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티베트 봉기 50주년
←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국대사관 앞에서 랑쩬(RANGZEN 자유) 회원들이 '티베트 민중봉기 50주년, 티베트에 자유와 평화를' 기자회견을 갖고 중국의 티베트 무력침공에 항의하고 있다.
2009년 3월 10일은 티베트(시짱, 西藏)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벌인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당시 희생된 1만 5천여명의 티베트인들을 추모하고 티베트의 자유를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이날 망명지인 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州)다람살라의 사원 앞마당에서 “티베트인들은 법률로 보장된, 의미있는 자치권을 원한다”라는 내용의 기념 연설을 했다.
달라이 라마가 머무는 사원 주변은 티베트 국기와 달라이 라마의 사진, “티베트에 자유를”이라는 구호를 담은 포스터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 대한민국의 서울, 일본의 히로시마(廣島), 호주 수도 캔버라, 미국의 워싱턴 등 전세계 곳곳에서 시위와 추모집회가 이어졌다.
한편, 이날 미 하원은 중국 정부가 티베트인에 대한 억압정책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표결에 부치기로 했다고 밝혔다./조선
[1985년] 소련의 정치가 체르넨코(Chernenko, Konstantin Ustinovich) 소련 공산당 서기장 사망
← 콘스탄틴 체르넨코. /조선
1911. 9. 24(구력 9. 11) 러시아 제국 시베리아 볼샤야 테스~1985. 3. 10 모스크바.
1984년 2월부터 1985년 3월까지 소련의 최고 정치지도자였다.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3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 선전원으로 교육을 받은 그는 여러 관직을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당위원회 서기관(1941~43)과 펜자 지역위원회 서기관(1945~48)이 되었다. 1948~56년 그가 몰다비아 지역 선전국장으로 있을 때 처음으로 브레주네프의 눈에 띄어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다. 1956~60년 모스크바에서 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1964년 브레주네프가 당권을 장악하자 체르넨코는 그의 참모장이 되었다. 체르넨코는 1971년부터 중앙위원회 정위원이 되었고, 1977년부터는 정치국의 정위원이 되었다. 완고한 보수주의자인 체르넨코는 브레주네프와 함께 여러 곳을 여행했고, 사람들은 그를 브레주네프의 보좌관이자 절친한 친구이며, 또 일부에서는 차기 정권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레주네프 사후, 공산당 내에 강력한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던 체르넨코는 1982년 11월 12일 전 KGB 의장 유리 V. 안드로포프에게 당 서기장직을 양보해야 했다. 안드로포프가 이듬해 8월 중병에 걸려 그로부터 6개월 뒤 죽자, 체르넨코는 그뒤를 이어 1984년 2월 13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으며, 4월 12일에는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가 경제를 개혁하고 관료적 비효율성과 부패를 뿌리뽑으려고 애쓴 반면, 체르넨코는 브레주네프 체제하에서 일해온 관료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외교문제에 있어서는 강경노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의 냉랭한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체르넨코도 권좌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후 미하일 S. 고르바초프가 뒤를 이어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브리태니커
[1970년] 박정희 대통령,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도산공원 조성을 지시
도산공원은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에 자리한 근린공원이다.
1970년 3월 1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 나라 자주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애국정신과 민중의 교화를 위한 교육정신을 국민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자 도산공원을 조성할 것을 지시한다. 이에 서울시는 1973년 강남구 신사동에 약 1만여평 공원을 조성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선생의 유해를 이장하는 동시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하였다.
그 후, 성동구 청담동에서 논현동에 이르는 노폭 50m 연장 3250m의 신설가로를 도산대로로 명명하였다.
