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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87
11월27일[연중 제3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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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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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AEvDU0D0OI
[서울대교구 고태경 마태오 신부님 집전(가락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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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제와 수도자들의 헌금>
거룩한 수녀님들의 연피정을 동반해드리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수녀님들과 함께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정성과 진심이 가득 담긴 거룩한 미사입니다. 잘 준비된 성가에 깨어 몰입하고 집중하는 미사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오늘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빈곤한 과부를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사제가 된 후에는 동전 두 닢조차 헌금함에 넣어본 적이 없는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수도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아무것도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 송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 한 가지! 사제나 수도자로서 비록 현찰을 헌금함에 넣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헌금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로서 더 정성껏 집전하는 것은 또 다른 헌금입니다. 수도자로서 더 정성껏 미사를 준비하고, 더 감미로운 선율로 성가를 부르는 것 또 다른 형태의 봉헌입니다.
언젠가 한 수녀원 본원 부활 성야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매사에 모범생이신 수녀님들께서 성야 미사를 얼마나 잘 준비하셨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수녀님들께서는 교회에서 제시하는 성대한 전례 양식을 단 하나도 빼먹지 않고 준비하셨습니다.
모든 전례 성가는 라틴어로 노래했습니다. 말씀의 전례 시간에 통상 첫째, 셋째, 다섯째, 세 독서로 축약해서 진행하는데, 수녀님들께서는 일곱 독서를 다 준비했습니다. 매 독서 끝에는 잘 준비된 성가를 계속 불렀습니다.
자연스레 미사 시간은 두 시간 반 이상 길어졌습니다. 사제석에 앉아 있던 저는 적응이 잘 안되다 보니, 처음에는 꽤 불편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부활성야 미사 전례에 깊이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든 한가지 생각, 언젠가 우리가 만끽하게 될 하느님 나라는 부활 성야 미사 같지 않을까? 하느님 말씀이 계속 선포되고, 예수님의 명 강론이 이어지고, 천상에 운집한 수많은 성인 성녀들과 천사들,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의 찬미가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런 하느님 나라.
그런데 자매님 손에 강제로 이끌려 부활 미사 성야에 앉아 있는 한 형제님의 얼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된 분이어서 그런지 세상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시간이 점점 길어지니, 그분의 얼굴은 마침내 지옥 불 속에 앉아 있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어떤 분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나라에 초대받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천상잔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평소 천상 잔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평생토록 소비향락주의, 물질만능주의에 푹 빠져 잘 먹고, 잘 놀고,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그 자리 자체가 지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부터 마치 부활 성야 미사 같을 천상 잔치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슬슬 다른 쪽 한발을 천상 쪽으로 들여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가난한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연습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것 저것 너무 복잡하게 따지거나 생각하지 말고, 전폭적으로 그분께 맡길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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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봉헌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40세에 천억 부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 젊은 나이에 천억이나 벌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40세 천억 부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3가지만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습니다. 첫째 약속은 꼭 지켜라. 둘째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어라.” 그러자 사람들은 “그런 건 누구나 다 아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인데?”라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때 그는 3번째 습관을 이야기했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셋째, 저는 ‘거래하는 파트너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이것만 연구했습니다.”
논어에도 “내가 일어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일으켜 세우고 내가 성공하고자 하면 먼저 남이 성공하도록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조: ‘천억을 부르는 3가지 습관’, 북올림, 유튜브]
어떤 조리사가 사장에게 앙심을 품고 가게를 망하게 하려고 조미료를 과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히려 더 몰려드는 것이었습니다. 망하면서까지 더 퍼주려고 하면 자기가 더 잘 되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이 법칙을 안다고 다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오늘 과부는 어떻게 자기 생활비의 전부를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었을까요?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봉헌에 의해 측정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을 전부 주셨는데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것은 자신의 힘으로 챙겨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소득의 십 분의 일도 바치기 어렵습니다.
