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 의림사를 기종점으로 인성산과 수리봉을 환종주하였다.<☞ blog.daum.net/bok-hyun/1034>
산행중 국사암(岩)에서 내려다본 야반산과 옥녀봉이 기어코 다음을 기약하잔다.
야반산과 옥녀봉은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호남지역 공략을 끝낸 북한군이 마산으로 동진(東進)하는 2번 국도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렇게 전선은 경남지역으로 옮겨진다.
이때 적 6사단장 방호산은 “동무들, 적은 와해되었다.
우리에게 부여된 과업은 진주와 마산의 해방과 잔존 적부대의 섬멸이다.
…… 진주와 마산의 해방은 적의 숨통을 끊어 버리는 마지막 전투를 의미한다.”라고 호언장담했다.
미 제25사단(사단장 소장 킨, William B.kean)이 펼치는 ‘킨 작전’에는 한국 해병대의 김성은(金聖恩 1924~2007) 부대도 참가했다.
김성은 부대는 50년 8월6일 밤부터 적 중화기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야반산·수리봉·서북산 일대의 적 진지를 탈환하여 전원이 일계급 특진되었다.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신화가 탄생한 배경이다.
마산 전투(1950년 8월 2일~ 9월 14일)는 전쟁 초기 낙동강 전역의 최남단에 속했다.
마산은 부산에서 서쪽 57km, 진주에서 동쪽으로 60km 지점에 위치하였고, 철도는 진주선(진주~삼랑진)과 진해선(창원~진해)이 있었다.
도로로는 창원-부산, 진해-부산의 도로 등이 있어 마산만 점령하면 부산은 바로 코앞이다.
더욱이 마산항 가까이에는 우리 해군의 본거지인 진해가 있었으니 마산은 부산의 서부 관문이었던 셈.
이러한 전쟁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며 길을 나섰다.
원점회귀로 두 산만 타기에는 0.1% 부족하여 옥녀봉 남쪽의 우산을 끼워 넣었더니 이상한 모양의 코스가 되었다.
맥(脈)꾼도 아니고, 봉(峰)꾼도 아닌 내가 한국전쟁의 ‘낙동강 남쪽 방어선’의 야산 언저리를 맴돈 것.
야반산(夜半山 342.4m)은 ‘진동리 전투’때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전과를 올렸던 곳.
야반(夜半)이란 말은 '밤 의 반'이라는 말이니 곧 ‘깊은 밤’을 뜻하는 것이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길이 없고, 야평(平)산은 야반(半)산의 오기(誤記).
다만 70여년 전 조국수호의 현장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었다.
지금도 유해발굴 안내판이 있어 무심한 산꾼을 숙연케 한다.
옥녀봉 또한 국도 2호선 옆에 낮게 솟은 봉으로 전국의 같은 이름처럼 어설픈 전설이 있다.
그러나 야반산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
지형도에 나와있는 옥녀봉(玉女峰)은 155.4m이지만 그 서쪽 네이버지도에 기록된 181m봉이 더 높다.
산 이름은 대개 아랫마을에서 짓고 부르는 법.
가까이 붙은 두 봉우리를 합쳐서 옥녀봉으로 부르는 듯하다.
우산(牛山 198.4m)은 200m도 안되는 조그만 산으로 창포만과 진동만에 낮게 솟아있다.
밤고개 동남쪽에 있는 우산엔 산불초소가 있고, 산불감시를 위한 듯 주위 나무를 모두 베어내어 남으로 창포만과 북으로 낙남정맥의 산줄기들이 훤히 바라보인다.
소(牛)와 관련된 이름이니 우리 민족의 정서와 상당히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자세한 자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조선초 군현제 개편으로 진해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는데, 그 별호가 팔진(八鎭)·우산(牛山)이었다.
우산은 삼면봉(三面峰)으로 진동면·진북면·진전면이 서로 한 발씩을 딛고 있다.
