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의 변조와 기억의 카멜레온
장-폴 사르트르는 “이미지 image 는 의식 속에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의식하는 하나의 타입이다”1)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에 반사되어 생성되는 인상 impression 이나 기분(분위기 humeur 혹은 감성의 음색 tonalité)은 원래 불변하는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언제나 받아들이는 수신자의 의식에 따라 상대적이며 가변적인 양상을 가진다. 예를 들어 어릴 때 그렇게 넓어 보이던 동네 골목과 학교 운동장, 처음 보았을 때 가졌던 첫 인상과는 전혀 다른 지금의 무감각한 아내, 볼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마을 풍경 등은 바로 이러한 상대적 인상의 변화를 잘 말해주는 대표적인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골목은 골목일 뿐이고 아내는 아내일 뿐 사실상 대상은 불변하는 것이다. 특히 동일한 인물에 대한 내면적인 이미지는 이처럼 시간에 따라 그리고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 천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이러한 정신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물론 그 원인은 다양하다. 그것은 우선 대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익숙이 만드는 반응자의 의식 변화에 있다. 사실상 아무리 첫 인상이 특별하고 신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의 경과와 반복은 분명히 대상의 인상과 느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 문화적 익숙과 의미의 지속들이 만드는 의식의 착시(錯視)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이 ‘친숙하다’ 또는 ‘낯설다’하는 것은 단지 상대적일 뿐이다.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나 상황적 느낌은 우리의 의식 상태가 만드는 가변적이고 잠정적인 것들이다. 가령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이국땅에 간다고 해보자. 거기서 그저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곳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대상일 뿐이다. 역시 동일한 장면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인상이 공존한다.
프로이드 용어로 “친숙함 heimlich”이라는 뜻은 “불안함(혹은 오싹함) unheimlich”과 반대되는 말이 아니라, 서로 대립적 용어로 출발하여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끝나는 용어들이다.2)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범 혹은 진부는 단지 주어진 상황에 의한 반복과 익숙이라는 시간의 풍화에 의해 설명된다. 또한 이러한 평범은 어느 날 텅 빈 도시 골목을 보여주는 으젠 앗제의 사진에서와 같이 익숙이라는 옷 안에 감추어진 어떤 이상함 aura 을 누설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일상의 모든 평범과 진부는 언제나 최초의 생성 genèse 을 말하는 이상함과 오싹함을 동시에 은닉하고 있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이미지의 변화는 또한 기억의 변질에서 야기된다. 특별히 정신적 쇼크나 충격이 아니라면 과거 우리의 의식에 분명히 각인된 어떤 형이상학적 느낌은 일반적으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질된다. 어떤 기억을 환기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싹과 틀 그리고 확장의 세 단계로 설명될 수 있다. 반대로 기억의 변질은 이러한 구성요소들의 부재와 왜곡에 그 원인을 들 수 있다. 흔히 이와 같이 변질된 불확실한 기억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억 틀의 붕괴에 따른 레미니센스 réminicence 이다.
레미니센스는 감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어떤 음색이 지배하는 불확실하고 몽롱한 과거 장면으로 마치 기억 속에 사라지는 장면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변질된 과거의 인상이나 이미지일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때 레미니센스의 원인은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현상 즉 기억의 사회적 틀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기억과 망각은 결정적으로 그것이 속한 조직체의 응집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길을 가다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고 해보자. 우리는 바로 이 친구 때문에 당시 급우들과 담임선생님 그리고 잊지 못할 사건들을 기억한다. 이때 이미 붕괴된 초등학교의 기억 틀은 다시 재구성되고 이와 동시에 그것이 동반하는 당시 각인된 인상은 다시 재생된다. 이와 같이 우리들 정신 활동은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활동에 관계하기 때문에 사실상 기억은 언제나 사회적 틀을 갖고 또 이런 틀은 우리들 기억 전체에서 하나의 단위를 구성한다.