과부가 가진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말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받으시고 그냥 계시지 않으실 것을 안 것입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굶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는 것은 또한 하느님을 남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은 가족입니다.
서로서로 다 내어줄 수 있을 때 남남이 부부가 됩니다. 인간관계의 친밀도는 내가 사람들을 얼마나 자비롭게 보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느님을 자비롭게 볼수록 하느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것입니다. 남남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내어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당신도 아버지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러니 내가 봉헌하는 것이 남인 그리스도에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품고 계신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진 사람은 봉헌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 같아 아깝지 않습니다.
봉헌하는 것이 십자라가 하면 되돌려 받는 것이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로 이어지기에 결국 내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봉헌하는 것이 됩니다.
자비를 믿는다는 것은 부활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 부활시켜 주실 것도 믿기 때문에 더 많이 봉헌하게 됩니다.
봉헌을 통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을 키우는데 봉헌만큼 큰 도구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헌금통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많이 바치는 과부를 찾으십니다. 당신을 더 내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관계의 친밀성과 직결되기에 결국 사랑으로 바치는 봉헌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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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입은 적게 열고, 지갑은 자주 열어야 한다.” 어찌하다 보니 제가 선배들이 말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적당히 지갑은 열수 있을 만큼 채워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신문사의 구독신청서를 보내주는 봉사자들과 식사가 있었습니다. 칠레와 호주에서 온 신부님들과의 식사도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과의 모임도 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지갑을 열었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 신부님께서는 제가 첫 본당의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임진강에는 매운탕이 맛있다고 하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들 사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먼 길을 오셨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가시는 길에 제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가난한 과부처럼 저도 과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면 기쁜 마음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아나니야, 미사엘, 아자르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야채와 물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살도 찌고,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의 제단에 정성껏 봉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랑입니다. 재물과 시간과 능력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놓는 사랑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두 번째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들어도 우리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하셨던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10월에 꾸르실료 체험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체험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체험하시는 분들이 가난하지만 정성껏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저는 말로는 봉사한다고 하지만 위선과 가식에 가득한 생활을 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의 제단에 정성껏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봉헌은 많이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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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1월27일 [연중 제34주 월요일]
복음: 루카 21,1-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 궤가 13개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나팔 궤 가까이 앉으시어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그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이 가진 돈이라고는 엽전 두 닢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다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돈은 그 과부가 가진 것 전부였기 때문이다(3-4절 참조). 이 과부는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심판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여인이다.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과부가 내놓았으니, 그런 칭찬을 들었다. 가난한 이들도 마땅히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이를 어여삐 여기신다. 이러한 예물이 하느님의 예물이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하느님의 예물 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음을 지적하셨고,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하느님을 돕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과부의 렙톤 두 닢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바친 손이었다. 그 과부야말로 거룩하신 심판관께 최고의 칭찬을 들어 마땅한 사람이다. 마음으로 기꺼이 바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참된 제물이다. 주님께서는 부자의 많은 예물보다 가난한 자가 사랑과 열성으로 바친 예물을 더 즐기신다. 과부의 가난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는 풍요로운 부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 주라며 내놓은 두 데나리온(루카 10,35)도 그런 돈이다. 가난한 과부는 병자들이 치료받고 주린 이들이 배를 채울 예물을 헌금 궤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여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표상이 되었다. 친절을 베풀어도 온유해지지 않는 심술궂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선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선행 역시 헛수고로 끝나는 법이 없다. 선행에 낯선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지다. 모든 동정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그분은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 사랑을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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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번 주 제1독서로 다니엘서가 봉독됩니다. 전례력의 끝자락에 읽는 이 책은 어떤 메시지를 전합니까? 