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챙기기 더 헤리티지:시즌2
“좋은 건 한국만 갖고있네”…‘오타니 컬렉션’ 아이러니
카드 발행 일시2024.07.10
에디터
강혜란
더 헤리티지:시즌2
관심
나이 지긋한 승려가 옷가지로 보이는 천을 두 손에 들고 있다. 승려는 코가 높고 광대뼈가 튀어나왔는데 턱수염까지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초록색 눈과 붉은빛 머리카락, 주변의 꽃무늬까지 자유분방한 그림체와 색채가 돋보인다. 한눈에 봐도 우리나라 불교 회화는 아니다.
가로 74㎝, 세로 73.5㎝의 이 그림은 원래 흙벽에 채색된 서원화(誓願畵)의 일부다. 서원화는 석가모니가 여러 전생에서 만났던 부처들, 즉 현재에서 보면 과거의 부처들을 만난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유사한 다른 그림들을 보면 중앙에 부처가 서 있고, 우측 하단에 나이 든 승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옷을 바치는 모습이다. 전체 벽화는 이보다 10배, 15배 큰 규모였을 것이다.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제15호굴(10~12세기)의 서원화(誓願畵)의 일부. 서원화는 석가모니가 여러 전생에서 만났던 부처들, 즉 현재에서 보면 과거의 부처들을 만난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이 벽화 장면은 전체에서 오른쪽 아래 부분에 해당하며, 나이 든 남자 승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옷을 바치는 모습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 벽화 파편은 올해 초 개편된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중앙아시아실에서 만날 수 있다. 10~12세기에 조성된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의 벽화 일부라고 한다. 투루판 분지는 현재의 중국 행정구역상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투루판 지구에 속한다. 투루판은 9~14세기 위구르족이 세운 위구르 왕국의 수도였고 무수한 유적이 남아 있다.
누가 떼 온 걸까. 이 서원화는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 중 하나다. 20세기 초반 실크로드의 옛길을 따라서 중국 신장 일대를 탐사했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 탐험대가 모아온 유물이라서 이렇게 불린다(일본 출신 메이저리거 오타니 쇼헤이와 한자 성이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중앙아시아 관련 유물은 1500여 점이나 되는데 일부 기증받은 것 외에 99%가 오타니 컬렉션이다. 한마디로 오타니가 없었다면 박물관 중앙아시아실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일본 탐험대가 수집한 유물이 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을까. 우리 국립박물관의 전신(前身)인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기증됐기 때문이다. 오타니 컬렉션은 애초 오타니의 개인 별장에 모여 있다가 1915년 이후 여러 경로로 흩어졌는데, 그들 중 일부가 대한해협을 건넜다. 이를 포함해 조선총독부 측이 국내외에서 수집해 온 수장품 수만 점은 해방과 함께 고스란히 국립박물관의 것이 됐다.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제15호굴(10~12세기)의 서원화(誓願畵)가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 전시되고 있다.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 중 하나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지금 중앙아시아실에서 만나는 오타니 컬렉션은 우리 ‘박물관 사람들’이 분류·보존처리·연구한 성과에 힘입고 있다. 한 세기 전 오타니 탐험대가 실크로드 사막에서 캐내온 유물들은 그때와 다른 맥락 속에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기증된 뒤 경복궁 수정전(修政殿)에서 ‘서역유물’이란 이름으로 전시됐을 때와 같은 의미일 수 없다.
이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문제적 남자, 오타니 고즈이를 만나보기로 하자. 때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독일·영국·프랑스 등 제국의 탐험대가 신장 지역의 모래폭풍을 헤치고 고대 유적의 흔적을 찾느라 혈안이 됐을 때다.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실크로드의 신비가 막 깨어나고 있었다.
청년 백작, 사막 유적 탐험대를 이끌다
영국 런던 유학 시절(1900년) 24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해지는 오타니 컬렉션을 발굴, 수집한 장본인이다. 사진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탐험대를 조직한 목표는 불교의 동진 경로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옛 중국 구법승의 이동로 흔적을 찾고, 이슬람교도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불교가 받은 압박 상황을 밝히고, 중앙아시아에 남아 있는 불상과 불경, 불구(佛具) 등을 수집하고, 나아가서는 지리·지질·기상학 자료를 찾고자 했다.
