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불교사
<평창역사의 이해> 책, 8장. 오대산불교, 문수신앙 성지 ( p 417)
조선조에 들어와 불교는 전조업의 당연한 과보로 억불정책을 당하여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지만,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은 여전하여 왕가에서도 안으로는 불교를 숭앙하였던 터였다.
당시 조선 개국시 상황은 고려의 개국 시기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조선 개국은 불교 이념의 부정이 아닌 고려말 불교의 사원전, 사찰의 노비제 등 많은 폐단을 정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억불숭유정책을 단행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태종·세종·세조 등은 정치적으로는 배불시책을 단행하면서도 왕실의 개인적 신불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 초 오대산에서의 왕조의 신불(信佛)활동은 오히려 전시대보다 더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조선 초기 불교의 중심은 오대산 상원사였다. 왕실에서 상원사와 사자암을 원찰로 삼은 것은 고려 말 나옹선사가 북대에 주석하면서 매 조석으로 지로봉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향해 공양을 드렸듯이, 조선왕조는 적멸보궁 바로 아래인 상원사나 중대 사자암에서 진신사리의 사리공양을 하였다.
( 본 책의 고려 불교사에사 그 내용을 볼 수 있읍니다.)
왕실의 불사는 조선조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왕실의 원당(願堂, 願刹) 지정 사례를 들어보면, 태조부터 조선 전기에 보이는 불교와 유교와의 관계는 외유내불(外儒內佛)⋅공유사불(公儒私佛)의 현상으로 정책적으로 유교가 조선의 국시가 되었던 반면, 실제적으로는 불교가 행해짐을 볼 수 있다.
1) 태조 이성계의 중대 사자암 중건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물러난 뒤 함흥에 있다가 태종이 즉위하자 서울로 돌아오는데(태종 원년, 1401) 바로 전해에 오대산 중대 사자암을 중건하고 낙성에 친림하였던 일을 권근(權近)에게 기문으로 남기게 명하여 그 글이「신증동국여지승람」권 44,‘강릉대도호부 불우 상원사’조에 실려 있다.
◎「오대산 사자암 중창기(五臺山獅子庵重創記)『양촌문집』13,
중대 사자암의 중창은 권근의 중창기에 의하면, 운설악이란 승려의 청과 원찰을 삼고자 하는 조선 태조의 생각이 맞물리면서 이루어진 불사임을 보여준다(양촌은 권근의 호이다).
2) 태종의 원찰 사자암
조선 태종은 억불정책을 편 대표적인 왕이었지만,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하여 원찰로 삼았다. 10월에는 상원사에서 고려왕실의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열도록 하였다. 1401년(태종 1) 봄 사자암(현 중대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그해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행차하여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3) 세종과 양녕, 효령대군의 불사
▪ 세종은 내불당 불사의 과정에 <사리영응기>를 편찬하였다.
▪ 월정사는 2.001~2년 경내에서 발굴된 '암막새'와 여러 명문 기와 중 양녕, 효령대군’의 이름이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었다.
< 양녕과 효령대군의 이름이 세겨진 막새 기와>
이번 조사를 통해 월정사는 세종 28년(1,446)에도 중창이 있었으며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이름을 새긴 암막새가 출토됨으로써 이들이 중창에 관여했음을 볼 수 있다.
요즘 사찰에서 여행자들이 불사 기와에 이름을 적어 공양하는 풍습을 볼 수 있다. 세종시대에도 이러한 공양이 있었음을 보며주는 점으로 기와공양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형제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의 3형제로 충녕대군 (세종)은 빠진점으로 보아 세종대왕 시기에 불사공양으로 보인다.
4) 세조의 원찰, 상원사
세조는 오대산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불은(佛恩)을 입었던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세조는 1,465년(세조 11)에 신미(信眉)와 학열(學悅)대사에게 상원사를 중창하도록 하여 역시 원찰로 삼았다.
「오대산 상원사 중창기」에는 중창불사는 1,465년 3월에 시작하여 1,466 년에 끝마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종 1년(1,469)년에 세조의 원찰로 삼다. 권근의 문집인『양촌집』에 사자암과 관음암, 수정암의 중창기가 있다.
<※ 세조는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본 역사책은 역사와 그 저변의 이해로 쓰기에 역사 속에서 세조는 왕위를 찬탈한 업보의 댓가로 괴질이라는 벌을 받는 듯한 인상이다. 신병을 업보로 보는 편견이 심한듯하여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이해를 피력합니다.
세종의 부친인 태종 이방원은 말년에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세종은 육식을 하는데 하루도 고기를 않먹으면 힘을 쓸 수 없는데 본인이 죽으면, 국상기간에는 육식을 금한다는 예법은 세종에게는 큰 치명타가 된다. 태종 방원은 생각다 못해‘오례의 법을 뜯어 고쳐서 국상기간에도 육식을 하게 만들었다.
세종과 그의 아들 세조는 심한 당뇨를 앓았다. 물론 육식만이 당뇨의 원인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사냥을 즐겨한 태종은 동계 극기훈련의 강무행사를 실시하여 조선 초에는 30회가 넘게 매년 강무행사를 실시하여 방림, 대화에서도 강무행사를 실시하여 세자인 충녕(세종)도 함께다녀가지만 조선시대에는 요일도, 휴일도 없었으며 운동 등도 없었는 듯하다.
세종은 지병의 요양을 위해 수안보 온천까지 여러 번 다녀왔고 홀로 밤에 집현전에서 한글 연구 중에 신숙주가 들어왔는데 등불 아래서는 못 알아보고 그대는 신숙주인가 하고 묻듯이 심한 눈병을 앓고 있었으며, 세조도 종창이 낳지 않아 괴질이라 함은 면역력의 약화로 이 모두 당뇨라는 점의 이해이다.
5) 1502년(연산군 8) 월정사는 강원도에서 매년 소금 수십여 석을 제공받았다. 당시 강원도는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월정사·낙산사·유점사 등에 매년 소금 200여 석을 지급하고 있었다.
6) 1551년(명종 6)에는 명종은 월정사 등의 사찰 토지 출입금지 푯말을 허락하였다[『명종실록』 6년 1월 18일]. 보통‘◯◯사시장(寺柴場)’이라고 써 붙여 절의 땔감 채취장임을 나타낸다. 억불의 사회에서도 사유림과 같은 절의 재산은 일정한 보호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59년(명종 14)에는 절의 계곡에서 수렵을 금지하는 푯말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명종실록』 14년 2월 17일]. 청정한 수행 환경을 유지시키기 위해 어로 금지의 전통을 이어 나가도록 하였다.
7) 16세기 초 박광우(朴光佑)가 지은「강릉 월정사」라는 시가 있다.
시의 내용 가운데 "종 울리자 갑자기 문수회가 시작되니[鍾鳴忽作文殊會]"라는 구절이 있다. 월정사의 창건 배경에 문수신앙이 문수회라는 결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