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법수면의 늪지식물이 있는 대송리, 백산리 주변은 남강이 U자(字) 형태로 감싸고 흐른다. 남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옥토가 만들어 졌고, 이 땅에 땅콩을 심어 경제력에 도움이 되었다. 남강댐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홍수의 피해는 있었지만, 강물을 식수로 사용하였고, 모래가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였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미역을 감고 수건이 없어도 모래밭에 한번 뒹굴고 나면 몸이 수건으로 닦은 것처럼 깨끗해졌다고 한다. 필자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섬진강 상류에서도 미역 감고 몸을 자갈밭에 구르는 문화가 있었으니, 문화의 동질성은 함께 일어나는 모양이다.
나루터가 있는 법수면 백산리와 의령 정곡면을 연결해주는 교량만 생겼어도 발전을 거듭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그러면서 동네사람들은 지금 남아있는 늪은 늪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사람들이 개발논리를 앞세워 많은 늪지를 매립했다는 뜻일 것이다. 함안 법수면의 늪지식물이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함안 법수면의 늪지식물이 있는 대송리 대평 마을을 나서 질날벌 늪지 중간쯤에 이르면 내송 마을이 있다. 내송 마을에는 함안전통식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는데, 메주, 된장, 간장을 만드는 전 공정을 수 작업으로 하고 있어 맛과 촉감이 특이하다.
심실마을 사거리에는 농촌 아동의 감소로 1999년 2월 폐교된 우거초등학교가 있다. 노인복지시설로 활용되고 있는 우거초등학교에 「참빛 미술관」을 개관하여 각종 장승과 도자기, 탱화, 현대 및 고전적인 그림을 접할 수 있었다. 문화시설이 부족한 지역 사람들이 미술에 대한 식견도 넓힐 수 있고 여행객들에게 답사의 즐거움을 동시에 줄 수 있었으나, 현재는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어 아쉬움이 따른다.
함안 법수면 사무소를 지나 가야읍 방면으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윤외리 석무 마을이다. 면사무소가 있는 곳보다 더 번화가이다.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 아주머니가 넓은 그릇에 먹음직하게 추어탕을 끓여 탁자사이를 다니며 손님들에게 국자로 더 담아주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추어탕 한 그릇으로 먹고 큰들이라고 불리는 들판을 지나 남강으로 흘러드는 함안천을 건너는 대산교를 지나니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1953년 9월 가수 윤복희씨의 부친 윤부길씨가 유랑극단 단장이던 시절 함안 가야장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기 위해 악양 나루터에 도착했다. 처녀뱃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로 함안천을 건너면서 군에 입대한 오빠를 대신해 강바람에 치마를 휘날리며 교대로 노를 저어가는 박말순(당시 23세), 박정숙(당시 18세)씨의 사연을 듣고 나서 노랫말을 지었다. 「처녀뱃사공」은 한복남씨가 작곡을 하고, 1959년 황정자씨가 노래를 불러 60년대 애창곡으로 겨레의 심금을 울렸다.
2000년 10월2일 옛 악양 나루터 근처에 노래비를 세우고 앞면에는 노래 가사를, 뒷면에는 노래 탄생의 배경을 기록해 놓았다.
노래비에서 발길을 옮겨 악양 가든을 지나 산비탈로 희미한 길을 따라가면 절벽에 조선 철종 8년(1857)에 세운 악양루가 있다.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자 아래로는 남강이 그림처럼 흐르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법수면의 제방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전쟁 이후에 복원하였으며, 1963년에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 지붕이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의 명승지인 「악양」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기두헌」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청남 오재봉이 쓴 「악양루(岳陽樓)」라는 현판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