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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수풀孝在
전삼용 요셉 신부
네 마음의 가난부터 보아라
저의 시골 친구 신부가 경남 산청의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 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해 주었는데 매우 가슴 뭉클하게 들었습니다.
나환자촌에서 그 친구가 얻은 유일한 교훈은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내고 있어 생명력이 왕성할 때 그 분들에게 봉사를 했습니다. 어느 곳에 가니 빈 무덤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파 놓았지만 아직 사람을 묻지 않은 빈 무덤들인 것입니다. 그 곳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님에게 그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수사님은 지금 살아계신 나환자들의 지체가 떨어져나가면 그 떨어져나간 몸의 일부분을 본인들이 고이 싸가지고 와서 자신들의 무덤에 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의 무덤엔 팔이 묻혀있고, 어떤 분들은 다리가, 또 어떤 분들의 무덤엔 눈이 묻혀 있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생명이 왕성한 때였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환자들을 보면서 죽음은 삶과 별개가 아님을 느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명을 늘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단 일분도 우리의 생명을 늘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곳에는 손도 발도 눈도 코도 없는 한 할아버지가 엎드려 수박에 머리를 박고 드시고 있어서 뭐 도와드릴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으시고 자신을 불쌍히 바라보는 그 친구에게 혀로 점자 성경책을 읽으시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분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창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역시 몸이 매우 불편하신 한 할머니를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그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베드로, 괜찮아. 안 도와줘도 돼. 먼저 네 안에 있는 가난을 먼저 찾아봐.”
그 친구는 아직도 그 할머니의 말씀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가난이 무엇일까?’
그러던 중 산골에 눈이 왔고 몸이 불편하고 눈이 안 보이시는 그 마을 분들을 위해 아침부터 정말 열심히 눈을 치웠다고 합니다. 그 분들을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어깨가 우쭐 했습니다. 그 때 뒤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음성 같았다고 합니다.
“베드로, 수고했어!”
그런데 그 할머니 뒤로 자신이 쓸었던 눈들이 이미 햇빛으로 다 녹아있었던 것입니다. 해가 뜨면 저절로 녹게 되어있었던 눈을 자신이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쓸데없이 헛수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 신부는 그 이후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새로이 성전을 짓고 봉헌했는데 성전을 지을 때의 모토가 ‘백삽일포’라고 합니다. ‘백 번의 삽질보다 한 번의 포크레인이 뜨는 것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 때의 깨달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마 할머니께서 찾으라고 했던 가난이란 바로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기에 느껴지는 그 분의 부재’를 의미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더 이상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포도나무이시고 당신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가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저도 요즘 성당의 이런저런 공사를 하면서 불우이웃을 위해 제가 매달 내고 있는 돈을 본당 예산으로 넣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런 좋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그렇게까지 승승장구하게 만드셨지만 다윗은 병적조사를 하여 하느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사실은 성당의 계단, 스테인드 글라스, 주차장, 휴게실 등에 들어갈 돈을 계산하며 제 힘으로 돈을 맞춰보려 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야 할 돈에까지 손을 대려 했던 것입니다. 말로는 주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모든 좋은 열매가 다 맺힐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분께 완전히 의탁하지 않고 나의 계산대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가난이고 고아입니다.
우리가 주님 없이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주님께만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기만 한다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붙어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들과 음식을 먹으면서, 혹은 시장 복잡한 가운데 그 분께 붙어있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분께 붙어 있는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어야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하나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하루 기도시간을 오래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가고 있다면 사람들은 잡고 있을 손잡이와 같은 것들부터 찾습니다. 이것이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혼자 버틸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기도할 시간을 찾지 않는다면 여전히 혼자 버티려고 하는 가난한 인간인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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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신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그대들은 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입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5,2)고 말하고, 예레미아는 하느님이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다.”(2,21)고 말합니다. 시편은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지켜 주소서.”(80,15)라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곧 하느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잘 알려진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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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완 신부
머무름
가지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을 제 때에 주는 것도 아니고, 거름을 적당히 주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우선적인 조건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나무로부터 수분도 공급받고 영양분도 얻어낼 수 있다. 그게 기본이다. 그것 말고 다른 것들은 다 부차적인 조건들이다.
그런데 우린 그걸 쉽사리 잊어버린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나서 나머지 조건들만 생각한다. 온도를 생각하고, 수분을 생각하고, 영양분을 생각한다. 그게 열매를 맺기 위한 더 우선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당연하다고 여긴 그 첫 번째 조건을 뇌리에서 지워버린다. 그러다가 가지에 붙어있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가지들을 보면서, 그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실이 실은 당연하지 않음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그제야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우친다.
그 당연하지만 잊어버리기 쉬운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는 포도나무의 그림으로 쉽게 풀어주신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듯 가르쳐 주신다. 그 가르침에 진리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그 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것이다. 맞다. 신앙은 본디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께 여는 수동적 행위이며, 그 분을 붙잡고, 그 분께 매달리며, 그 분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행위이다. 그렇다고 이 머무름이 그저 수동적이지는 않다. 가지는 나무에 그저 붙어있지만 않기 때문이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물을 빨아들이도록 뿌리를 재촉한다. 그게 나무와 가지의 관계다.
