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내내, TV 禪하다/황지우
일요일 내내, TV를 禪하다
브론즈
20×07×18cm
1993
육체 : 그것은 生의 유일한 표지이다
1993년 6월 어느날 우연히 한 후배의 조소방을 들렸다.
장난삼아 흙을 주물러 보았다 느낌이 묘妙했다.
반죽의 원시적 연장성에서 살을 느꼈다 살 것 같았다.
일요일 내내, 오른팔로 머리를 괴다가 뻐근해지면 왼팔로 괴고는,
추욱 늘어져 죽어라고 TV만 보고 있는,
스스로를 모독하고 있는 것 같은 어떤 덩어리일 뿐인 노곤한 몸둥어리:
“그래 난 이거 벗어날 수 없지”라고 인정해버리고 나니까 문득,
뭔가 환해져 방바닥이 거울처럼 느껴졌던 것이 있었는데.
조소하는 사람들이 보면 조소를 금지 못할, 이른바 첫작품이라 할 이 졸작을
3일 하고 났더니 어디 손 안 닿는 가려운 데를 긁은 기분이 들었다.
이 덩어리를 반사 잘되는 스뎅판에 올려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
내 이 어찌할 수 없는 허영심!
나중에 석고로 떠졌을 때 난 이걸 깨뜨려버리고 싶었다. 수정의 여지 없이 굳어버린 명백한 오류들.
무엇보다도 석고의 물리적인 딱딱함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견딜 수 없었다.
어느 조각쟁이가 이 오류들이 되려 재미있으니까
그냥 놔두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가 나를 경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 읽기> 일요일 내내, TV 禪하다/황지우
위 시를 쓴 황지우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크고 작은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안개 같고, 아둠 같은, 그러면서 늪 같은 이무력감이 엄습해 왔을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無力무력’이라는 한자가 그대로 보여주듯이 생명력이 고갈 된 저기압 상태 또는 힘이 다 빠진 백지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맹목적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우리의 엄청난 생명애와 생명력은 도저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날 출구를 찾기에 안간힘을 다 바칩니다. 물론 그 일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에로스적인 힘 못지않게 무력감을 오래 지속시키려는 타나토스의 힘 또한 만만한 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불현 듯(?) 제집처럼 방문하는 이 무력감 때문에 얼마나 놀라곤 하는가요? 그러나 또한 사라질 것 같지 않던 그 무력감의 짙은 안개가 스르르 걷히기도 하고, 그 무력감의 두께를 뚫고 신생의 싹처럼 삶의 욕구가 움트는 것을 보며 우리는 또한 얼마나 놀라곤 하는가요? 그뿐인가요? 사방이 막힌 듯 캄캄한 마음의 방에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생의 신비를 보면 또한 우리는 얼마나 놀라는가요? 생의 내적 드라마는 이처럼 극적입니다.
위 시는 이런 무력감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선행될 때 그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는 작품입니다. 위 시는 황지우가 개인적으로 무력감의 끝에서 ‘흙’이란 물질을 만나고 그 흙으로 조각을 빚으면서 출구를 찾아내기 시작한 여정을 담아낸 것입니다.
무력감의 극복을 위해 시작된 그의 조각 창작은 마침내 종로의 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여는 데까지 이어졌고, 그것은 사진 작업을 동반하면서 시인의 시적 언어들과 결합되어 ‘조각시집’이라고 명명된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라는 시집을 나오게까지 하였습니다. 무력감에서 흙으로, 시에서 시집으로 나가는 한 개인의 자기발전 과정이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황지우는 그 유명한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조각시집이라고 이름 붙인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를 가장 좋아합니다. 이 시집 속엔 아주 낮은 자리에서, 발가벗은 몸으로 자아와 세계의 의미를 절박하게 고민한 시인의 흔적이 생생하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그것도 갑자기, 조각작품을 창작하여 유명한 화랑에서 전시회까지 열었다는 사실 앞에서 여러분은 의아함과 놀라움을 함께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든 조각이든 다만 그 재료를 달리할 뿐, 인간 영혼의 고처高處를 꿈꾸는 미학적 활동이 아니냐는 생각과 황지우의 예술적 재능이 다방면에 걸쳐 있다는 이면적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런 의아스러움과 놀라움은 상당 부분 가실 것입니다.