우산 아래 밤고개(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삼진의거대로 387)에 있는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투 전첩비’는 지난 1992년 건립되었다.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구축한 유엔군은 피의 공방으로 진동리지구를 사수하였으며, 이 전투에 해병대가 전공을 세운 것.
1) 우산: 밤고개 율티마을 버스 정류소 인근에 차를 댔다.
고갯마루에는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하산할 땐 안부에서 질러 내려오니 편의점과 경정비(경원 밋션카 전문점)가 있는 휴게소 수준의 커다란 주차장이 있었다.
다음 산행의 편의를 위하여 1km남짓 차량이동하였다.
2) 옥녀봉: 2번국도 굴다리 아래(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예곡리 106)에 주차를 하고 옥녀봉을 올라 예곡마을회관으로 내려왔다.
3) 야반산: 동삼마을회관과 함박골 중간쯤<진북면 인곡리 1097> 철탑이 있는 산자락으로 붙으면 능선으로 등로가 나있다.
내려 오면서 확인한 길이었고, 실제는 무덤이 있는 곳에서 안부에 접근하려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1)우산은 차량을 이용하여 따로 오르고, 2)옥녀봉과 야반산은 2번국도 굴다리 아래에 주차를 하고 회수하였다.
차량이동 1km를 포함하였다.
고도표.
산길샘
옥녀봉 두 봉우리에 따로 표지기를 걸었다. 전쟁사에는 옥녀봉이 181m로 표시되었다.
밤고개(율티)가 해오름 간판뒤로 보인다. 그
고개 좌측 도로건너(100여m)에 '해병대 진동지구 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나는 잘린 밤고개 우측 능선으로 길을 찾았다.
밤(栗)이 많이 나 밤고개가 되었고, 이를 한문화하다보니 율티(율치 栗峙)가 된 것.
고개를 영(嶺)· 현(峴)·치(峙)·점(岾)·항(項) 등 한자 용어와 고개·재·목·퇴··티 등 순수한 우리말 용어로 다양하게 불린다.
산길 찾기는 율티마을 정류소 뒷편 화살표 방향.
능선으로 붙기위해 이리저리 길을 찾다...
신경수 님의 반가운 표지기를 만났다.
내가 올라온 길을 돌아본 뒤...
사면으로 난 길을 비스듬히 오르자...
묵묘가 있는 나즈막한 봉(약 95m)에 올랐다.
잠깐 내려서자...
무덤이 있는 안부. 여기서 편의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다시 무덤을 지나자...
제법 가파른 등로.
하늘이 열린 곳으로 나무가 베어져 있어...
왠가 하였더니 산불감시초소가 있었다.
산불감시를 위하여 베어낸 것.
삼각점 안내판.
산불아저씨는 안보이고, 그 옆에 벤치와 목장승이 산정을 지키고 섰다.
멀리 인성산과 우측으로 낙남정맥이 펼쳐진다.
지금 내가 답사하게될 옥녀봉이 좌측 가까이에 보이고, 우측 능선에 야반산이 솟아있다.
내가 선 곳이 우산이니 세 산이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셈.
다시 보는 두 산. 멀리 한국전쟁의 참화가 서린 서북산과 여항산도 보인다.
<동영상>
목장승의 나무판때기에 매직펜으로 '牛山 198.4'라고 적어 넣었다.
그런 뒤 창포만 너머로 호암산 줄기를 짚어보고...
더 우측으로 적석산인 듯 헤아려 본다.
'牛山 198.4'라 쓴 표지기를 걸고 돌아섰더니 산중 반가운 산객을 만난다.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다 카메라를 맡겼다.
"그만 됐습니다."했더니 가까이 다가서 한 방 더 찍는다.
산객과 헤어져 되내려선 무덤 안부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공터가 보이는 곳은...
김밥 등을 파는 편의점이 있는 곳.
고속도로 휴게소 수준이다.