[1959년] 티베트 라싸에서 반중국 봉기 발발
← 티베트 창포(브라마푸트라) 강 기슭의 스투파
1959년 3월 10일 티베트 라싸[拉薩]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인 노불링카 주변에서 중국인민해방군으로부터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곧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맞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봉기로 전개되었고 이에 폭력사태를 우려한 달라이 라마는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을 촉구하고 중국에는 폭력진압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진압이 불가피함을 깨달은 달라이 라마는 3월 17일 저녁 라싸를 떠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고 중국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무력진압했다. 이어 3월 28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티베트 정부 해체를 발표했고, 달라이 라마는 즉각적으로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부인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이 봉기를 진압한 후 중국은 티베트 사회를 강제로 개조하려 했다. 귀족과 사찰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인민공사 방식을 도입했고, 티베트 불교에서 거행하는 공공 집회를 완전히 통제했다. 이 사건 직후 인도에 세워진 티베트 망명정부는 독립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브리태니커
[1959년] 제1회 노동절 행사 거행
1959년 3월 10일 제1회 근로자의 날 행사가 거행됐다. 대한노총이 발족되면서 근로자의 노고를 범국민적으로 위로·격려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인 1920년대부터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해왔으나 대한노총이 발족하면서 노동조합연합회 결성일인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할 것을 결의, 이날 행사를 처음 거행했다. 그 뒤 1963년에 제정· 공포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에 의거, 3월 10일이 노동절 아닌 ‘근로자의 날’로 공식 지정됐고, 1964년부터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은 법정 유급 휴일이 됐다. 하지만 1994년 5월 1일 노동절이 공식 부활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메이 데이(May Day)’로 알려진 5월 1일 ‘세계 노동일’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는 데 성공한 날을 기념하여 정해진 날이다. /조선
[1938년] 도산 안창호 선생 별세
← 도산 안창호 선생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구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는 평생을 항일 구국운동으로 일관해온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독립정신의 화신이자 민주주의의 선구자요, 위대한 정치가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향년 60세를 끝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친 것이다. 평생 신명을 바쳐 목마르게 기다리던 조국의 광복을 불과 7년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도산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성리 도롱섬에서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9세 때부터 사당에 다니며 한문을 수학했는데 16세 때 두세살 위인 필대은이란 청년 선각자를 사귀게 되어 세계 정세와 나라일에 크게 눈뜨게 됐다.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등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본 그는 힘없는 나라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애국의 뜻을 키우게 됐다.
도산은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해 초창기 임정의 기반조성에 주력했다. 1923년 임정내부의 분열을 수습하고 민족운동의 통합과 임정개조를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으나 창조파 등 좌익의 반대로 실패한다. 1926년 독립운동의 역량을 통합시켜보려고 중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창립을 선도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 경찰에 체포, 서울로 압송된 도산은 4년형을 받고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돼 고초를 겪으면서 중병을 얻어 보석, 입원 중 파란많은 일생을 마쳤다.“목인(일본 명치천황의 이름)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다” “낙… 심… 마… 오…” 이것이 도산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조선
[1933년] 루스벨트 미국대통령 뉴딜정책 발표
← 미국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왼쪽)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33년 3월 10일 ‘뉴딜정책’을 발표했다. 1933년 제3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 1934년 3월 4일 루스벨트가 취임했을 때 미국은 남북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인 대공황에 직면해 있었다. 매일 수 천명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고 은행 80%가 더 심한 금융공황을 막기 위해 문을 닫았다.
절망과 두려움, 두 단어가 국민들을 휩싸고 있었다. "우리가 두려워할 유일한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취임사에서 행한 일성이었다. 취임 이튿날 첫 조치는 나흘간 은행휴업이었다. 재무상태가 취약한 은행 200여개를 없애고 예금은 새로 발족한 연방예금보증공사에서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금융신뢰가 회복됐고 사장되어 있던 10억 달러 이상이 경제로 흘러들어왔다. 생산과잉으로 빚어진 대공황이었다. 농업조정국은 농부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6백만마리의 돼지를 도살케하고 면화경작지를 1,000만 에이커 이하로 줄이도록 했다.