어째든 그에게 조각창작은 흙의 발견을 앞세우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그가 무엇보다 자가 치유를 성취하고 사회적 소통에서 건강성을 회복하게 되었다면, 이 일은 정말로 중요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그간의 숨은 사정과 관련하여 황지우가 전하는 아래의 말을 한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합니다.
그 어떤 반성도, 판단도 기투企投도 멎은 내 마음의 기제는 말하자면 정전停電 상태와 흡사했다고 할까? 이 어둠 속에서, 그래도 마음 깊은 곳 어디에선가 발버둥치는 생生에의 덧없는 의지가 있었던 탓인지, 바깥으로 나가려고 더듬거리는 필사적인 손짓이 있었다. 나는 빛이 희뿌염하게 새어 나오는 저 바깥을 향해, 벌레처럼, 더듬거렸다. 의식이 거의 퇴화하자 촉각만이 남았고, 뜻밖에도 그 촉각은 나에게 시원始原의 감각을 열러 주었으며, 그때 내 손 끝에 물컹하게 잡혀 있는 것이 진흙이었던 것이다. 진흙은 똥 다음으로 더럽다. 그러나 질컥거리는 그것이 촉감은 그 어떤 살보다 더 에로틱하다, 내 두 손에서 일어나는 촉각의 쾌감, 그것의 전율케 하는 직접성은 내 속의 무엇인가를 스파크 시켰다. 촉각이 영혼을 발전 발전시킨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았다. 나는 만졌다. 나는 깨어났다.
─《나는 만진다, 그러므로 나는 있었다》의 부분
몇 가지 말에 주목해봅니다. “나는 만진다, 그러므로 나는 있었다”는 이 전언, ‘정전停電에서 발전發電으로’라는 이 역전의 언어, ‘촉각이 시원始原의 감각을 열어주었다’는 것, 구체적으로 이렇게 세 가지 말에 주의를 기울여봅니다. 결국 그는 언어, 문명, 관념, 추상 등과 같은 것 대신에 물질, 구상, 살, 반죽 등과 같은 형이하학적(?) 세계에 의하여 자신을 살려낸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사회적 인간이기 이전에 생물임을 깨닫게 된 것이고, 그 깨달음과 그것의 바탕 위에서 사회적 행위가 건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인식한 것이다. 위의 조각 사진 아래 유독 큰 글자로 한 연에 단독으로 배치된 “육체: 그것은 生의 유일한 표지이다”라는 말은 이런 체험과 깨달음이 집약된 언표입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위의 시 <일요일 내내, TV 禪하다>에 나오는 조각사진을 보기로 합니다. 뱃살이 꽤 나온, 나이도 제법 들어 보이는, 전체적으로 근육보다 살이 많은 것 같은,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의 중년 남자가 와불臥佛처럼 머리에 팔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시의 제목으로 보건대 이 사람은 일요일 내내 방 안에 길게 누워 텔레비전을 벗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방금 와불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누워 있는 부처라는 의미에서의 와불은 앉아 있는 좌상의 부처보다 파격, 해방감, 자유분방함, 자연스러움, 편안함 등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입니다. 무심한 자만이 어디서나 누울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한다면, 누워 있는 와불은 부처의 상 가운데 가장 높은 경기를 가리키는 상징이라 볼 수도 있으며,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최고의 차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가 되고 싶은 자라면 면벽 속에서 묵언정진을 한다는 우리의 관념과 달리, 위 사진 속의 조각상은 텔레비전을 ‘禪선’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포함한 무력한 인간의 하루와 세속적이고 대중적인 인간들의 일상생활을 자조적으로 고발하느라고 이런 장면을 등장시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 삐딱한 시선을 갖고 본다면, 위 사진 속의 장면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운 유희가 지닌 진가를 알고, 휴일이 오면 와불의 자세로 누워 텔레비전이나 보며 시간과 인간사를 잊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별다른 생각없이(부처님 생각 없이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텔레비전에 흠뻑 빠져들어 ‘무아無我의 참선’을 실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생을 대중적으로 즐기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온전히 초월하여 부처도 되지 못하면서, 어정쩡한 진지함만으로 자학과 가학의 무력감에 빠져들어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아둔하고 난처한 부류에 