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접어놓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쉽지 않은 때를 살고 있기에 더욱 희망을 그려야 합니다. 병마도 이겨야 하고 경제도 일으켜야 하고 우리들 사이에 엉클어진 관계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짜증나는 창살 없는 감옥의 시간도 어서 물리쳐야 합니다. 힘차게 일어나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주변 환경은 그다지 만만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지혜를 짜 내야하고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서로 쥐 박고 할퀴고 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함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겨우 3월 중순에 접어드는데 4월의 날씨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또 갑작스럽게 기온이 뚝 떨어질까 걱정됩니다. 아침에 점퍼를 입었다가 한낮에는 벗어버립니다. 그러다 저녁에는 다시 주섬주섬 찾아 입습니다. 정말 주체하기 어렵네요. 나가지 않는 게 편합니다. 그런데 이제 좀 나가 다니면 좋겠습니다. 정말 답답하지요. 2년을 버텼고 이 3년째를 또 당하라고요? 움직일 수 있을 때 다녀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기야 전쟁 마당으로 변한 나라를 보자니 마음이 아프고 짠해집니다. 이 정도로 지내는 것도 감사하고말고요. 그래도 꽃 피기 전에 해방의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이 작은 지구촌이 왜 이리도 요란하냐 싶습니다.
꽃 소식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픈 이야기들이 좋은 소식들로 바뀌어 들려오기를 기다립니다. 춘3월 행복한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고요. ^&^
2022년 3월 12일 김종우 목사 드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로마서 2 : 9 - 11)
<안테벨룸>
세상은 공평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습니다. 어디에서나 차별이 있습니다. 또한 차별이 있기에 불공평합니다. 아마도 역사적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인종적 민족적 차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민족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가장 뚜렷한 것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이 가진 자가 있고 적게 가진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대우가 달라지고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일등석에 앉아서 편안히 가고 누구는 3등석에 앉아서 가야 하는 현실을 누구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아니 불평한들 아무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고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차별이 가장 뚜렷하고 혹독하게 일어나는 것은 똑같은 사람임에도 짐승처럼 다루는 것입니다. 옛날에 노예가 그랬습니다. 정말 아주 옛날에나 있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근세까지도 이어온 것이 바로 유색인종에 대한 자세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미국 남부지방의 인종차별이 가장 혹독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시아인들도 초기 미국 이민시절 그 비슷한 처우를 받았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래도 미국 남부지방에서 노예생활을 한 흑인들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사람대우를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짐승만도 못했습니다. 물건처럼 사고파는 것은 기본이고 맘에 안 들면 살해해도 그만이었습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종차별은 아직도 때때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는 차별철폐를 인정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서 징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문명인으로서 우리는 계속 의식의 개혁과 사회적 공익을 함께 이루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각자가 경계심을 가지고 함께 노력하며 실현해가야 하는 일입니다. 차별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으로 인한 상황일 뿐 사람 자체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간이란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누구나 존중해주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든’이 어떻게 노예로 팔려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죽을 때까지 일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러다 주인에게 잘 보여서 조금 나은 자리로 옮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약할 수 없는 일이고 그 때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더구나 성숙해지는 모습에 관리자의 눈은 욕정까지 품은 듯합니다. 가까운 친구가 무참히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후 임신한 동료가 또한 견디다 못해 목을 맨 것까지 수습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여기 있어도 사람다운 삶은 없습니다.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 돌아볼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일단 벗어나보기로 합니다.
‘베로니카’는 인종차별을 철저히 배격하며 그 문제에 대하여 저술도 하고 다니며 강연도 합니다. 사회적 저명인사가 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자신만의 행복한 가정도 꾸렸습니다. 어느 날 성공적인 강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즐겁게 파티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려 택시를 불러 탑니다. 뒷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를 떱니다. 그런데 예약한 택시 기사가 전화를 헸습니다. 어디 있느냐고? 지금 타고 있는데 무슨 소리? 아차 싶지요. 그러자 뒤에서 한 남자가 목을 죕니다. 발버둥 쳐보지만 운전기사도 한 패입니다. 친구들이 탄 차가 옆으로 지나갑니다. 알 턱이 없지요. 소리소리 질러도 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끌려갑니다.
