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19-23)
“Receive the Holy Spirit. Whose sins you forgive are forgiven them, and whose sins you retain are retained.”
말씀의 초대
예수님의 승천 뒤 마티아가 사도로 뽑혀 사도들은 비로소 열두 명이 되었다. 오순절에 그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불꽃 모양의 혀들이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아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된다(제1독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고,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받고 활동하면서 일치를 이룬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문을 모두 잠가 놓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신 뒤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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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며 성령을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을 우리는 다양한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각 사람에게 주어진 육체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각 공동체에게는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시고, 냉담 교우들에게는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키시며,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 정교회의 이냐시오 총대주교가 성령에 대하여 역설한 다음의 내용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역사적 인물에만 머무르신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복음서는 죽은 문서에 지나지 않으며, 교회란 한낱 조직일 따름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권위란 다만 지배하는 것일 뿐이고, 선교란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전례란 과거의 회상일 따름이며,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사도들은 그러한 성령을 받아 교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바람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야겠습니다.
성령은 누구이신가 -신대원신부-
성령 강림 대축일이자 교회 공동체가 탄생한 날이다. 이 뜻깊은 날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고 하시며 세상 가운데로 파견하신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께서 당신의 일꾼으로 보내신 '파견 받은 공동체'다. 주님께서는 파견하신 공동체를 결코 외롭게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루카 24,49).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은 곧 보호자(요한 16,7)이시며 진리의 영(요한 16,13), 성령(요한 16,15)이시자, 부활이시고 평화이신 분의 영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을 오늘 보내주신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 그러자 그분을 믿는 이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 위업을 각 민족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11 참조).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도,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분도 주님이시기에 그분이 말씀하신 보호자이신 진리의 영, 곧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시며,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는 바로 그분의 영이시다. 때문에 우리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신다"고 고백한다.
성령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이라는 표현 대신에 "주님의 영,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이사 11,2)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하느님의 영(창세1,1), 하느님의 입김(숨)(창세 2,4), 비둘기(창세 8,8) 등으로 표현되고 있고, 이 밖에도 구름과 빛, 손가락, 바람, 불, 기름 부음, 물, 인호, 손 등으로 나타나면서 창조주 하느님과 조금도 떨어져 있지 않고 언제나 하느님과 한가지로 활동하고 계신다.
또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작용하셨고(마태 1,20), 그분이 세례를 받으실 때(마태 3,16)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실 때마다 하느님의 약속을 보증하는 분, 협조자 등으로 소개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생명과 진리와 은총이신 분, 협조자이시고 보호자이신 분, 일치이시고 희망이시며 거룩하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분이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1티모 1,7-8) 한다고 말한다. 또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열심히 구하고(1코린 14,1),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고(에페 5,18), 성령의 불을 끄지 말며,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할 것(1테살 5,19-22)을 권고한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 성령 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곧 땅끝까지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고(사도 1,8), 하느님 말씀을 담대히 전할 뿐 아니라 한마음 한뜻이 돼 주님 안에 일치된 공동체로 살아가게 될 줄을 알 것(사도 4,31-32)이다. 또 각자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서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게(1테살 4,10) 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4,1-13 참조)라고 적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부활이시며, 진리이시고, 평화이신 분이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 하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더불어 아드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한분이시며, 참된 하느님 안에 머무를 줄 안다. 하느님께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국 그분을 닮아 아무도 내치거나 외면해버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온몸으로 그분을 증거하고 증언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신 분께서는 성령을 통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그분 안에 언제까지나 남아 머물러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성령의 힘으로(로마 8,15)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고백해야 한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실 것(로마 8,16)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불똥이라도 떨어졌으면
-김영국신부-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이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통과 불신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초대형 개발사업들이 정책입안자나 이해당사자들 간의 충분한 대화와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면서, 재산상의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 충돌로 사상자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한반도 평화 역시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입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같은 언어를 국어로 사용하면서도 대화는커녕 전쟁의 위험이 더욱 커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소통과 화합의 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의 날 하늘에서 거센 바람 소리가 나더니,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제자들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위업에 대해 전하는 말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자기 모국어로 알아듣습니다. 성령의 작은 불꽃들이 이루어내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바벨탑의 사건(창세 11,1-9)과 정반대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마음대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던 인간들은 결국 서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고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의 불꽃은 서로 다른 말을 하던 사람들이 사도들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위업을 자기 말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라고 말하듯이 이제 성령 안에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또한 평화의 대축일입니다. 