속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위 사진 속의 중년 남자는 아무래도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부류 가운데 후자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는 텔레비전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생각없이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렇다고 해탈도 하지 못한, 소위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데카르트적 인간 단계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진 속의 중년 남자는 살도 꽤 붙었고, 눈도 지긋이 감았으면, 와불과 같은 모습으로 길게 누워 있으나 실은 그 속에 엄청난 소외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각사진에서 눈을 떼고 나면 이내 “육체 : 그것은 生의 유일한 표지이다”라는 경구 혹은 잠언 같은 말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그것은 조각이라는 작업을 통해 그가 흙을 만집으로써 깨달은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인간이 육체(살, 생물, 흙)라는 사실의 발견과 수용, 생각 이전에 살이 있고 관념 이전에 흙이 있으며, 인간 이전에 생물이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살로서의 육체는 한편 슬프지만 정직하고 생생합니다.
다음은 조각사진의 긴 주석 같기도 하고, 시 전체의 한 부분 같기도 한 꽤 긴 글을 보기로 합니다. 시인은 주석 같기도 하고, 분문 같기도 한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말들을 꺼내놓습니다. 대충 적어보면, 후배의 조소방에서 우연히 주물러본 흙의 느낌이 ‘묘妙’했다는 것, 거기서 ‘살’의 느낌을 받았다는 것, 그랬더니 ‘살 것’ 같았다는 것, 그 살이 자신의 ‘육체’라는 것, 그것을 인정했더니 뭔가 ‘환하게’ 트이기 시작했다는 것, 이 육체이자 살이며 흙을 만져 사진 속의 조각을 만듦으로써 무엇인기가 ‘해결’되는 것 같았다는 것 등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시인은 흙과 살이 의미하는 이른바 자연적 존재에 근거하여 자신을 재인식하고 치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압니다. 관념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흙을 만났을 때 그 앞에서 그대로 무너지며 동시에 살아나는 비밀을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생각없이 조각작품을 만들고 나니. 숨죽였던 그의 문화적, 사회적 자아가 얼마나 격렬하게 칭얼대는가에 대해 고백합니다.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마음(허영심!), 문화적 오류를 생산해냈다는 자책감, 조각의 인위적 완고성과 경직성의 자각에서 오는 혐오감과 수치감, 조각을 만든 일과 그렇게 만들어낸 작품을 때문에 느낀 경멸감, 이런 것들이 그 내용입니다. 이들 모두는 인간들이 학습된 욕망이자 감정이고, 그걸 사회적 욕망과 감정은 그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방금 말한 ‘인간적’이란 말 속에는 성과 속, 이승과 저승, 이쪽과 저쪽, 무력과 유력, 개인과 사회, 내면과 외면, 흙과 조각 사이를 오가는 한 인간의 실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적나라하게 직시하는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위 시가 우리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적’인 우리들의 내면적 드라마를 숨김없이, 남김없이, 깊이 있게 그려 보였기 때문입니다.
선禪은 무아정적無我靜寂에로의 몰입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흙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는 동안 우리 자신을 그렇게 ‘크게’ 부정할 수 없어서, 다만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그런 세계를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꿈꾸면서, 조각도 만들고, 시도 쓰고, 텔레비전도 보며 적당히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를 먹고, 누구나 늙고 쇠약하여 와불처럼 눕는 시간이 길어지고, 우리는 마침내 모든 갈등과 격정을 뒤로한 채 죽음이라는 대단원을 통해 흙이라는 무아정적의 세계로 몰입하듯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시간까지 가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만이 문제일 뿐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