깨어나 보니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어둑한 좁은 방, 거기에 한 남자가 버티고 말합니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아. 너는 절대로 내게서 피할 수 없어.’ 반항하는 듯하자 혁대로 가차 없이 휘갈깁니다. 그 때 밖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납니다. 남자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갑니다. 여자가 이를 악물고 힘을 내어 기어나갑니다. 그리고 막대기를 주워 뒤에서 남자를 내리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격투를 벌입니다. 여자가 쓰러졌을 때 마침 그 때 여자와 잘 아는 흑인남자가 달려와 싸움에 껴듭니다. 불행히도 남자는 백인 관리자의 총에 쓰러집니다. 그 새 여자가 다시 일어나 관리자를 내리칩니다. 결국 그의 칼을 빼앗아 찌릅니다. 죽어가는 그에게 그의 핸드폰을 대고 안면 인식으로 핸드폰을 켭니다. 그리고 구조요청을 하지요.
기막힌 조합입니다.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고 영화도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구성으로 주제를 전하며 흥미까지 덤으로 제공해줍니다. 못살게 괴롭히던 관리자가 ‘이든’을 부르며 끝까지 괴롭힙니다. 모두 처리하고 돌아서며 여자가 말합니다. ‘난 이든이 아니라 베로니카란 말이야.’ 구조대가 와서 베로니카를 돕습니다. 그리고 경찰이 와서 ‘안테벨룸’이란 간판을 밀어버리며 기념공원을 폐쇄하는 조치를 행합니다. 그곳은 ‘남북전쟁기념공원’이었습니다. 영화 ‘안테벨룸’(Antebellum)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전전의’ 또는 ‘남북전쟁 전의’란 뜻입니다.
질문 3.
창 1 :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 우리가 누구죠? 하나님이 몇 명 되나요? 삼위 하나님이라고요? 그러면 더욱 이상합니다. 창 3 :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기 ‘우리’는 누구인가요? 삼위 중 한 분이 배반했나요?
이 부분에 대해서 처음 들었던 설명은 바로 ‘삼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3장에 가서 다시 나오는 ‘우리’에 대하여는 왜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빠르게 잊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생각 없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성경이 무슨 입학시험을 위한 공부 교재도 아니고 직장 들어가기 위한 자격증 시험 교재도 아닙니다. 그만큼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읽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신자이니까 예의 상 읽는 수준이랄까요? 정말 육신이 음식 먹듯이 맛있게 먹는 경우는 웬만큼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안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랜 동안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이 120년이라고 듣고 배우고 알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배웠습니다. 창 6 :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 120년이 왜 방주를 짓는 기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욱 괴이한 일은 그렇게 가르쳐주니 그런 줄 알고 믿은 것입니다.
사실 방주를 지을 때 노아의 아들은 세 명이었고 아마도 모두 최소한 십대 청소년은 지나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 5 : 32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그러니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던 때는 이미 나이 500이 넘었습니다. 이어서 봅니다. 창 7 : 11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즉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방주는 지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를 예고하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창 6 :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방주를 짓기 시작해야 할 시점에 노아에게는 이미 세 아들이 더구나 며느리들까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방주를 지었던 기간은 아무리 따져보아도 100년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앞뒤를 따져보지 않고 한 군데만 읽고는 판단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그림이나 영화 또는 연극이나 드라마를 보면 가끔 천사가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천사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소위 영적인 존재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히 1 :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그런데 천사를 그리거나 등장인물로 만들면 어떤 다른 동물이나 이상한 생명체를 만들지 않고 사람의 형상을 만듭니다. 아니면 사람으로 나타나지요.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사람이기는 한데 다만 날개가 달려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니 날개만 빼면 사람과 똑같습니다. 천사를 본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영안이 열려 실제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여타 동물들이 아니라 왜 하필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까요? 그러면 천사가 사람을 닮았을까요, 사람이 천사를 닮았을까요? 일단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먼저 만드셨을까요, 사람을 먼저 만드셨을까요? 어느 쪽이 먼저이겠습니까? 마치 닭이냐 알이냐 하는 질문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막연히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 절대권력자인 왕이 등장합니다. 전권을 가지고 있으니 무엇이나 임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왕이라고 세상만사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래서 왕 혼자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대신들 곧 문무백관이 있습니다. 권력의 무게는 그만 못하지만 오늘날 대통령이라 해도 혼자서 나랏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대한 조직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생긴다든지 또는 중대한 일을 행하려 할 때는 혼자 결정하지 않고 각료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합니다. 서로들의 의견들을 내놓고 논의해서 결정합니다. 왕이 지배하던 봉건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가끔 어전회의를 열고 논의합니다. 각 대신들의 의견들을 들어보고 최종적으로는 왕이 결단합니다. 그렇게 결정해서 시행합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혼자서 다 하실까요?