경제는 최악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뉴딜계획’은 희망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935년 4월 루스벨트는 공공사업국(WPA)을 설치해 건설사업을 펼쳤다. 일자리를 만들어 유효수요를 창출하려는 시도였다. 케인즈경제학에 따른 것이었다. 110억 달러의 자금으로 미술가, 문필가에서부터 벽돌공에 이르기까지 850만명을 공익사업에 투입했다.
뉴딜은 그러나 공황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1938년에도 실업자는 여전히 1000만명에 달했다. 뉴딜은 일관성도 없었고 효율성에도 의문을 남겼다. 하지만 자본주의 그 자체를 구했고 다른 나라들이 전체주의로 돌아설때 미국을 자유국가로 지켜주었던 ‘확실한 지렛대’였다./조선
[1921년] 교육가 김옥길(金玉吉) 출생
1921. 3. 10 평남 맹산 ~ 1990. 8. 25 서울.
1936~38년 평양숭의여자중학교에 재학했으며, 1940년 평양서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이화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1952년 미국 웨슬리언대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미국 템플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 부교수를 시작으로 평생을 이화여자대학교와의 관련 속에 지냈다. 1961~79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1964년 기독교학교 연합회 이사장, 1965~79년 한국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 1966~79년 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이사, 1970~80년 다락방전도협회 회장 및 재단법인 기독교방송 이사 등을 지냈다. 1970년 기독교복음화운동본부 부회장, 1972~83년 사회복지법인 한국어린이 재단 이사, 1974~82년 재단법인 산학협동재단 이사, 1976~79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 1978~79년 민족문화추진회 이사 등을 지낸 뒤, 1979년 문교부장과에 임명되어 국제연합한국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1979~90년 이화여대 명예총장 및 이사장, 1987~90년 재단법인 김활란장학회 이사장, 1988~90년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과 1982년 인촌 문화상을 받았고, 1976년 필리핀에서 마리아 클라라상과 1983년 뉴욕의 유니온신학대학교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저서로 〈예수의 생애와 교훈〉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20년] 국어학자 남광우(南廣祐) 출생
1920. 3. 10 경기 광주 ~ 1997. 12. 6 서울.
호는 난정(蘭汀). 필명은 남정(南汀).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수원대학교 대우교수,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대표이사. 1938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46년 4월까지 경기도 이천 제일국민학교, 황해도서흥 대화국민학교, 경성 죽첨국민학교(지금의 서울 금화초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6년 8월 경성대학 예과 부설 중등교원양성소 국문과를 수료하고 경성공립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대구고등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 대구사범학교(지금의 대구교육대학) 교사 및 대구사범대학(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56년 경북대학교, 1956~73년 중앙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69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이조) 한자음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인하대학교로 옮겨 12년 동안 재직하다가 1985년 정년퇴직했다. 〈고어사전〉(1960, 1971)·〈동국정운식 한자음 연구〉(1966)·〈조선(이조) 한자음 연구 ─ 임란 전 현실한자음을 중심으로〉(1969)·〈현대국어국자의 제문제〉(1970, 1973)·〈한국어의 발음연구 Ⅰ〉(1984)·〈한국어의 발음연구 Ⅱ〉(1984) 등 한자어·한자음 및 국어의 표준발음에 대한 저서와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그밖에 〈새중등문법〉(1960, 공저) 등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살 맛이 있다〉(1973)·〈정 情〉(1984) 등의 수상집(隨想集)이 있다. /브리태니커