그 옆엔 '경원밋션카 전문정비'가 있다. 차를 여기에 댄다면 빨리 다녀올 수 있을 것.
차량회수를 위하여 밤고개를 넘어가는 길 건너에...
눈에 익은 뽈대형(?) 기념탑인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첩비'가 있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중앙 휀스가 완벽해 무단횡단은 언감생심.
그래서 훗날 고성군 동해면을 가면서 차에서 내렸다.
뽈대형 기념탑과...
안내판.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첩비를 크게.
전첩비 아래에 새겨진 안내판.
차량을 회수하여 1km 남짓의 옥녀봉 들머리로 이동을 한다. 작은 굴다리는 아까 반고개가 있는 1021번 지방도를 통과하는 것.
정면에 뽈록뽈록 두 옥녀봉이다.
그런 뒤 만나는 굴다리는 2번,14번,77번 국도로 도로 좌측이 진전터널이다.
굴다리를 빠져나오자마자 볼록거울이 있는 뒤로 산길이 반질반질하다.
굴다리 앞 볼록거울 뒤로 올랐다.
우측 1~200m 앞의 진전터널은 양방 터널이어서 도로도 두개로 나누어진다.
산자락으로 올라서자 다음에 이어갈 야반산이 우로 보이고...
능선에는 무덤들이 조성되어 있다.
능선 좌측으로 올라오는 반듯한 길은?
수더분한 능선을 오르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좌측 사면으로 비스듬히 난 길에 홀로 매달린 시그널은 '도요새' 님의 '홀로 깊은 산속을 헤매다'이다.
산어귀에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두 옥녀봉의 중간인 안부로 올라 우측 작은 옥녀봉을 갔다가...
아무런 흔적 없는 봉우리에 표지기를 걸었다. 지형도에 옥녀봉(155.4m)으로 기재된 곳.
그리곤 되내려 갔다 오른 큰 옥녀봉(NAVER 지도에 있음)에 184m로 적었지만 전쟁사엔 181m로 표기되어 있었다.신경수 님, 도요새 님의 시그널 옆에 나란히 나의 서명한 표지기를 걸었다.도요새 님의 시그널은 바닥에 떨어져 땅속에 반쯤 묻혀 있었지만 먼지를 턴 뒤 반듯하게 걸었다.
큰 옥녀봉엔 묵묘.
내려서는 능선 안부에서...
우측 예곡마을로 비스듬히 내려선다.
예곡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솔밭무덤)에서...
밭을 가로질러 나갔지만...
좌측 농가 옆으로 빠져나오면 되겠다.
화살표는 솔밭무덤.
고목이 있는 골목으로 빠져나오자...
정자가 있는 예곡마을회관.
다음에 이어갈 야반산 줄기를 올려다 본다. 좌측 봉우리가 야반산이고, 그 좌측 잘록한 곳이 내려설 곳.
예곡마을 버스 정류소 안내판 건너편에...
'동삼마을→' 표석이 있다.
좌측에 솟은 봉이 야반산.아스팔트로 곧장 걸어가 야반산을 먼저 오른 뒤 능선을 타고 내려 오려다 어두워지면 안될 것 같아 먼저 산을 오르기로 하였다.그래서 길눈을 크게 뜨고 촉각을 곤두 세웠다.
동삼교를 건너 정면에 야반산이 우뚝하다.
동삼마을회관 뒤 개활지가 보이는 곳으로 올라 좌측 잘록이로 접근하려던 계획은 길이 없어 틀렸다.
우측으로 난 농로가 실제로 내가 올랐던 길.
간이 농막인 듯한 곳으로 올라...
추계 추씨 묘 좌측으로 난 길로 좌측 능선에 붙었으나 이렇다할 등로는 없었다.
내려다본 동삼마을.
올라선 지능에서는 거기까진 길이 있었으나 이후 잡목이 앞을 막아 더이상 진행불가.