(오타니 고즈이, 『서역고고도보西域考古圖譜』(1915) 서문 핵심 요약)
사진 속 청년이 1900년 영국 런던 유학 당시 24세의 오타니다. 단정하게 빗은 3대7 가르마와 고급 소재로 보이는 양복 차림, 총명한 눈빛이 돋보인다. 사진만 보면 탐험가라기보다 공부 잘하는 부잣집 도련님 느낌이다. 실제로 언어에 능해 영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를 잘했다고 하고 역사, 지리학, 식물학, 농학, 공학, 지질학, 천문학, 해양학 등을 두루 공부한 수재였다.
오타니는 일본 교토의 유명한 불교 사찰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21대 문주(門主) 아들이었다. 니시혼간지는 일본 불교 종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 혼간지(本願寺)파의 중요 사찰이고 문주는 문중의 제일 높은 어른이자 정토진종을 이끄는 종교적 지도자다. 정토진종은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허용했고 문주 자리는 가문 안에서 승계되곤 했다. 차기 문주로 예정된 오타니는 당시 권세가인 구조 미치다카(九条道孝) 가문의 딸과 결혼하면서 귀족(백작 작위)이 됐고 일왕(천황)가와도 혼맥이 닿은 일본 최상류층 일원이었다.
카슈가르의 영국 영사관에 도착한 오타니 1차 탐험대(1902년). 사진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그런 그가 영국 유학을 간 것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불교 종단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고민을 안고서였다. 그런데 정작 그를 사로잡은 것은 유럽의 ‘실크로드 탐험’ 열기였다. 지금이야 실크로드가 사막길, 초원길, 바닷길 세 갈래로 나뉘어 수천 년간 전개됐다는 게 상식처럼 통하지만 그때만 해도 기원전 개척된 사막길의 존재는 잊힌 상태였다.
바닷길을 통한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이용이 끊기고 거대한 모래 언덕만 남은 돈황, 투루판, 카슈가르 일대에서 먼 옛날 사람과 물건이 오간 흔적이 발견됐다. 열강들의 제국주의 확장 경쟁이 치열하던 19세기, 처음엔 ‘땅따먹기’ 측량을 위해 보낸 군인 탐험대가 이 같은 흔적을 보고하면서 다시 고고학자가 중심이 된 탐험대가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고대 유적 찾기에도 나라 간 경쟁이 불붙었다.
수집품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제3차 오타니 탐험대의 낙타 행렬. 사진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이 가운데 헝가리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탐험가 오렐 스타인의 활약이 돋보였다. 1900년 첫 실크로드 탐험에 이어 1906~1908년 2차 탐사 때 돈황의 석굴에서 진귀한 고문서와 미술품 25상자를 수확하기도 했다. 앞서 독일 탐험가 스벤 헤딘이 실크로드에서 발굴 성과를 낸 데 이어 스타인의 활약이 화제가 되자 영국 왕립지리학회에 가입해 있던 오타니도 마음이 동했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초기 불교의 전파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호기심과 사명감을 불렀다.
그는 1902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실크로드를 탐험하기로 하고 자신을 포함해 총 5명의 탐험대를 꾸렸다. 도중에 부친의 사망으로 니시혼간지의 22대 문주에 오르게 되면서 일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그가 이끄는 탐험대는 규모와 인원을 달리하며 12년간 3차에 걸쳐 이어졌다. 수집한 유물은 3차 탐험(1914) 때만 96상자 분량에 총 4291㎏에 달해 낙타 145마리로 이송했다고 한다. 처음엔 교토의 니시혼간지로 옮겨졌다가 이후 연구·분류를 거쳐 1910년 고베(神戶) 교외의 롯코야마(六甲山) 부근에 세워진 오타니의 별장인 니라쿠소(二樂莊)에 보관됐다.
뿔뿔이 흩어진 유물…일부는 경복궁 수정전에
그런데 이 모험에 돈을 너무 많이 쏟았나 보다. 오타니 탐험대는 유럽 열강과 달리 정부 지원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니시혼간지의 재원에 힘입었고 이 때문에 사찰이 휘청할 지경이 됐다. 게다가 러·일 전쟁(1904~1905) 때 대량의 국채 구입과 전사자 및 부상군인 가족들에 대한 막대한 원조 부담도 있었다. 결국 이게 재정 횡령 문제로 번지면서 오타니는 1914년 문주직에서 물러났다. 자금이 바닥나자 탐험대도 끝을 맺었다.