가지의 이 행위는 나무에 붙어 있다는 면에서는 그저 수동적인 행위이지만, 그 내용은 엄청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행위이다. 머물러 있되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음은 단순히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주고받음의 유기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분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 그게 진정한 머무름이다. 그렇게 머물러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 열매에 대해서는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 잘 나와 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 21∼22). 이런 열매들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참 좋겠다.
부산교구 홍경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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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진 요셉 신부
“다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은 곧 나에게 하는 것이 된다.”(마태 25, 40 참조) 이것은 초등학교 2학년 교리 시간에 외운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외우기만 하였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이 말씀을 외우면 난 머리가 좋은 거야!’라는 아주 초등학생다운 발상으로 매일매일 이 말씀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엉뚱한 생각으로 암기(!)했던 이 말씀이 제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매일매일 외우며 머리에서 가슴으로, 손과 발로 기지개를 켰던 것입니다.
고3 때 일입니다. 다들 열심히 공부하느라 청소를 안 해 교실이 엉망이었습니다. 친구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명의 친구들이 도와주었는데, 그들에게 ‘고맙다. 너희 대학에 꼭 합격할 거야!’라고 장담을 했습니다. 물론 이들을 위해 틈틈이 기도하며 제 말이 빈말이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무르고 당신도 우리 안에 머물면, 많은 열매를 맺으며 청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는 보통 나무에 비해 크기나 두께가 작아 아주 볼품이 없지만, 그 가지가 휘어질 만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대추야자, 무화과, 밀, 보리, 석류, 올리브와 함께 축복받은 식물 중 하나였으며 포도로 빚은 포도주는 이스라엘인들의 잔치나 만찬 때의 필수 메뉴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포도는 평화, 축복, 풍요를 상징하며 흔하면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만족과 기쁨, 행복을 불러일으켰던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셨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의 사명을 지닌 우리가 열중해야 하는 것은 ‘열매 맺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지가 자신의 비쩍 마른 모습을 보며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자신을 살찌우기에 급급하여 열매 맺음에 소홀히 한다면 그 가지는 농부이신 하느님에 의해 잘릴 것입니다. 포도송이가 달려 있지 않은 가지는 사람들에게 실망과 허기를 느끼도록 해, 그 원망을 하느님께서 들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한 어린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했습니다. 또한 대담하게도 자신이 했던 말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실제로 청소를 도왔던 그 친구들은 전원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믿고 청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주님의 말씀을 품은 이의 삶 속에 기쁨과 행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매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장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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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석 신부
행복의 조건
장수하는 사람과 단명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친구가 많고 적음에 있다고 합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많고, 그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은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반면에 친구가 적은 사람은 쉽게 병에 걸리고 일찍 죽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우(友)테크’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즉, 재테크에 쏟는 시간과 노력의 몇 분의 일만이라도 세상 끝까지 함께할 친구들을 만들고, 확장하고, 엮고, 관리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행복하기 위해선 많은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테크는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기술, 혹은 행복하게 사는 전략이라고도 합니다.
조지 베일런트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하버드대 2학년생 268명의 생애를 72년간 조사해 “행복의 조건: 하버드대학교. 인생성장보고서”란 연구보고서를 편찬했습니다. 베일런트 교수는 이 연구에서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행복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실험계층의 응답을 모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매우 의외였습니다. 행복을 좌우한 것은 부나 학벌, 명예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관계’라고 사람들이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47세 무렵까지 형성한 인간관계가 그 이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지를 결정짓는 것은 지적인 능력이나 계급이 아니라 ‘따뜻한 인간관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베일런트 교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연구서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관계와 사랑의 비결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가지는 나무의 줄기에 붙어있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싱싱한 포도송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은 예수님이란 줄기에 붙어있음으로 인해 생명이 충만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며 주님의 포도나무에 붙어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생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섞은 가지처럼 잘려 나갈 것입니다.
진정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 주님이라는 줄기에 붙어 있는 포도가지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계명’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것을 나의 생활로 옮길 때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진정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항상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행복의 조건입니다.
고준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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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신부
농사를 짓는 농부는 세 가지 부류로 부릅니다. 첫째는 게으르고 무책임하여 논밭에 잡초가 잔뜩 자라게 하는 농부입니다. 이를 일컬어 하농(下農)이라 합니다. 둘째는 알뜰하고 부지런하여 알곡을 착실히 기르는 농부입니다. 중농(中農)이라 부릅니다. 셋째는 알곡 농사를 짓기 전에 먼저 알곡 농사의 근본이 되는 흙을 먼저 가꾸는 농사꾼을 일컫습니다. 이런 농사꾼을 상농(上農)이라 부릅니다.
전주교구 김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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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