그래서 기억을 환기하거나 고착하는데 있어 기억의 구조적인 조직 즉 틀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망각이나 변질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틀의 붕괴와 변화에 그 원인을 가진다. 기억의 틀이 견고하고 확실할 때 우리는 어떤 과거사실을 쉽게 환기하고, 반대로 그 틀이 변화되거나 붕괴되면 우리는 기억 탐지에 어려움 느낀다. “기억 틀의 부재는 우리들 기억의 변질을 가져 온다”3) 라고 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구조적 조직인 “이미지 블록”은 점진적으로 붕괴되어 결과적으로 기억의 연상은 중단되고 그 음색은 변질된다.
특히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레미니센스는 어린 시절에 관계되는 기억 틀의 붕괴에서 야기되며 그 결과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애석한 느낌을 동반하고 있다. 그래서 “예전의 음색으로 어린 시절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때 어른의 시각으로 다소 진실보다는 가식적이고 미화된 환영 illusion 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사실상 서로 다른 두 기억 틀의 불연속에서 야기되는데, 왜냐하면 어른의 틀은 아주 견고하게 짜여진 사회적 틀인 반면 어린 시절의 틀은 독립되고 이질적이고 붕괴된 틀을 갖기 때문이다.”4)
결국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인상이나 느낌을 가지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편으로 반복과 익숙이 만드는 무감각이며 또 한편으로 대상에 대한 기억 틀의 급변과 불연속에 있다. 그래서 과거 기억의 틀에서 각인된 인상은 마치 카멜레온의 변색처럼 끝없이 현재의 변화된 사회적 환경 혹은 기억 틀에 의해 변질된다.
여기 전시된 묘령의 아이들 사진은 바로 이러한 기억 변질 현상을 암시하는 좋은 예가 된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작가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을 동일한 조건으로 거의 도식적으로 촬영하였다. 그 결과 사진들은 첫 눈에 복장, 액세서리, 제스처, 유행 등 어떤 공통된 사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혹은 도감 형식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나타난 이미지들은 더욱 더 이와 같은 자료적인 인상을 굳게 한다.
그러나 사진들은 결코 유형학적 기록도 중성적인 보고서도 아니며, 오늘날 몇몇 독일 사진가들이 실행하는 익명의 젊은이들의 획일화된 집단 현상과 자아 상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니콜라스 닉슨이 네 여동생의 사진을 해마다 기록한 사진이나 얀 사우덱이 매 5년마다 자신의 정부 베로니카를 찍은 사진과 같이 시간의 경과에서 오는 모델의 물리적 변화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욱 더 아니다.
여기서 작가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시간에 따른 모델의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시간의 경과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미 기억으로 각인된 개인 이미지에 대한 변질과 왜곡이다. 말하자면 직접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가졌던 각자의 인상은 졸업이라는 사건 이후 달라진 상황적 틀에 의해 점진적으로 변색되어,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들이 남긴 유일한 졸업 앨범을 뒤적거릴 때 그들은 전혀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작업의 궁극적인 의도는 과거 작가에게 이미 각인된 각자의 이미지는 졸업 후 그가 다시 발견하는 그들의 또 다른 이미지들과 결코 중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어떠한 번역도 허락하지 않는 사진 매체로는 분명히 재현의 한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신이 포착한 감각의 결을 따라 자신이 경험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의 실체들 즉 모델로서 곧 성년이 되는 묘령의 아이들을 재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의심할 바 없이 급격한 신체 변화, 의식의 급변, 불안한 자아의식, 판단 미숙 등 상황적인 가변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 보이는 사진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동일한 모델로부터 포착한 인상의 변조와 기억의 카멜레온을 암시하는 개념적인 지표 index가 된다.
글 / 이경률 (사진 비평)
1) Jean-Claude Filloux, La mémoire, Col. ˝Que-sais-je ?˝ PUF, 10ère éd., Paris, 1969, chapitre I. p.116. 2) Alain Buisine, Eugène Atget, édition Jaqueline Chambon, Paris, 1994. p. 61. 3) Maurice Halbwachs, Les cadres sociaux de la mémoire, édition Albin Michel, Paris, 1994, p. 98. 4) Ibi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