다니엘서는 구약 성경 가운데 비교적 나중에 쓰인 책으로 분류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의 저자는 이 책을 알고 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1마카 1,54; 다니 9,27; 11,37 참조) 다니엘서의 저자는 ‘하시드인들’이라 불리는 경건한 유다인 그룹에 속하는 듯 보입니다. 현재 상황을 뒤집으시며 당신 통치를 확립하실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고, 아직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만큼 적극적으로 ‘이교 풍습’에 저항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니엘서는 당시 통용되던 두 가지 문학 유형(‘학가다’라는 교훈적 이야기와 묵시 문학)으로 이루어집니다. 교훈적 이야기는 신학적, 도덕적, 지혜 문학적 가르침을 독자에게 제공하고자 활용되는 방식으로, 이야기 속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잘 파악하여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신앙적 박해와 세상 권력이 현실에서 득세하는 현재 상황에도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개입하실 ‘마지막 때’, 곧 종말에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많은 상징과 함께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안에는 고통받는 선인에 대한 위로와 악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교차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이 곳곳에 있는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그리고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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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이 이야기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ㄷ-30)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그 과부가 자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가난한 이와 부자들이 대조되어 있는 것으로, 또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친 이와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만 바친 이들이 대조되어 있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고, 사실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만일에 가난한 과부가 마음으로는 렙톤 두 닢을 다 바치고 싶어 하면서도 어떤 사정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한 닢만 바쳤다면?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부자가 거액의 전 재산을 봉헌했더라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마태 6,1)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의 위선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런 사심 없이 전 재산을 봉헌하는 부자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바르나바 요셉’이 그런 부자였습니다.(사도 4,36-37)>
따라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가 ‘가난한 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부자’라는 것도, “전부 바쳤느냐? 일부만 바쳤느냐?” 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바쳤느냐?”입니다. 또는 “주 하느님을 얼마나 믿고 사랑하는가?”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간접적으로 꾸짖으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이라는 말씀은, 사실상 부자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풍족하게’ 사는 것 자체를 꾸짖으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의 마음이(믿음과 사랑이) 백 점 만점에 백 점이라면,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마음은(믿음과 사랑은) 백 점 만점에 몇 점이나 될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을(믿음과 사랑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나의 봉헌을 남들이 어떻게 평가할까?” 같은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고, 주님께서 나의 마음속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모든 것을 다 바치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나의 사정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라고 강요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가난한 과부’의 정반대쪽에 있는, 그리고 아주 선명하게 대조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 것이었고, 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사도 5,1-4)
그 두 사람은 재산을 전부 바치는 것은 싫으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영예는 얻고 싶고, 두 가지 욕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일부만 바치면서도 전부를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죄이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영예를 얻고 싶어 한 그 욕심도 죄이고, 재물에 대한 욕심도 죄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하나니아스와 사피라가 마음속으로는 바치기 싫으면서도 실제로는 전 재산을 바쳤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위선도 당연히 죄가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주 첫날에 저마다 형편이 닿는 대로 얼마씩을 자기 집에 따로 모아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갔을 때에야 모금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1코린 16,2) 여기서 중요한 말은 ‘형편이 닿는 대로’ 라는 말입니다. <각자의 형편이 어떤지는 남이 판단할 일이 아니고, 본인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도착한 다음에 급하게 모금을 하면, 체면 때문에 억지로 헌금을 하는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모금이 아니라, 강제 징수가 될 수도 있고, ‘사랑 실천’을 위한 모금이 위선자만 양산하는 일로 변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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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다니엘의 지혜(다니엘 예언서의 시작 1,1-6.8-20), 가난한 과부의 모델(루카 복음 21,1-4)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낸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는 성서 주간을 맞아 평화를 주제로 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는데,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는 말씀에 따라서,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자고 전국 신자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세상은 정의가 실현되지 못해서 평화가 위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씨앗으로 삼아 평화라는 열매를 맺고자 하기는커녕, 불의한 현실은 그대로 두면서 무기와 군대라는 힘으로만 평화를 지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사랑이 가득 차게 하지 않으면, 세상 끝 날까지도 무기가 필요없어 지고 전쟁이 사라질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첫인사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26)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면 그분의 지혜가 주어질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고자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하느님 없이 돈을 섬기며 살아가는 부자 청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과 힘에 따라 살아가는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전 재산도 아낌없이 바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넉근히 받으셨습니다.
