결심하여 자수하였다.
재판관들은 어린 소년을 배교시키기 위해 천만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지만,
소년 유베드로의 마음은 변치 않았으며,배교시키기 위한 갖은 방법에도 변함없이 오히려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어 형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린 나이로 견디기 어려운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에게
"믿고 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라고 대답했다.
화가 난 형리가 다시 시뻘건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 하자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처럼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매질로 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표정을 띠었다.
· 관원들은 어린 소년을 공공연하게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
1839년 10월 31일, 형리들을 옥 안으로 들여보내 상처 투성이가 된 그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잡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이도록 하였다.
· 가장 어린 순교 소년 유대철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여, 우리 민족의 모든 어린이들의 신앙적인 모범이 되었다.이때의 나이는 14세 이었다.
< 성모자와 한국 성인들 성화 >
성모자와 한국 성인들 -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요셉,1912- )
1949년, 각 185x108cm. 종이에 채색, 바티칸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
▶성화 해설
이 작품은 1950년 바티칸에서 열린 성모성년을 기념하여 세 폭의 연작으로 제작된 것이다.
가운데는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이 있고 좌측에는 순교자 강완숙과 성 김효주, 성 김효임이 있다.
우측에는 성 김대건 신부와 성 남종삼, 성 류대철이 서 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한 우리나라 성인의 모습이 단아하면서도 거룩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劉進吉,1791-1839)
’용심’으로도 불렸고 또 순교 당시 정3품 당상역관(當上譯官)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특히 철학과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세상만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명확히 알고자 10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만권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사람’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는 달리 유진길은 오히려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 그러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구해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한 교우를 만나 천주교 진리를 터득하고 곧 입교했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 그후 유진길은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하며 전후 8차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는 교황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했고
그 결과 유방제(劉方濟) 신부, 나(모방) 신부, 정(샤스탕) 신부, 범(앵베르) 주교 등이 입국하게 되었다.
· 유진길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는 관헌으로부터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의금부에서 그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마침내 유진길은 9월 22일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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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유대철 베드로 순교 성화 >
2. 가톨릭 성인록(굿-뉴스 홈)
성인명 : 유대철 베드로
(劉大喆 Peter)
축일 : 9월 20일(순교일: 10/31)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소년,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26-1839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유 베드로,
유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 T ♧♧♧♧ T ♧♧♧♧
성인설명 :
· 성 유대철 베드로(Petrus)는 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의 장남이다.
그런데 이 집안은 이상하게도 부자는 열심히 천주교를 믿는 반면, 모녀는 믿기는커녕 이를 반대하여 가정에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고 신자들을 욕하기까지 하였다.
어머니가 “어째서 너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고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 베드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 만물의 주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온순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어머니의 눈이 어두움을 한탄하면서도 어머니께 대하여는 언제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었다.
·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마음속에는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이 일어났다.
당시 옥에 갇혀있던 부친과 여러 신자들의 본보기는 그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체포된 후 하느님께 대한 열광적인 사랑에 끌려 1839년 7월경 관헌들에게 자수하였다.
재판관은 그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물어보고 신자의 자식임을 알게 되자 옥에 가두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게 하려고 어르고 엄포하고 고문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리고 옥사장이 혹형을 대철에게 가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도 이 용감한 어린이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 하루는 어떤 포졸이 구리로 된 담뱃대 통으로 그의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소리쳤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면요, 이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그러자 포졸들은 벌겋게 달군 숯 덩어리를 집어 들고 입을 벌리라고 하였다.
대철이 “예” 하고 입을 크게 벌리니 포졸들은 놀라서 물러나고 말았다. 다른 교우들이 그에게
“너는 아마 많은 괴로움을 당한 줄로 생각하겠지만 큰 형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했다.
대철은 “저도 잘 알아요. 이건 쌀 한 말에 대해서 한 알 같은 것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그를 데려와서 다른 죄수들이 정신이 들게 하려고 허둥지둥할 때 그가 한 첫마디는
“너무 수고를 하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해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해 형리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 유 베드로는 문초받기를 1회, 고문 14회, 태형 6백대 이상과 치도곤 45대 이상을 맞았지만 항상 기쁜 얼굴로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관헌들은 어린 그를 공공연히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서 1839년 10월 31일 형리가 옥 안으로 들어가 상처뿐인 이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쥐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였다.
이때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