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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남루한 멍에]
'시인의 이력서' 중
김대규(58)
화려한 경력을 보면
좀 과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게도 이젠
올망졸망한 이력들이
눈 위의 발자국처럼 찍혀 가는구나
덜 익은 과일이랄까
덧 기운 옷가지 같아
참 누추하다.
그걸 훌훌 벗어 내던지고
지상에서 가장 어둡고 가장 빛나는 이름인
'시인' 이라는 문패 하나로
영혼의 안방을 밝힐 수 없을까
~~~~~
'가난한 시인' 중
이생진(71)
가난한 시인이 펴낸 시집을
가난한 시인이 사서 읽는다
가난은 영광도 자존도 아니건만
흠모도 희망도 아니건만
가난을 시인의 훈장처럼 달아주고
참아 가라고 달랜다
저희는 가난에 총질하면서도
가난한 시인보고는
가난해야 시를 쓰는 것처럼
슬픈 방법으로 위로한다
아무 소리 않고 참는 입에선
시만 나온다
가난을 이야기할 사이 없이
시간이 아까워서 시만 읽는다
~~~~~
'시인은 어렵게 살아야 1'
황동규(1938~)
이성복 시인이 물었다.
"시인은 끈질기게 어렵게 살아야 시인이 아닐까요?
보들레르,랭보,두보(杜甫)를 보세요."
어려운 삶!
일찍이 호머는 눈이 멀어
지중해를 온통 붉은 포도주로 채웠고,
굴원(屈原)은 노이로제에 시달리며
양자강 상류를 온통 흑백으로 칠했다.
저 어려운 색깔들!
"시인은 끈질기게 어렵게 살아야…"
말 잠시 끊고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시야 한번 닫았다 여는 눈보라,
그 열림 속으로 새 하나가 맨발로 날아간다.
~~~~~
'시인학교'
김종삼(1921~84)
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
'시인은'
이한직(1921~76)
한 눈을 가리고
세상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褸)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너는 내게서 멀어져 간다 시간이여
너의 날갯짓은 내게 상처를 남겨 놓는다
그러나 나의 입은 어쩌란 말인가?
나의 밤은 그리고 낮은?
집도 없으며
기거할 수 있는 조그만 곳도 없다
내가 나를 바치는 모든 사물들은
부자가 되어 나를 마구 써 버린다
~~~~~
‘시인이라는 직업’
이시영(1949~ )
금강산 시인대회 하러 가는 날,
고성 북측 입국심사대의 귀때기가
새파란 젊은 군관 동무가
서정춘 형을 세워놓고 물었다.
“시인 말고 직업이 뭐여?”
“놀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놀고 있다니 말이 됩네까?
목수도 하고 노동도 하면서 시를 써야지……”
키 작은 서정춘 형이 심사대 밑에서
바지를 몇 번 추슬러올리다가
슬그머니 그만두는 것을
바다가 옆에서 지켜보았다
~~~~~
미래의 시인에게
박희진(1931~ )
어디서인지 자라고 있을
너의 고운 수정의 눈동자를 난 믿는다
또 아직은 별빛조차 어리기를 꺼리는
청수한 이마의 맑은 슬기를
너를 실은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보았을지도 몰라
얼음 밑을 흐르는 은은한 물처럼
꿈꾸는 혈액이 절로 돌아갈 때
오 피어다오 미래의 시인이여
이 눈먼 어둠을 뚫고 때가 이르거든
남몰래 길렀던 장미의 체온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보여다오
진정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은 길이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리니
~~~~~
‘시인이 된다는 것’
밀란 쿤데라(1929~ )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
왜냐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하략)
~~~~~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죠?” 라는 물음에 대한 답
이브 메리엄(1916∼1992)
나무에서 잎을 따서
그 모양을 꼼꼼히 살펴보세요
가장자리 선이랑
안쪽의 금이랑
이걸 기억해 두세요, 잎이 가지에 어떻게 매달려 있나
(또 줄기에서 가지가 어떻게 뻗어 나왔나)
4월에 어떻게 움터 나오고
6월이 되면 어떻게 멋진 차림을 하나
팔월이 다 갈 때쯤이면
손에 쥐고 구겨보세요
그래서 잎사귀의 여름 끝 슬픈 향기를 맡아 보세요
(후략)
~~~~~
시인의 사랑
진은영(1970~ )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중략)
~~~~~
시인의 말
신영배(1972~ )
사라지는 시를 쓰고 싶다
눈길을 걷다가 돌아보면 사라진 발자국 같은
봄비에 발끝을 내려다보면 떠내려간 꽃잎 같은
전복되는 차 속에서 붕 떠오른 시인의 말 같은
그런 시
사라지는 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
쓰다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
내가 사라지고 시 혼자
컴퓨터 모니터 속 A4용지 왼쪽 정렬
글꼴 신명조 글자 크기 12에 맞춰
한 줄 한 줄 써내려가거나
유품을 수거한 비닐 팩 속에서
뿌려진 피와 함께 수첩의 남은 페이지를
쓱쓱 써내려가는
그런 시
~~~~~
시인의 별
전선용
한 숟갈 밥을 들기 위해
하늘의 별을 본다
역기처럼 무거운 생
시인에게 별은 그리움이요 노래,
일용직에겐 고달픈 눈물의 반짝임 아니던가
별은 떠 있고 철학자는 죽었다
수두룩하게 떠 있는 별에서 나는 밥 냄새
겨울에도 별은 동파되지 않았고
별을 해부하던 시인은 메스를 던진다
죽고 사는 문제
누군가 직업을 물었을 때 망설인 적,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직분이라는 모호한 호명에
백수라 말해야 할지
시인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별이 별로 보이지 않고 밥으로 보여
별빛이 굴절된 오늘,
별을 수술대에 눕히고
죽일까 말까.
-『뭔 말인지 알제』(도서출판 움, 2019)에서
~~~~~
시인의 초상(肖像)
정환웅
귓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도
마음 한 구석이 얼어붙는 당신은
진정 가슴 뜨거운 시인입니다.
이름 없는 들꽃을 보고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감동하고
전율하는 당신은
진정 부드러운 시인입니다.
은빛 실루엣으로 파고드는 음악에 맞추어
흥얼거릴줄 아는 당신은
진정 인간적인 시인입니다.
실바람으로 흘러가는 조그만 말 한 마디에도
금세 상처날 듯 여린 심성을 가진 당신은
진정 순수한 마음을 가진 시인입니다.
세상의 쓸쓸한 뒷모습에
홀로 마음 아파하고 눈물 글썽이는 당신은
진정 자상하고 상냥한 시인입니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바람도 불었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고,
차갑고 쓸쓸한 계절이 가면
다사로운 봄날이 오련마는
세상사 모든 것을 둥글게만 보지 않는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꿈을 꾸는 시인입니다.
도시의 번화가 한 가운데에서
고독을 찾은 당신은
진정 사랑하고 싶은 시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나처럼 연약하고,
나처럼 상처받기 쉽고,
나처럼 가난한 마음을 가진
또 하나의 나를 만나는 기쁨을 주신 당신은
진정 가슴 푸근한 시인입니다.
2004.12.12 - 잠 못 이루는 밤에
囕盈에서
from Cafe 마로니에 그늘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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