어쩔 수 없이 좌측 하늘이 살짝 열린 안부 쪽으로 뚫고 나가...
계곡치기를 감행하다...
더이상 여의치 않아 좌측 능선으로 올라 붙었다.
그러자 능선에선 그런대로 반듯한 등로가 뚫려 있었다.
무덤을 지나며...
비석을 확인하니...
증가선대부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
뒷 면을 확인하니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썼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인 순종 즉위로 연호가 광무(光武)에서 융희로 바뀌어 1907년부터 1910년 국권상실 때까지 쓰였다.
이제 산길은 괜찮은 편.
주능선에서 철탑을 만난다.나중에 내려올 때 확인하였더니 능선 밑에도 철탑이 있으니 철탑이 있는 능선이 참고가 될 것.
묵묘를 지나고...
유해발굴 현장인가, 구덩이가 파여져 있다.
서명한 '夜半山' 표지기를 걸고...
하산을 서두르자 등로 옆에 안내판이 있어 카메라에 담는다. 묵념~
2007년도에 유해발굴이 있었고, 이 장소가 유해발굴 장소인 것. 유해 40구와 유품 천여 점.
의림사 우측으로 수리봉이 솟았고, 이어지는 능선 좌측으로 인성산, 우측으로 서북산이 연결된다.
우측으론 베틀산과 평지산이 또다른 능선을 잇고 있다.
안부로 내려가는 능선에 수리봉이 우뚝.
잘록한 안부에 내려섰다. 우측은 예전 서북산 갈 때 금평에서 올라온 곳. 오늘은 좌측으로 내려서야 한다.
'의림사↓'라는 작은 표지기를 건 뒤...
무덤을 지나...
편백숲을 빠져 나간다.
무덤이 있는 곳에서...
널따란 산판길이 있고...
의림사로 가는 길에 '부도3기' 뒤에 있는 '노인요양원' 건물이 보인다.
당겨본 노인요양원.
산판길에서 돌아본 내려온 방향.
노인요양원 앞 다리옆에...
인곡버스정류장.
인곡 버스정류장 뒤로 내가 내려온 잘록한 안부. 이 길은 네이버지도에 등로가 그어져 있어 참고가 된다.
정류장에서 의림사 방향 1~20m 위에 있는 괘불대. 지난 인성산 산행 때도 답사하였다.
내려오면서 좌측으로 올려다 본 야반산.
그리고 지난 인성산 때도 답사했던 부도3기.
중간 부도 옥개석 상륜에 '한유당(閑遊堂)'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
내려가는 길, '현대사랑병원' 방향으로 들어가...
아까 오른 저 끄트머리 옥녀봉을 바라보며 아직 한참이나 걸어야 할 판.
정자가 있는 한밭골. 그 뒤로 펼쳐진 능선은 아까 내가 지났던 곳일 것.
한껏 자태를 뽐내는 매화.
매화는 이 시기가 제일 아름다운 것.
좌측으로 농로가 있어 아까 등로가 있던 능선으로 길을 확인해 본다.
농가를 지나고...
대숲을 지나니...
잘 관리된 무덤 뒤로 산길이 보인다.
이 길로 오르면 아까 접속한 능선등로에 오를 것.
그 길은 함박골과 동삼마을의 중간쯤 된다.
내려오면서 돌아보니 철탑이 있는 능선이고, 동선은 화살표.
일몰이지만 이미 산행은 끝나 여유롭고, 저 아래 옥녀봉이 솟아 있는...
고목과 정자가 있는 예곡마을회관에 닿았다. 뒤론 나즈막한 옥녀봉.
옥녀봉을 돌아 2번국도 아래 내 차만 덩그러니 남은 굴다리로 돌아왔다.
지난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승리의 날’ 67주년 노병대회에서 “우리는 총이 부족해 남해를 지척에 둔 낙동강 가에 전우들을 묻고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던 동지들의 한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남침에 따른 6·25전쟁의 목적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며, 아직도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