요한복음은 성령 강림의 사건을 예수 부활과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고 합니다. 폐쇄적이고 과거 지향적이며 미래를 두려워하며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죽은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 안으로 들어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두 번이나 인사하신 다음,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흙으로사람을 빚어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던 것처럼(창세 2,7 참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시어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문을 열고 나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업과 평화를 전하는 일꾼으로 거듭납니다. 불통과 불신, 그리고 전쟁의 위협으로 답답하고 불안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소통과 화합, 그리고 평화의 성령께서 내려오심이 그 어느 때보다 기다려집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불통과 불신, 그리고 반평화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령께서 강림하시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성령의 불똥이라도 절실한 오늘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병규 신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로 제 안의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의 ‘주간 첫날 저녁’은 오후 6시경으로(유다인들에게 새로운 날은 전날 저녁부터다.)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다. 부활하신 분과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새로운 시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다. 제자들은 새로운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예수님의 지난 시간, 곧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제자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문을 꼭 잠그고 있다. 새로운 부활의 시간은 세상의 권력가들이 보여준 죽음의 폭력 앞에서 닫혀 있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준다.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두려움에 떨지 말라는 인사말이다.(요한 14,27 참조) 예수님은 세상의 폭력을 꿋꿋이 이겨내고 견디어내면 마침내 평화를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16,33 참조)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폭력에 맞서기 위한 용기와 다르지 않다. 두려움을 가지기보다 단단히 마음먹고 죽음의 흔적과 공포를 담대히 직시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하신 것처럼 …. 예수께서는 당신이 겪은 죽음의 흔적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신다. 제자들에게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두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은 이제 기쁨의 상징이 된다.(20,20) 세상의 권력가들에게는 형편없는 실패의 상징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의 역설이다.(1코린 1,23 참조) 이제 세상은 제자들에게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하느님의 힘이 제자들을 온통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제 ‘주님’이 되었다.(요한 20,20 ‘예수’라는 호칭에서 ‘주님’으로 바뀐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구약의 야훼를 지칭했던 용어다.(탈출 3,14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면서 제자들은 하느님 안에 새롭게 태어난다. 예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주시는 성령은 새로운 탄생과 같다. 그 옛날 사람을 만들어 숨을 불어넣어 주셨던 하느님의 모습이다. 새롭게 태어날 사람, 하느님을 꼭 빼닮아서 하느님의 숨결로 세상을 살아갈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제자들이 된 것이다. 제자들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이 세상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용서를 하면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고, 사랑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에서의 일이 하느님의 일이 되고, 하느님이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게 해도, 제자들의 사명은 이제 거침없이 행해질 것이다.
묵상(Meditatio) 산다는 것은 세상과의 계속되는 싸움일 수 있다. 싸움하는 사람의 마음이 곱지 않고 힘겨운 것은 어떻게 보면 세상의 논리를 어쩌지 못해, 세상에 굴복당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사건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수천, 수만의 해석을 내놓기 마련이다. 기쁜 일도 누군가에게는 슬픔일 수 있다. 한편 슬픔도 기쁘게 받아들이면 참된 복음이 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어떠해야겠는가. 세상의 논리에 굴복당해, 늘 아프다, 힘들다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힘을 내서 용기를 가지고 기쁘게 살아갈 것인가. 새로운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숙제가 우리에게 늘 남겨져 있다.
기도(Oratio)저는 주 하느님의 위업을 칭송하며 들어가 오로지 당신의 의로움만을 기리렵니다.(시편 71,16)
-조명연신부-
저는 아침마다 성소후원회 특별회원 이상 되시는 분들에게 그리고 성소후원회 임원들에게 그날의 복음말씀과 저의 간단한 묵상내용을 문자메시지에 담아 보내고 있습니다. 인천교구 성소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 너무나 감사해서 매일 아침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서 발송합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 꽤 괜찮습니다. 그날의 복음말씀을 보게 되어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러나 어제 약간 당황스러운 문자 메시지를 받았지요.
“누구냐. 개XX야”
저에게 아침마다 복음말씀 문자 메시지를 받는 분이더군요. 그러나 휴대전화 번호가 바뀌어서 교우 아닌 분이 문자 메시지를 받아 기분이 안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욕을 들어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요. 그래서 이렇게 문자를 보냈지요.
“***님 핸드폰이 아닌가봐요. 내일부터 발송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문자에 “누구냐”라고 답을 한 뒤에, ***님 핸드폰이 맞다는 것입니다. 곧 성소후원회 회원이고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지요.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욕을 써서 보낸 적도 나쁜 말을 쓴 적도 없습니다. 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복음말씀이 담긴 문자에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이면서 그렇게 문자를 보낸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지요.
문득 좋은 말도 자기 스스로 받아들이기 싫다고 생각하면 나쁜 말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나쁜 말이 있습니까? 나에게 해가 되는 말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앞선 그 사람만을 욕할 것이 아니구나 싶습니다. 우리 각자도 똑같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협조자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강림하신 성령을 우리는 받았을까요? 받지 않았을까요? 세례를 통해서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마음에서 성령의 움직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 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구원의 길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지요. 그러나 내 마음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성령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 진정한 평화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삶의 크기는 외적인 위치가 아니라 내적인 경험에 좌우된다(토마스 하디).
실격처리가 되는 길을 가지 맙시다.
어제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마라톤 대회가 있었는데, 글쎄 완주 한 사람이 딱 한 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사람이 한 명 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5,000명이 넘는 사람이 이 대회에 출전해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런데도 딱 한 명만 완주해서 일등을 한 것이지요.
그 사연은 조금 어이가 없습니다. 글쎄 5,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2, 3위를 달리는 선수를 쫓아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2, 3위가 경로에 잘못 들어서서 엉뚱한 곳으로 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두 실격처리가 된 것입니다.