[1916년] 시인 박두진(朴斗鎭) 출생
1916년 3월 10일 태어남 / 1998년 9월 16일 죽음
"시인의 자세란 결국 한 시인의 삶의 자세, 진실과 영원을 대하고 역사와 현실을 대하는 그 정신이나 자세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시는 결국 그 시인의 삶과 생각, 정신과 인격의 모두를 거는 것이고, 이러한 인간적 진실과 시적 진실이 만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는 완성되는 것이다." - 박두진
박두진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초기에는 자연을 읊다가 차츰 사회현실에 대한 의지를 노래한 시인이다. 호는 혜산(兮山). 생애와 활동
1948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49년에 결성된 한국문학가협회에 가담해 민족주의계열의 문학건설에 힘썼다. 1955년 연세대학교 전임강사가 된 뒤, 1959년 조교수로 취임했다가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대한감리회 신학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 출강했으며,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같은 해 다시 연세대 교수로 취임해 1981년 정년퇴임했다. 그 뒤 단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가 1986년 추계예술학교로 옮겼다. 문학세계
193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문장〉에 시〈향현 香峴〉·〈묘지송〉·〈낙엽송〉·〈의 蟻〉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어 〈문장〉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는데, 그를 추천한 정지용은 '삼림(森林)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만열이상(滿悅以上)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1946년 박목월·조지훈과 〈청록집 靑鹿集〉이라는 공동시집을 펴냈는데, 여기에 실린 그의 시들은 질식할 듯한 일제 말기의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자연에 친화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종교적 기다림을 노래한 것이다. 이후 〈바다로〉(백민, 1947. 2)·〈햇볕살 따실 때〉(학풍, 1949. 2)·〈산(山)아〉(민성, 1949. 5) 등을 발표하고, 1949년에 개인시집으로는 첫번째인 〈해〉를 펴냈다. 이 시들은 자연의 순수한 생명력과 교감하면서 생기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친화력을 부드러운 산문 형식에 담아낸 것이다.
그의 시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변하는데, 시집 〈오도午禱〉(1953)·〈거미와 성좌〉(1962)·〈인간밀림〉(1963)에 이르러 인간의 자유와 절대자에 대한 갈망을 반복되는 관념적 언어로 읊었다. 그 뒤 4·19의거를 겪으면서 민족의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시 〈우리는 아직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사상계, 1960.6)·〈우리들의 8·15를 4·19에 살리자〉(국제신보, 1960. 8. 15) 등을 발표했다. 이러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격정을 보여준 시세계는 계속 이어져 시련을 겪으면서도 끊이지 않는 민족적 생명력을 읊은 〈아! 민족〉(현대문학, 1971. 4)과 같은 장시를 통하여 조국애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또 다른 암흑의 시기에 시인의 현실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자연과 신앙의 심미적 절대화에 머물지 않고 10월유신과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격동기에 시인이 지켜야 할 자세와 비판정신을 보여주었다.
시집으로 〈박두진시선〉(1956)·〈사도행전〉(1973)·〈하늘까지 닿는소리〉(1973)·〈수석열전 水石列傳〉(1973)·〈야생대〉(1981) 등과 시선집으로〈청록집 기타〉(1968)·〈청록집 이후〉(1968)·〈예레미야의 노래〉(1981) 등이 있다. 그밖에 수필집으로 〈시인의 고향〉(1968)·〈언덕에 이는 바람〉(1973) 등과 시론집으로〈한국현대시론〉(1970) 등이 있다. 1982년 범조사에서 〈박두진전집〉을 펴냈다. 1956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0년 3·1문화상, 197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8년 인촌상,1989년 지용문학상 등을 받았다.
