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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10월 16일 금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또는
[백]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라며,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었고 여러분도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11-14
형제 여러분,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7
그때에 1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나무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충고하십니다. 자신들의 위선을 조심하라는 것이지요. 겉으로만 본다면 위선도 선의 형태를 띨 수 있기에,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시편 7,10) 하느님께 그렇게 껍데기이기만 한 선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겉과 속이 일치한 가운데 하느님을 따르라고 여러 차례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만큼(루카 12,6 참조)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속이고 감출 수 있어도 흐르는 시간 안에서 영원히 감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역사와 시간과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가 아니라 이 세상을 지으신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셨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중요한 의미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믿는 이들에게 이 말씀은 목숨까지 걸 수 있을 만큼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순교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찾으며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머물며,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청해 봅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 세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김영송 알베르토 신부)
하느님과의 친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다인들은 고단백질 섭취원으로 소나 양, 염소 고기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축들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도 가끔씩 기름진 고기 맛을 봐야했었는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라 소나 양, 염소는 꿈도 못꾸었습니다.
차선책으로 그들은 참새구이를 즐겨 먹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몇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은근 맛있고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참새잡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도 생겨났고, 시장에 가면 살아있는 참새가 매매되곤 했습니다.
시장에서 사 온 참새는 깃털을 뽑고, 내장을 빼낸 다음, 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불판 위에 얹어 돌려가며 구웠습니다. 가성비가 높다 보니 참새는 당시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식재료로 손꼽혔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관세법 관련 고대 비문에서는 식품으로 활용되는 모든 조류들 가운데 참새가 가장 저렴했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참새의 저렴함에 대해 언급하고 계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
예수님께서는 세상 둘도 없이 하찮은 존재의 대명사로 참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고 귀히 여기신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요, 참새보다 몇천 만 배 더 소중한 인간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시겠냐는 것입니다.
마무리 말씀 또한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특히 탈모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천만 탈모인들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루카 12,7)
물론 예수님 말씀의 진의가 이미 사하라 사막처럼 폐허가 되어 버린 이마를 무성한 수풀처럼 복원시켜주시겠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각별히 여기시며 눈여겨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와 일대 백이 아니라, 일대일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친히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며, 나와 매 순간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 속에 사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엔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쌓여 있고 아군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도 버려야겠습니다.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를 기억하고 계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 둘도 없이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더 이상 흔들리지도 말며, 안심하고 기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에는 길을 떠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두 여인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현실을 벗어나 길을 떠납니다. ‘폭풍 속으로’의 인물들은 파도와 위험 속에서 자신들이 갈망하는 자유와 한계를 찾아갑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10년 동안 바다를 떠돕니다. 세 작품은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지금 있는 곳을 떠나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떠나는가?”보다 “나는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델마와 루이스’ 여정에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자유를 찾아 떠났지만 결국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막다른 절벽이었습니다. ‘폭풍 속으로’에서도 자유를 향한 갈망은 강렬하지만, 그 자유는 죽음의 위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반면 ‘오디세이’에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돌아가야 할 이타카가 있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이렌의 유혹도, 폭풍도, 수많은 좌절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목적지가 있는 사람은 폭풍을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서 가느냐입니다.
성경에도 위대한 여정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었습니다.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델마와 루이스’와 같은 탈출의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모세에게는 목적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백성들의 원망을 들으면서도 계속 걸었습니다. 출애굽의 핵심은 ‘이집트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도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의 여정은 모세와 방향이 조금 달랐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갔다면, 바오로는 자신이 받은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를 향했습니다. 배가 난파되고,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으면서도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오로에게 중요한 것은 안전한 여행이 아니라 복음이 가야 할 곳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가 있었다면, 모세에게는 약속의 땅이 있었고, 바오로에게는 복음을 기다리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목적지가 분명했기에 폭풍이 여정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모든 여정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은 뒤에만 도착하는 먼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용서할 때, 가난한 이를 돌볼 때, 진실을 선택할 때 이미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을 피해 도망가는 ‘델마와 루이스’의 탈출도 아니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한 ‘폭풍 속으로’의 질주도 아닙니다. 오디세우스처럼 돌아갈 곳을 알고, 모세처럼 약속을 믿으며, 바오로처럼 복음을 품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시작과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도 모두 길 위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인생의 잔잔한 바다를 지나고 있고, 어떤 사람은 거센 폭풍을 만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를 잊지 않는다면 다시 걸을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이타카가 있었고, 모세에게는 약속의 땅이 있었으며, 바오로에게는 복음을 기다리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선택한 이 길은 나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고 있는가?” 주님, 세상의 수많은 길 가운데 생명의 길을 선택하게 하시고,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목적지를 잃지 않으며,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게 해 주십시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누룩>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 12,1ㄷ)