다니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요, 가난한 과부는 교회의 모델입니다. 흔히 우리는 돈을 쓰는 지혜보다는 버는 지혜에 목을 매달다시피 노력하는가 하면, 가난한 과부의 모범은 교회보다 부자나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천동설이 그럴 듯 보여도 지동설이 옳은 것처럼,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고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돈을 더 잘 씁니다.
이렇듯 성서가 가르치는 이러한 지혜는 역설적입니다. 교회가 돈에 인색한 부자를 닮기보다는 나눔에 관대한 가난한 과부를 닮기를 바라셨던 예수님의 뜻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돈에 관해 천박한 풍조가 만연한 세상에 대하여 관대한 나눔으로 평화를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에 대한 명쾌한 정답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귀띰해 주고 가셨습니다.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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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넣었다."(루카 21,1-4)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열왕기 상권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서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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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저 빈곤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3)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비행을 질책하신(루카 20,45-47)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들이 멸시하는 빈곤한 과부의 봉헌이 더 경건하다고 가르치십니다.
과부의 처신을 통해 영성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성전의 ‘여인들의 뜰’ 입구에는 보물 창고와 나팔 모양의 열세 개의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와 권력가들은 쓰고 남은 일부를 바치고,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의무감에서 헌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십니다.(루카 21,2-3)
과부가 봉헌한 렙톤 두 닢은 로마 돈으로 환산하면 동전 한 닢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미미한 액수를 바친 과부를 오히려 칭찬하십니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영성생활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지향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많은 기부와 봉사와 선행을 해도 명예욕이나 다른 이득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다면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슬프게 해드릴 뿐입니다. 어떤 일이든 일 자체도 의로워야 하지만 그걸 행하는 지향도 하느님 뜻에 맞고 순수해야 할 것입니다.
과부는 빈곤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였던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과 삶의 뿌리를 주님께 두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액수는 적었으나 오직 하느님만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바친 것입니다. 그녀는 빈곤했으나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였기에 사랑하는 분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사랑한 만큼 내놓을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전부를 봉헌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약을 했지만 어느 새 자신을 위해 뭔가를 챙기려 하는 나를 봅니다. 피곤할 때 누울자리가 생각나고,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 여겨 책과 물건들을 쌓아두곤 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기준에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먼저 챙기면서 다른 이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미루기도 합니다. 또 조건이 갖춰진 다음에야 자신을 내놓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과부처럼 순수한 사랑으로 '지금' 바로 내놓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과부가 보잘 것 없었지만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듯이 내 존재 전부를 아낌없이 봉헌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전인적 봉헌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나의 존재 전부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간, 돈, 은사, 재능 할 것없이 내 것이랄 게 없을 것입니다. 전부를 내놓을 때 주님께서는 전부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거룩한 사랑의 교환’입니다.
온갖 선이요 으뜸 선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되돌려드릴 때 비로소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우리가 찾는 행복입니다.
