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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신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이천우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시다
요한복음 21:15-19 /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사도 요한은 그가 기록한 요한복음 1:11에서 “그분(그리스도)은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에서 유대인은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룬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삼일 만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는 부활에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부활하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자신과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 후 승천하여 온 세상에 주가 되셨습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에 있은 일을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여러 번 나타내셨는데, 모두 열 한 차례입니다. 본문은 그 중에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앞서의1-14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는데 그때 그곳에는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인 시몬 베드로, 쌍둥이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제자 두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 중 시몬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갈 것을 제안하자 모두 좋게 생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새벽녘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바닷가에 서 있는 분이 고기를 좀 잡았는지를 소리쳐 물으며 말을 걸어왔습니다.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 그러면 많이 잡힐 것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 말대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을 끌어올리기가 힘들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는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물속에 뛰어들어 약 90미터 정도 떨어진 바닷가 언덕까지 헤엄쳐 갔습니다. 배에 남아 있던 제자들도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바닷가 언덕에 닿았습니다. 그들이 언덕에 닿아 보니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뵙게 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방금 잡은 생선을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말씀을 들은 시몬 베드로가 얼른 배에 가서 그물을 언덕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물 안에는 큰 생선이 153마리나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물은 찢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리 와서 아침 식사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시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미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식사를 마쳤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또 똑 같은 질문을 두 번째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이번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내 양을 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세 번째로 똑 같은 질문을 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이처럼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므로 베드로는 근심이 되어 조심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도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예, 제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러한 저의 마음을 잘 아시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제게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물으심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두 번째 물으심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세 번째 물으심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첫 번째 대답 :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두 번째 대답 :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세 번째 대답 :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각 대답에 그가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해 주심 :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하신 질문은 베드로를 정말로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세 번이나 하시고, 베드로는 같은 대답을 세 번이나 하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근심이 생긴 것은 그가 예수님 앞에 행한 죄가 떠올리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할 때 자신이 체포될 것과 죽음을 예고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였으며, 예고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 체포될 때는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를 쳐서 오른편 귀를 베기까지 한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이 결박되어 끌려갈 때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를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말할 때 “나는 아니다”라며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부인하였는데, 그 부인을 세 번이나 하였으며, 세 번째 부인할 때는 첫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 앞에서 심문이 끝났을 때는 다음 날 이른 아침, 곧 새벽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때의 아픔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물음을 세 번이나 거듭 반복하심으로 그는 자신이 주님께 행한 일을 떠 올리며 주님이 어떤 의도에서 이처럼 세 번이나 거듭하여 동일한 물음을 하시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함으로 마음에 근심이 되어 조심스럽게 대답하게 되기에, 또는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에 혹 의문을 품는 것은 아닌지 염려함으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베드로가 저지른 죄를 떠올려 근심에 있게 하기 위해서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인지요. 예수님께서는 과연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함에 그 진실의 의혹을 품고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인지요. 대체 어떤 의도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세 번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인지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에 주께 저지른 수치를 들추어내고자 하거나 또는 주를 향한 베드로의 처신에 미래가 불확실하여서 확실한 고백을 얻어내고자 해서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장담하여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막 14;29), “주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요 13:37)라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지만, 그러한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 요 13:38) 라고 말씀하여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이미 알려주셨었습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이른 아침을 여는 신호를 하는 닭의 울음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째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런 그의 귀를 울리는 첫 닭의 울음소리는 그의 심장을 꿰뚫는 화살이 되었습니다. 해서, 베드로는 새벽닭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님을 부인한 자신의 죄를 떠올리면서 가슴을 쥐어짜며 아파했다고 합니다. 그런 베드로의 심정을 예수님이 알지 못하여 그의 죄를 들추어내는 물음을 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진정성을 의혹을 갖고 확고한 대답을 얻어내고자 하는 물음을 하신 것이겠는지요.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베드로가 품은 사랑에 의혹을 갖거나 의심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 그럼에도 그가 주님이신 예수님께 품고 있는 마음인 사랑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임에도 예수님은 그의 주님이신 사랑을 해 주시는 것에서 되어지고 있는 것이니, 그 사랑에 감복함에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대하는 사랑은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에는 그 이전에 보인 사랑에서 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에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다름 아닌 예수님이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베드로가 대답하게 하는 것을 통해 끄집어내주시면서 또한 그가 할 일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이는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번역하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베드로가 (그의 소유한 가족, 그물, 배 등 그 모든 것들보다도)그의 동료인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묻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베드로가 사랑하는 대상인 예수님과 그리고 다른 (소유한 것들)제자들 중에서 누구를 더 비중 있게 사랑하는지를 묻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자녀들에게 “엄마와 아빠 중에서 누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 아니면 아빠가 더 좋아?” 