[1905년] 독립운동가, 혁명가 김산(金山, 본명 張志樂) 출생
← 김산(1927)
1905. 3. 10 ~ 1938. 10. 19
김산(1905년 ∼1938년)의 본명은 장지락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본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1938년 일제의 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캉셩(康生)의 지시를 받은 중국 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 조직 보호를 위해 한동안 출판을 미뤄달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웨일스는 1941년에 미국에서 아리랑을 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200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에 중국에 사는 그의 외아들을 초청하였다. 2005년 7월에 KBS에서는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하였다. /위키백과
본명인 장지학보다 별칭인 김산으로 더 유명하며,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장지락으로 등장한다. 김산은 1905년(고종 42) 3월 10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1세 때인 1916년 가출, 1919년부터 이듬해까지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같은 해 쑨원이 세운 황푸군관학교와 중산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공산당에 입당한 뒤, 이듬해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였다. 1925년 중국대혁명에 참가한 뒤, 다음해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하였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같은 해 11월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났다. 이후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및 소학교 교사로 생활하다가 1933년 4월 중국 경찰에 붙잡혀 1934년 1월 탈출하였다. 이어 공산당 북부지구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하였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화학·수학·일본어·한국어를 강의하는 한편, 같은 해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미국의 신문기자 에드거 스노(Edgar Snow)의 부인 님 웨일스(Nym Wales)를 만나 3개월 동안 20여 회에 걸친 구술을 통해 그의 혁명적 생애를 다룬 《아리랑 Song of Ariran》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이듬해 캉성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이 출판되었고, 이후 1946년 한글로 초역된 이래 일본어로 11판까지 번역·출간되었으며, 1987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어로 완역되었다. 웨일스는 그를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으로 격찬하였고, 1984년 1월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소설 작품으로 《백의동포의 영상》이 있고, 《한 해 동지를 조문하여》 《동지들이여 싸우자》 등의 장시와 여러 편의 칼럼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2002년 12월 8일 《아리랑》 초판본이 처음 공개되었고, 그를 기념하기 위한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898] 만민공동회 개최
← 독립협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드는 군중들의 모습
1898년 3월 10일 약 1만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최초의 만민공동회가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에서 개최되었다. 시민들은 육의전 가운데 하나인 백목전에서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구하는 등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했다. 이 집회는 대한제국 정부의 러시아 고문단 철수와 한러은행 철폐조치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이후 거의 날마다 개최된 만민공동회는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서 독자적인 민중운동으로 성장해갔다. 해방된 천민인 백정 박성춘이 개막연설을 한 1898년 10월 29일 집회에서는 민권신장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의6조'를 결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한편으로 탄압에 나서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보부상들을 이용해 무력으로 탄압했다. 만민공동회는 신분해방의 생생한 현장이자 제국주의 경제침탈로 피해를 입는 도시소상인·소수공업자·빈민 및 일부 지식인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중정치투쟁으로 평가받는다./브리태니커
[1876년] 독립운동가 장인환(張仁煥) 출생
← 장인환, 1907년