지금이 바로 조금 내놓고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겠다는 망상을 떨쳐버릴 때입니다. 오늘도 주님께 대한 순수한 지향과 사랑으로 나의 전부를 기꺼이 봉헌하는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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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헤아리시는 예수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자주 비교하게 됩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도 전임 본당과 견주게 됩니다. 추수 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식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한 적이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믿음을 성장 시켜드리지 못했으면서 말입니다. 예물에 매이지 않고 믿음에 마음의 중심을 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명절이 되면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촌이나 누나로부터 용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쁨 중의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액수가 많고 적음에 관계하지 않고 그저 받는 것이 좋았습니다. 때로는 돌아서서 액수를 헤아리며 ‘에게, 요것밖에 안돼!’하며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속마음은 욕심이 가득했습니다. 받는 것도 익숙해지면 결국 감사함도 잊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에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는 마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돈의 액수보다 마음을 헤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성보다 돈의 액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제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수녀원과 교육관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돈의 액수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었습니다. 물질에 약한 저를 보며 다짐했습니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지 말자! 물질의 봉헌을 억지로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믿음이 성장하면 모두가 주님 것이니 믿음을 키우는 것에 마음을 두자. 믿음의 성장에…그러고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두를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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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어머니가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이가 좀 이상하다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화하신 것입니다. 아이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덜컹 겁이 났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은 자폐 아동의 특징 중 하나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말할 때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도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보면 자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며칠 뒤,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아이와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양육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정리하느라 잠시도 쉴 수 없었고, 여기에 두 살 터울의 둘째까지 생기면서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소통할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의 말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자기 모습을 깨닫고 아무리 바빠도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눈 맞춤이 자연스러워진 아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눈맞춤이 불가능해집니다. 이것도 봐야 하고, 저것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상대도 내 눈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보느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자기를 몰라 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항상 유심히 바라보시고, 우리의 눈을 마주치십니다. 그 점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사람을 보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유심히 바라보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선이 이 한 번일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유심히 그리고 눈을 마주치시면서 보십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의 부자들처럼 보여주기 위한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과 눈을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요?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모두 드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주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서로 눈맞춤 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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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드립니다>
루카 21,1-4 (가난한 과부의 헌금)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나를 드립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사랑하는
나의 님께
무얼 드리나
곰곰이 헤아리다
아무리 보아도
볼품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보잘것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어도
달리
가진 것이 없고
딱히
그만한 것이 없으니
살며시 고이
나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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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모순의 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모순 1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모순적이고 합리화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조금 봉헌하는 저도 주님께서는 칭찬하실 거라고 하면서 저는 장학금에 성금을 조금 내는 것보다 많이 내는 것을 반깁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생각하며 그런 저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며, 즉시 적은 성금에도 그것을 크게 감사하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모순 2
그런데 이것보다 더 부끄러운 모순이 제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많은 돈을 봉헌하는 부자들보다 적은 돈을 봉헌하는 과부를 칭찬하시는데 그것을 보고 저는 위안을 받고 안심도 합니다.
적게 봉헌하는 저도 나무라지 않고 칭찬하실 거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런데 저는 적게 낼 뿐 과부처럼 전부를 봉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부를 봉헌하지 않는 저에 대해서는 살짝 눈을 감고, 조금 봉헌하는 저만 합리화하는 데 과부를 끌어들이는 셈입니다.
이런 저에게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전부를 주시는 분에게 과부처럼 전부를 봉헌하는가? 전부를 바치는 분에게 프란치스코의 권고처럼 전부를 바치는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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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자기인식의 겸손과 지혜, 자유와 행복-
참 기쁨과 참 행복은 참 나의 발견에, 자기인식의 겸손과 지혜, 자유와 행복에 있습니다. 참 중요한 것이 참 나를 아는 것이요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좋은 시는 늘 읽어도 새롭습니다. 어제 온종일 저를 기쁘고 행복하게 한 자작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참나를 발견케 한 “詩가 찾아왔네!”라는 시입니다.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 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 없을 것이네
나 언제나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이라네”
2023.11.26.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님께 바치는 獻詩-
주님을 사랑하듯 시를, 삶을 사랑해 왔기에 시는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님께 선물 받은 시이자 동시에 주님께 바친 헌시가 한동안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중요한 근본적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이며, 끊임없이 물으며 정체성을 또렷이 하는 자기인식이 참겸손이자 참지혜요 참기쁨이자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알아갈수록 자유롭고 평화롭고 부요하고 행복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근본적 질문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는 공통적 물음입니다. 이래야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나 참나의 행복을 살 수 있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자기를 모른 채 무지와 허무속에서의 삶이라면 너무나 허망하고 억울한, 헛된 삶일 수 있습니다. 참 자기를 발견했을 때의 참기쁨, 참행복이지, 연목구어(緣木求魚) 다른 어디서도 이런 참기쁨, 참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이래서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아갈수록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를 알아가게 되며 이때 저절로 따라오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말씀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와 제1독서 다니엘서의 네 청년이 그 모범입니다. 가난한 과부인 듯 하나 역설적으로 진짜 부자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네 청년입니다. 가진 소유가 많아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부자입니다.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자가 진정 부자이니 가난한 과부가 그러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감동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에서 분명 모든 것을 바친 자기를 발견했을 주님이십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기에, 만족하기에, 행복하기에 이렇게 온전히 소유를 비울 수 있었던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요즘 초겨울로 접어들어 나뭇잎들을 다 떠난 겨울나무가지들을 통해 투명히 드러나는 불암산이, 푸른 하늘이 참 좋습니다.