라고 엄마와 아빠 둘 중에서 어느 하나, 곧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2) 그리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이 사람들이/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한 반에서 12명의 학생이 있어 모두가 담임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데, 그 중에서 한 학생이 담임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음이 다른 열 한 명의 학생 모두가 담임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큰 것입니다. 이 두 견해 중에서 어느 쪽의 견해로 이해하든 예수님이 묻는 것에서 있게 되는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베드로의 대답을 통해 예수님은 그에게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만, 보다 적합한 견해는 후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다른 제자들과 비교적으로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를 베드로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매우 큼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 번의 공통된 물음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에 그가 있음을 의도하셨습니다. 비슬리-머리(Beasley-Murray)는 예수가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더 확고하게 자신에게 충성과 순종을 약속했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 묻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의도는 주님께 가진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을 다시 이끌어내어 분출케 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다음으로,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그리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그 사랑을 무엇으로 해 나가는 것인지, 그 사랑을 어떻게 가져나가는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을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거듭 말씀하심으로, 그가 앞으로 주님의 (어린)양을 먹이는 일인 목양에 있을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과 ‘내 양을 치라’는 표현은 동일한 의미에서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목자가 양을 풀어놓아 먹이인 풀을 먹게 하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에서이며, ‘내 양을 치라’는 것은 목자가 양을 치는(돌보는/관리하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에서인 「목양」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해주심으로써 그를 제자로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인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 4:19) 라고 하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 두고 목양하듯 사역하게 하실 것이었음을 나타내 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인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믿는 자들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이전의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참으로 커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고, “주를 위하여 기꺼이 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하는 열정을 보이면서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는 칼을 뽑아 대응하여 예수님을 지키고자 하는 용맹함과 충성을 보이면서도 “너도 예수의 제자이다”라고 하는 말 한 마디에 “나는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며,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에게서 다 흩어지는 상황까지 갔습니다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대하고, 그러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서는 그들은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제자 됨에 있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권능 있게 사역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사도)들이 말함에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으로 증거되는 복음의 능력이 행사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굴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행해집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했던바 그대로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고, “주를 위하여 기꺼이 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던 의지와 열정이 생명 있게 행하여지고 성취되니, (1) 베드로는 본토,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및 비두니아 등지를 다니면서 매우 왕성하게 복음을 전했으며(벧전 1:1), (2) 사도행전 12:3-5에서는 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인데 이어 베드로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는 헤롯왕(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를 받았으며(A.D. 43, 또는 A.D. 44), (3) 전해지는 바로는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던 때에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A.D. 64). 그때의 상황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임을 당하기 직전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 길을 가는 중에 아피아 가도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보는 환상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유명한 말인 ‘쿼바디스’, 곧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양 떼를 버리고 도망친 로마로 간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예수님에게서 멀찍이 있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그 시로 다시 로마로 돌아가 박해의 칼날을 피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목양 속에 지금의 바티칸에서 자신의 요청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못 박혀 죽임을 당함으로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일이 예언되고 있는 말씀이 18-19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노년이란 평온과 안식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나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 공무에서 은퇴하며 군인들의 경우는 병역을 면제 받는다. 그러므로 베드로 역시 평화로운 말년을 내다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의 순서가 뒤바뀌는 가운데 젊어서 자기 뜻대로 살았던 그가 늙어서 타인의 지배를 받고 심지어 포악한 압제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신다. 더욱이 베드로는 우리의 공통적인 처지에 대한 거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기 전에도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누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편에 함께 하고 그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고 나면 그 순간부터 혹은 적어도 언젠가는 그들은 어려운 투쟁, 고통스러운 생활, 크나 큰 위험,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까지 말려들게 된다. 비록 이 상태가 어렵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가볍게 하셔셔 그들의 힘이 성숙할 때까지는 잠시 동안 쉴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기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아직 미숙하고 연약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당분간 여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만 하면 마지막까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그에게 헌신하는 자세를 가다듬도록 하자(그리고 힘을 주시기만 하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주님께 헌신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전적으로 주님의 뒤를 따름에 있게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배은망덕이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드럽게 대하실수록 우리는 계속 흐느적거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랫동안 한가롭게 지내다가 더욱 더 가혹한 대우를 받을 경우 불평을 터뜨리지 않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분간 아껴주실 경우 그것을 인자하심으로 돌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세상에 살아 계실 동안에는, 마치 결혼 잔치를 베풀고 계신 것처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셨지만, 후에는 그들에게 배고픔과 눈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마 9:15).