왕상 22장에서 우리는 잠깐 하나님 계신 하늘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하는 선지자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마치 앞에서 이야기한 사극의 한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대체로 두 나라는 서로 앙숙이 되어 쌈질만 하고 지냈는데 짧은 한 시대를 아주 사이좋게 지낸 적이 있습니다. 북쪽의 아합 왕과 남쪽의 여호사밧 왕 때입니다. 둘 사이가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잘 아는 대로 아합 왕은 철저한 우상숭배자이고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매우 신실한 신앙을 가졌던 왕입니다. 이 전혀 다른 신앙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돈지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을 방문하고 있던 때입니다. 아합 왕이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는 가운데 상실한 국토를 되찾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땅을 되찾자니 전쟁을 히야 합니다. 북쪽에 있는 아람 나라와 싸워서 승리하여 잃었던 땅 ‘길르앗 라못’을 되찾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람 나라를 상대하려니 아무래도 힘이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돈댁인 여호사밧 왕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왕상 22 : 3 - 4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뇨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여호사밧 왕은 사돈댁이 도움을 청하니 기꺼이 응합니다. 그러나 신앙 좋은 왕은 먼저 하나님께 여쭤보기를 청합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자기 선지자들을 불러 모으지요. 그리고 물어봅니다. 모두 한결같이 나가서 싸우면 승리한다고 부추깁니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이 보기에는 모인 선지자들이 아무래도 신뢰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에게 묻습니다. 7절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아합 왕이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한 선지자를 부릅니다. 그렇게 해서 이물라의 아들 미가야 선지자가 궁으로 불려 들어옵니다. 과연 여호와의 선지자가 이 우상숭배자인 왕의 입맛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싫어했던 것이고 지금은 그래도 사돈댁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므로 그 청을 받아 부른 것이지요. 아합 왕이 상황을 이야기하고 여호와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묻습니다. 그 때 선지자 미가야가 그들 앞에 자신이 본 것을 말해줍니다. 17절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한 마디로 패배를 예언한 것입니다.
미가야는 바로 이어서 보다 상세하게 상황을 이야기해줍니다. 좀 길지만 중요한 부분이기에 다 인용하겠습니다. 19 - 23절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이 장면을 그려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하늘 궁전의 어전회의를 보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앞에 많은 문무백관, 곧 하늘의 영들(천사들)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제를 내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20절에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시면 하룻밤에 십만 대군도 시체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깟 왕 하나 죽이려고 어전회의까지 하십니까? 아무튼 선지자는 이 하늘의 광경을 목도하였습니다.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늘 곧 영계에서도 하나님은 회의를 하시는구나. 그냥 이방인 군대라면 십만 아니라 백만이라도 한꺼번에 쓸어버리시겠지만 패역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 하나, 아합을 죽이는 일에는 보다 신중을 기하신 듯한 느낌입니다.
이 회의를 봅니다. 여기저기 영들이 자기 의견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다가 한 영(천사)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21 - 22절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자신이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답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 바 아합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나가서 싸우라 독려합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선지자들에게는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실제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따라 전쟁에 나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하늘 영계에서 하나님이 회의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합 왕 하나 죽게 만들기 위해서 회의를 베푸셨다면 아주 중요한 일, 천지창조를 마치는 무렵 그 만물을 맡아 다스리도록 사람을 창조하는 일에 회의를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자 이제 이 만물을 다스릴 사람을 창조하자. 어찌 만들면 좋겠는가? 여기저기 이런저런 의견들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론을 내리십니다. 창 1 :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영이신 하나님을 비롯하여 많은 영(천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 세상으로 말한다면 소위 왕궁의 대신들입니다. 그들의 의견들을 수렴하여 하나님은 결정하셨습니다. 우리 영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들은 영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땅에 살아야 하니 날개는 없도록 하자. 이제 이 문제의 답을 우리는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하늘의 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하나 더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영은 사람(육체) 안에 들어가서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한 예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4 :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셔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눈으로는 육신의 예수를 보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믿어지겠습니까? 이게 쉽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가 말하고 있으면서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떠드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믿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해해야 예수님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 10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 될 수 있습니까? 이 말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육체인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영은 이 땅에서 어떻게 일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육체인 사람에게 들어가서 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요일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할 수는 없습니다. 단 영은 보이지 않지만 그 영이 들어간 사람은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은 들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거짓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전해주는 말이 과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지 거짓말인지 분별하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아니하면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 질문해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예컨대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율법사들)이 전하는 말과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 어느 쪽이 진리의 하나님 말씀이었습니까? 왜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격하고 백성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고 막았습니까? 다시 오실 때는 그런 일이 없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