가난한 겨울나무가 역설적으로 부요한 겨울나무임을 깨닫게 되며 그대로 이런 겨울나무를 닮은 가난한 과부입니다. 얼마전 나눴던 25년전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 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 열매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1.21.
그대로 가난하나 역설적으로 하늘로 가득한 부요한 겨울나무를 닮은, 하느님만으로 충만한 가난한 과부가 진짜 부자임을 깨닫습니다. 겨울 나무처럼 텅빈 하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은 자가 부자이며 참보물 하느님 하나만으로 행복한 가난한 과부가 진정 자유로운 부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유로 채워도 영혼의 허기(虛飢)는 여전하니 하느님 사랑이 결핍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빌론 유배중인 이스라엘의 네 청년 역시 행복의 비결은 하느님이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유지가 참 지혜, 참 자유, 참 행복의 비결임을 봅니다. 정체성의 훼손이야 말로 불행의 첩경입니다. 정체성 상실은 그대로 참나의 상실로 직결됩니다. 정체성은 생명이기에 하느님 향한 사랑의 정체성을 죽음으로 지켜낸 분들이 순교성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여 목숨을 걸고 정체성을 지켜낸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 네 젊은이들을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지혜롭고 겸손하고 부요하고 행복한 참나의 발견이요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만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겸손하고 지혜로운 참부자이자 참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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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목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11.27) -성서 주간-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21,3)
봉헌의 정신!
오늘 복음(루카21,1-4)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는데,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닙(동전 두 개)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21,3-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물 봉헌의 많고 적음의 액수도 중요하지만, '나의 봉헌 행위에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담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봉헌과 나눔'은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풍족하니까 풍족한 데에서 얼마를 바치거나, 쓰고 남아서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행위'입니다.
교회 달력인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자락에 놓여져 있습니다. '성서주간'인 이번 한 주간이 '한 해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12.2) 저녁부터는 새로운 한 해(나해)가 시작됩니다. 그 시작이 바로 '대림 제1주일'입니다.
'말씀 안에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어제 함께 기념한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처럼, '참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 속에서 첫째 자리에 있었는지?'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주일미사 후 '본당사목위원연수'가 있었습니다.
본당 살림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교무금과 주일헌금'입니다. 교무금은 하느님과 약속입니다. 하느님과의 이 약속을 잘 지키고, 가난한 과부처럼 나의 봉헌에도 정성과 마음을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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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It0bN1cWUi8?si=9_8OvE87lvPim4_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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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4)
진정한 봉헌은
생활의 사랑이다.
하느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생활의 봉헌은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우리의 삶이다.
봉헌은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생활이다.
우리의 생활로
이루어지는
봉헌이다.
우리의
생활안에서
이루어지는
봉헌이다.
우리의
생활안으로
들어오신
주님이시다.
우리의 생활과
주님께 드리는
봉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삶이다.
생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봉헌의 시작이다.
생활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생활과 신앙은
주님을 품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주님을
향해야한다.
봉헌의 영성은
생활의 영성이다.
생활의 여정은
봉헌의 여정이다.
참된 봉헌은
이와같이
모든 것을
바치는
생활의 봉헌임을
믿는다.
믿음의 힘이
생활의 힘이며
생활의 힘은
봉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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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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