베드로가 젊어서의 혈기에 있어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굳은 마음으로 원하는 곳에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겠지만,1) 그의 노년은 그의 두 팔을 벌리게 하고 그의 허리띠를 잡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그리고서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임을 당한 자신을 따름에 있게 하셨습니다.
만약 누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믿을 수 있는 예언을 듣는다면 몹시 불안해할 것이며, 앞으로 그의 삶은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에게 큰 안심과 용기가 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라고 한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으나 실패한 것이 성취 됩니다. 자기가 십자가에서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이라는 예언 말씀이 그를 모든 근심과 수치심으로부터 해방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죽기까지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로, 이 말씀이 자기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갈 수 게 해주시는 확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라고 하신 요한계시록 2:10의 말씀을 성취하게 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기에 베드로에게서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는 말씀은 앞으로의 베드로의 일생을 결정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후에 “나를 따르라”고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3, 혹은 마태복음 8:22 말씀과 비교할 때 완전히 다르게 들렸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제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 메시아의 승리의 길로 따라간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메시아를 따름으로써 얻을 영광의 기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의 질문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5-37)2) 이는 다음과 같이 구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희 형제를 제자 삼으셔서 메시야의 사역에 참여시켜주시고자 부르시는 것입니까? 네, 저희 형제는 주님을 따르며 곁에 있겠습니다. 하오니, 메시아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새로운 시대의 세상이 열리는 날에는 공신록에 저희 형제의 이름이 제일 위에 있게 기록해 주셔서 주님이 앉으신 영광스런 보좌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한 헛된 구함의 망상에 있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 제자들 중에서 언제나 가장 앞서 행동하는 모습을 취함에 있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죽음이 어떠할 것인지를 알려주시고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심에 있는 지금은 장차 그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그 또한 짊어지게 될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따라서 베드로는 13:36-38에서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에서 보게 되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한 없이 약함에 있었으나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으며)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자기가 원했던 것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심을 받고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는 중차대한 책임을 떠맡은 이야기를 보게 되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베드로가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얼마나 진지하게 영접했는지를 베드로전서 5:2-4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이렇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시는 말씀을 우리가 대하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영광된 부르심의 음성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예수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목양의 사명을 수행하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방법을 따름으로써 주님이 그를 위하여 정하신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원리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어 말해준 것에서 알 수 있으니 다름 아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입니다.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롬 14:7)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죽고 사는 문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것에서입니다. 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또한 어떻게 죽음을 당할지를 정하셨으니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따라야 한다며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고 말한 것인데,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게 되는 제자 베드로에게서는 목양이니, 곧 교회를 이룸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것에 그의 생명이 있게 하셨고 또한 그것에 그의 죽음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 죽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나 영원히 사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이 따르는 주님과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살고 죽음에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실패를 넘어서서 끝까지 나를 사랑하고 붙드시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과 늘 깊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죄인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내 안에 심어져서 그것이 역사하여 나를 변화시켜야 하고, 이를 통해 이 사랑이 다시 예수님과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죄를 지어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심으신 그 사랑이 발아해서 성장하면 베드로가 로마의 바티칸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임을 당했듯, 그리고 바울 또한 로마의 외곽에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듯,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죽음까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므로 이것이 하나님을 영광되게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9)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
*2023년 7월 9-16일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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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를 일반적으로는 베드로가 젊어서는 자신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세상적으로 행동하며 살았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그 해석에 있는다. 그런 그가 늙어서는 성령에 사로잡혀서 순교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다음 구절인 19절과 맞지 않는다.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지는 젊어서와 늙어서 모두에 걸리는(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세상적으로 살았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여러 곳에서 보게 되는 것인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따름에서 여행을 자유롭게 하는 것에 있듯이 마음에 내키는 대로 분별없이 행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헨드릭슨). 그러한 베드로이지만 성령 강림 이후의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가 원하는 곳에 가도록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그 성령께서는 그의 마지막을 복음 전파로 인해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함으로 이끌어 가신다.
2) 마태복음 20:20-21에서는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기록하고 잇어서 세배대의 두 아들의 모친이 직접 예수께 간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이러한 차이는 과점의 차이일 뿐 기록상의 모순이 아니다. 마태복음은 세배대의 두 아들의 모친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두 아들이 마음에 품은 욕망을 대신하여 전한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며, 마가복음은 세베대의 두 아들의 모친이 예수께 구한 말은 다름 아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직접적으로 구하고자 한 욕망에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와 구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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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신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이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