1876. 3. 10 평양~1930. 5. 22.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도움으로 생활했으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4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2년 동안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7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1907년 3월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의 단결과 민지(民智)의 계발을 목적으로 장경(張景) 등이 만든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 가입했다. 1908년 3월 20일 한국정부 외부고문(外部顧問)인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친일 발언을 하자 스티븐스를 처형하기로 결심했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 D.C.으로 떠나는 길의 스티븐스를 공격하려 하던 중 같은 목적으로 대기하던 전명운(田明雲)이 먼저 스티븐스와 격투를 벌였다. 그는 권총 세 발을 발포하였는데, 한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잘못 맞았고 나머지 두발을 맞은 스티븐스는 중상을 입어 이틀 후 사망했다. 전명운과 함께 거사 후 체포되었다. 미주 내 한인사회는 이 의거를 기화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고 나아가 국내외를 통한 국권회복운동의 전기로 삼아, 재판비용을 모금해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정투쟁을 했다. 당시 그의 재판을 맡은 변호사 네이던 코플랜(Nathan Coughlan)은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애국적 정신병(patriotic insanity) 이론을 근거로, "이 사건은 일종의 정신 질환 상태에서 저지른 것이므로 범죄가 될 수 없다"고 항변했다. 25년의 금고형을 받고 10년간 복역한 후 1919년 1월 17일 석방되었다. 미주 한인사회는 그를 애국지사로 크게 환영했으며, 출옥 후 주위의 도움으로 세탁소를 차려 생활했다. 1927년 귀국하여 사회사업을 계획하다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1930년 5월 22일 병으로 입원치료 중 3층 창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재미교포의 사회장으로 샌프란시스코 근교 사이프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1975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864년] 동학 창설자 수운 최제우(崔濟愚) 대구서 처형
1824. 12. 18 ~ 1864. 3. 10
동학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선생이 1864년 3월 10일 효수됐다. 경주의 몰락한 양반 후손 출신으로 어릴적 성리학을 공부한 그는 조선왕조에 대한 비판의식과 유교와 불교, 선교의 장점을 융합,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하느님을 모신 존귀한 인격이라는 시천주 사상을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그의 포교활동은 1860년대 초 몇 년 간으로만 국한되지만, 영남과 호남은 물론 충청도와 경기도까지 교세가 급속도로 확대됐다. 천주교의 한 파로 탄압받다가, 1863년 11월 경주에서 사악한 가르침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사도난정)는 죄목으로 체포돼 이날 대구에서 효수됐다. 문화관광부는 선생을 1998년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조선
그밖에
2003년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하늘꿈학교’ 천안서 개교
2003년 CNN 동해 해역을 ‘일본해’와 ‘동해’로 동시표기
2003년 보건복지부, 의·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유전자 검사 금지
2003년 북한, 지대함 크루즈 미사일 함남 해안서 동해로 발사
1998년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재선(7선)
1994년 종로5가 통신 광케이블 화재로 통신-정보-금융망 마비
1991년 91삿포로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폐막 - 한국3위
1991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 50만명, 고르바초프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
1990년 이열우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3년 미국, 200해리 경제수역 선포
1982년 한국데이터통신(주) 창립
1982년 태양계 9개 행성이 일적선으로 우주기현상 발생
1981년 사우디 등 6개국, 페르시아만 협력회의(GCC) 헌장에 가조인
1981년 서울대 김원룡 교수팀, 강원도 춘성군 의암서 고구려 석실토총
1977년 경주서 선사시대 주거지 발굴
1976년 명동사건 관련자 11명 입건
1975년 기자협회보 등록 취소
1973년 올가 코르부트 체조 연기
1973년 유신정우회 창립총회
1972년 에콰도르 새 군사정부 출범
1969년 변영태 전 국무총리 사망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국회 비준
1965년 월남파병 비둘기부대 인천항 출발(16일 사이공 도착)
1965년 중국 핵실험 규탄대회
1964년 동경서 한일어로협상 개최
1962년 한국-콜롬비아, 국교 수립
1962년 창경원 케이블카 개통
1956년 영국 전투기 최고 속도 기록
1953년 조훈현 한국의 바둑인 출생
1952년 쿠바 바티스타, 쿠데타
1949년 지방자치법 국회 통과
1946년 대한노총 결성
1946년 동양척식회사 폐지, 신한공사 설립
1945년 미군 B-29기 동경 대공습
1939년 일본군, 海南島에 기습상륙
1937년 총독부 강권에 의한 간도 이민 실시
1923년 중국, 중일조약 폐기 통고
1876년 그레이엄 벨, 세계 최초로 전화실험 성공
1873년 도덕적 열정과 선정주의적 경향을 가진 독일의 소설가 바서만 출생
1853년 청나라 태평천국군이 남경을 점령하고 수도로 함
1845년 러시아 민족주의를 지지한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출생
1844년 스페인 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 파블로데 사라사테 출생
1772년 독일 인도학의 개척자인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 출생
1628년 이탈리아의 의사.생물학자 말피기 출생 - 미시해부학의 기초 마련
1538년 노퍽 출생 -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항한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고 처형당한 잉글랜드의 귀족
1503년 페르디난트 1세 출생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이기도 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315년 라마티보디 1세 출생 - 타이의 법률제도의 기초를 세운 타이 아유타야 왕조의 창건자이자 첫 번째 왕(1351~69 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