나
당신께
밝음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밝음이게
나
당신께
맑음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맑음이게
나
당신께
깨끗함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깨끗함이게
나
당신께
믿음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믿음이게
나
당신께
희망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희망이게
나
당신께
사랑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사랑이게
나
당신께
기쁨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기쁨이게
나
당신께
참됨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참됨이게
나
당신께
착함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착함이게
나
당신께
고움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고움이게
나
당신께
품음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품음이게
나
당신께
베풂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베풂이게
나
당신께
돋움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돋움이게
나
당신께
섬김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섬김이게
나
당신께
살림으로
스미렵니다
당신께서 살림이게
오늘의 성인
성녀 헤드비히(헤드비제스)
활동년도 : 1174?-1243년
신분 : 과부, 수녀
지역 :
같은 이름 : 야드비가, 헤드비가, 헤드비그, 헤드비제스, 헤드비히, 헤트비히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안데흐스(Andechs) 성에서 베르톨트(Berthold) 공작의 여덟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코니아(Franconia)의 키칭겐(Kitzingen)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세 때에 18살의 폴란드 왕자이자 후에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Heinrich I)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또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내의 신앙생활과 자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브로추아프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의 설립을 후원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수도회에 아낌없는 후원을 보냈다. 또한 1202년 노이마르트(Neumarkt)의 병원에서 나환자 여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의 활동에 감동을 받아 트레브니츠(Trebnitz)에 있는 자신의 땅에 시토회 수녀원을 지어 기부하였다. 이 수녀원은 슐레지엔 지방에 세워진 첫 번째 여자 수도원이었다.
성녀 헤드비지스와 하인리히 1세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8년에 남편과 사별한 성녀 헤드비지스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하여 큰 덕을 쌓았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물질적, 영성적 이익을 위하여 늘 헌신하였으나, 자기 자신은 극도의 가난 속에서 하느님만을 섬겼다고 한다. 헤트비히, 야드비가(Jadwiga) 등으로도 불리는 성녀 헤드비지스는 1243년 10월 15일 트레브니츠의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나 수녀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성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1267년 3월 26일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슐레지엔 지방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et Mary Alacoque)
신분 : 수녀, 환시자
활동연도 : 1647-1690년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마르가리타,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알라콕
클로드 알라코크와 필리베르트 라멩의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는 1647년 6월 22일 프랑스 샤롤레 지방 베로브르의 로트쿠르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8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샤롤레의 성녀 클라라(Clara) 수녀회의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그러나 15세가 될 때까지 5년 동안은 류머티즘 열로 인하여 자리에 누워서 지냈는데, 어릴 때부터 성체께 대한 신심은 남달리 뛰어났다. 그녀는 결혼을 거절하고 1671년 6월 20일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그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 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서약을 하였다. 그녀는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유머 없는 수녀로 통했던 것 같다.
그녀는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그리스도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러한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매주 목요일 밤에 성시간을 갖고 구속사업에 참여하라는 신심을 그녀에게 교육시켰으며, 예수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구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하였으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신의 수녀회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녀원의 고해신부였던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de la Colombiere, 2월 15일)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콜롱비에르 신부는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이었는데, 그는 마르가리타의 환시가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1684년 멀랭 수녀가 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수도원 내의 반대도 종식되었으며, 후일 그녀는 수련장이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녀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경당이 수녀원 뜰에 세워졌고, 곧이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전세계의 성모 방문 수녀회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마르가리타 마리아는 1690년 10월 17일 수녀원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1864년 9월 18일에 시복되었으며,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와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8월 19일) 그리고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선포되었으니, 그녀의 사후 75년 만의 일이었다.
성 갈로 (Gall)
활동년도 : +635년경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지역 :
같은 이름 : 갈루스
아일랜드 태생인 성 갈루스(Gallus, 또는 갈로)는 뱅거(Bangor)에서 성 콤갈(Comgall, 5월 10일)과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11월 23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성 콜룸바누스를 수행하여 프랑스 지방 선교에 나섰던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며, 스승과 더불어 안느그레(Annegray)와 뤽세이유(Luxeuil)에도 갔었다. 그 후 그들은 취리히(Zurich) 지방을 돌며 복음을 선포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스승은 이탈리아로 갔다. 이 때 그는 건강이 나빴으므로 수행하지 못하고 슈타이나흐(Steinach) 강변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였는데,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성 갈루스(오늘날의 장크트갈렌, Sankt Gallen)의 수도원은 중세까지 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의 중심지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는 스위스 아르본(Arbon)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