정원에서 바라본 오타니 고즈이의 별장 '니라쿠소(二樂莊)'의 모습. 고베(神戶) 교외의 롯코야마(六甲山) 부근에 세워진 호화저택으로 오타니 컬렉션은 이곳에 보관되다 여러 경로로 흩어졌다. 사진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승직을 반납하고 환속한 오타니는 중국 뤼순(旅順)으로 거처를 옮긴 뒤 계속 여행하고 강연했다. 그러면서 별장 니라쿠소 정리에 들어갔다. 유물 일부는 중국 다롄(大連)에 진출한 일본 철도회사 측에 기증했고 나머지 유물들은 1916년 니라쿠소와 함께 통째로 팔렸다. 이를 사들인 이가 일본의 유명한 구하라 재벌의 창시자인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1869~1965)다.
구하라는 별장은 자신이 취하고 남겨진 유물 373건(약 1500점)을 자신의 동향 친구이자 조선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에게 1916년 5월 기증했다(기증의 대가로 조선 광산 개발권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데라우치는 유물을 경성(옛 서울)으로 옮겨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있던 경복궁으로 날랐다. 당시 경회루 옆의 수정전이 전시실로 선택됐다. 서역에서 온 유물들은 서구 열강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 일본 고고학의 성과를 과시하듯 관람객을 맞았다.
일제강점기에 경복궁 수정전에 마련됐던 중앙아시아 전시실 모습(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가장 좋은 벽화 컬렉션이 한국에 다 있네”
“오타니 컬렉션이 흩어지면서 중국과 일본, 한국이 각각 나눠 갖게 됐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벽화 컬렉션이 가장 좋습니다. 1980년대 초에 중앙아시아 벽화 연구로 유명한 일본 여성학자 우에노 아키(上野アキ)를 안내한 적이 있는데, 우리 박물관 유물을 보면서 ‘좋은 건 여기 다 있다’고 아쉬워하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아이러니한 일이죠.”
중앙아시아 미술의 권위자인 권영필 전 고려대 교수의 말이다. 실제로 오타니 컬렉션이 일부 넘어간 뤼순박물관에는 베제클리크의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 2점이 소장돼 있고, 도쿄국립박물관에도 키질 석굴 벽화를 비롯해 여러 점 소장돼 있지만 수량이 적고 크기도 작은 편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넘어온 벽화는 59점에 이르고 그중 투루판 출토로 추정되는 벽화가 35점이다. 이 벽화들은 상대적으로 규모나 완성도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복희여와도〉, 7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무덤, 삼베에 색, 188.5x93.2cm, 본관4027. 투루판 지역의 대표적인 고분 유적인 아스타나 무덤에서 발견된 이 그림은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와 여와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 두 신이 서로 마주 본 자세로 표현되어 있는데, 왼쪽이 여신인 여와, 오른쪽이 남신인 복희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물론 이건 컬렉션을 소장한 쪽의 시각이다. 달리 말하면 실크로드 일대의 고대 유적은 20세기 초 탐험 경쟁 때문에 쑥대밭이 됐다. 화려한 벽화로 가득했던 석굴엔 빈 벽만 남았다. 실크로드·중앙아시아 역사를 해석·탐구할 기초자료가 바깥으로 거의 빠져나갔단 얘기다. 게다가 중국이 냉전 시기 ‘죽(竹)의 장막’ 안에 은신하면서 이 같은 연구는 현지와 연계 없이 이뤄져야 했다. 관련 연구가 진행될수록 우리 박물관 내 오타니 컬렉션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늘었다.
오타니 컬렉션 부실 목록, 우리 손으로 보완
“1991년에 한국·소련 수교를 기념해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스키타이 문명 유물이 대거 건너와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를 했죠. 유물의 면면도 대단했고, 유목민족 문화가 우리나라 고대 유물에 끼친 영향에 대한 관심도 커졌죠. 그동안 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유물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척돼 2003년 서역미술 전시가 대대적으로 열렸습니다. 미리 용산 시대를 대비한 전시였다고 봐야죠.”(권영필 교수)
2003년 전시는 사실상 국내에서 처음 열린 서역 문명 소개였다. 당시 오타니 컬렉션의 당사국인 일본에서 국립도쿄박물관과 일본방송협회, 와세다 대학 관계자들이 줄이어 견학을 올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오타니 컬렉션 연구를 선도하고 전시를 기획한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은 “무엇보다 유물의 출토지와 명칭 등을 일일이 확인해 유물 목록이 부실한 기존 오타니 컬렉션의 치명적 결함을 보완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모자로 여겨졌던 유물이 풀로 짠 바구니로 밝혀지는 등 웃지 못할 성과도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 전시 모습.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사실 오타니 탐험대는 기본적으로 학승(學僧)이 중심이 돼 초기 불교문화재를 조사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뒤로 가면서 마구잡이 유물 수습이 이뤄지긴 했다). 때문에 유물의 질도 우수했고, 조선총독부 시절에도 관련 연구가 꽤나 이뤄졌다. 다만 탐험대가 고고학자가 아니었던 까닭에 유물 수습 때 가장 중요한 출토지 표기 등을 구체적으로 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다. 박물관의 중앙아시아 관련 연구자들은 1993년부터 10여 년간 서역 유적을 정례 답사하며 작은 실마리라도 확보해 유물의 비밀을 끈질기게 풀어갔다.
현지 연구진과 교류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도 여럿 있다. 예컨대 박물관에 있던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기시대 가면은 출토지가 로프노르·누란(樓蘭) 일대로 모호했는데, 중국 신장문물고고연구소가 발굴한 유물과 대조하는 과정에서 샤오허(小河) 무덤에서 출토됐던 것으로 추정됐다. 신장문물고고연구소는 2002∼2005년 샤오허 무덤 160여 기를 발굴했는데 여기서 나온 가면과 박물관 소장 가면이 쌍둥이처럼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신장 연구진과 인적 교류를 계속하면서 실크로드의 수수께끼를 푸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오타니 탐험대가 발굴한 실크로드 지역 청동기 시대 가면. 출처가 누란(樓蘭)으로 돼 있었지만 최근 발굴 성과에 따르면 로프노르 샤오허(小河) 무덤에서 이와 동일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일·중 간 학술 교류 매개체로 거듭나
박물관은 2005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전체 전시실의 6분의 1을 아시아 지역에 배정하는 등 아시아관을 크게 키웠다. 중앙청 시절 생겼다가 사라진 중앙아시아 상설전시실도 새로 마련했다. “미래에는 아시아 중심이 될 테니 지역 문화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보여주자는 취지였다”고 당시 개관을 담당한 김혜원 미술부장이 설명했다.
달라진 것은 그뿐이 아니다. 박물관은 그 전까지 실크로드 유물을 소개할 때 ‘오타니 컬렉션’이란 용어나 개념을 전시실 전면에 부각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중앙박물관에 서역 유물이 꽤 있다는 사실만 알렸다. 일본 제국주의 꼬리표가 붙은 유물이라는 점, 또한 전 세계적으로 자국 유물 환수에 대한 논의가 거세지고 있다는 점이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중국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전경(2004.7.21 민병훈 촬영). 사진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서 열렸던 테마전〈영원한 삶의 집, 아스타나 고분〉에서 또 다른 '복희여와도'가 전시된 모습.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반면 2019년 대폭 개편한 중앙아시아실에선 오타니 탐험대의 탐사 경로까지 상세 소개하는 등 ‘투명성’을 높이고 있다. 30년 이상 우리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우리 시각으로 이들 유물을 전시할 수 있게 됐다는 자신감이다. 예컨대 기사 도입부에 소개한 베제클리크 석굴 벽화는 지난 20여 년간 박물관이 꾸준히 보존 처리에 힘쓴 결과 이번 상반기 개편 때 첫선을 보이게 됐다. 해외 학자들과의 협력 속에 유물들에 적힌 고문자 해석도 속도를 내고 있다. 위구르어를 비롯해 한문, 카로슈티문자, 브라흐미문자, 아랍문자, 티베트문자 유물의 해석 및 연구는 『고문자 보고서』 1(한문)과 2(기타 문자)로 나왔다.
박물관 세계문화부의 권영우 학예연구사는 “지난해 한·일 학술 교류를 통해 일본에 있는 오타니 컬렉션 조사를 했고 올해도 서로 소장품 조사에 협력해 일하고 있다”면서 “이 컬렉션을 매개로 다양하고 꾸준한 교류가 이어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에디터
강혜란
관심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2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