누구를 쫓는가가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잘못 쫓아서 실격처리가 된 것처럼, 우리 역시 구원을 위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일등은 되지 못하더라도, 실격처리 되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내 길은 제대로 된 길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대로 된 길인지를 따져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
-김대열신부-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20,22~23) ---- 성령을 받으라 하시며, 곧바로 용서라는 단어를 꺼내신다. 용서라는 것이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하느님께서도 알고 계시다는 말씀인 듯 하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성령을 주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용서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만큼 용서라는 말은 구원과 직결된 우리가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삶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용서의 삶이 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복음적 삶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꼴 보기 싫은 놈 안보면 그만이지.” 대부분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이는 용서와는 전혀 상관없는 비겁하고 소극적인 태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쉽게 용서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집스러울 정도로 용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용서를 못하는 마음은 백 퍼센트 상처가 만든 마음이다.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상처를 잘 극복하는 이가 있고, 그렇지 못한 이가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란 삶에서 어쩔 수 없이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극복을 했다고 해도 그 상처의 자국은 기억으로 남는다.
상처를 긍정적으로 소화하고 극복하려는 이들이 용서에 관대하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신경질적이며 자주 화를 내는 편인가? 어떤 일이든 부정적으로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는가? 사람의 좋은 점보다는 안 좋은 점이 눈에 잘 들어오는가? 쉽게 사람이 미워지는가? 아니면, 여유가 있고 너그러운 편인가?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인가? 사람의 실수보다는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려고 하는가?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부정적인 답이 더 많았다면,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상처가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그리고 이는 상처의 크기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극복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정말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가 되지 않는다면, 먼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극복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과의 교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이 모든 인간적 약함을 극복하고 세상에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은 날이다. 비로서 교회 공동체가 탄생한 날이다.
우리의 약함이 그분의 도우심으로 복음적 강함으로 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청해야 한다.
(성령을 통하여)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전삼용신부-
신학생 때 이탈리아로 유학 가서 맞는 첫 방학은 2달 동안의 봉사활동으로 보냈습니다. 이태리 북부에 있는 꼬똘렝고라고 하는 지체부자유자 장애인 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달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발목 관절에 통풍이 올 정도였습니다. 이태리 말도 잘 안 되는 데다 특히 환자를 돌보는 일이 고됐습니다. 제가 도왔던 파트는 성인 남자 병동이었는데 심지어 그들을 휠체어에 태워 대소변을 보게 하고 밑도 제가 다 닦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뒤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대장 안에 난 종기에 약을 발라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꼬똘렝고 수사님이 말을 잘 안 듣는 이들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가끔 때리는 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도 말을 안 듣는 등치 큰 아저씨의 다리를 발로 걷어찬 적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시늉만 해도 말을 잘 들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저는 사랑을 하면 행복하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엄청난 사랑을 남에게 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 큰 어른의 엉덩이까지 닦아주다니요!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다시 로마로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이태석 신부님은 하루에 300명의 환자를 진찰하고 잠 잘 시간도 없었지만 아무리 밤늦게 찾아오는 환자라도 거절하거나 인상을 찌푸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며칠 동안 걸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을 보면 힘들어한다는 모습보다는 행복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평안하게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비슷한 봉사를 하는데, 도대체 차이가 뭘까?’
남편 분들을 열심히 수고해서 돈을 벌어다 준 보람을 느낍니까? 아내들은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키워준 보람을 느낍니까? 그 큰 고생을 했는데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수고는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요즘에서야 그 이유를 깨닫는 것 같습니다.
‘달마야 놀자’란 영화에 보면 스님이 박신양과 그 일당들을 보고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들은 도망 다니는 처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밑을 막아보기도 하고 배 위에 올려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헛수고입니다. 결국 박신양은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 항아리를 들어 연못에 던집니다. 그랬더니 연못 속에 빠진 독에 물이 가득 찹니다.
제가 꼬똘렝고에서 그렇게 고생하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제 독이 깨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은 선물자체이시고 사랑자체이십니다. 사랑하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에서는 성령님을 선물자체나 사랑자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누구실까요? 하느님이시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아드님 안에 사신 것과 같습니다. 사랑해서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데, 그 자신의 존재를 사랑의 형태로 전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 표현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내가 사랑한다고 우겨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척 한 것 뿐인 것입니다.
만약 ‘내가 저들에게 무언가를 해 주었다’라고 생각할 때는 ‘내가 사랑이 되어 저들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무언가를 해준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 존재가 사랑의 형태로 변해서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표현을 통해 - 물론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축성되는 성체성사가 그 완성이지만 - 우리 안에 선물로 오시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당신은 가만히 계시면서 무언가를 집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내가’ 무언가를 집어서 누구엔가 준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전혀 사랑으로 다가간 것도 아니고 결국 그들에게 해 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대학교 다닐 때 점심도 아끼기 위해 굶은 적이 많습니다. 그 때 아는 형의 생일임을 알고 주머니를 털어 2천 원짜리 주걱처럼 생긴 책갈피를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은 나중에 그것을 가지고 아이스크림을 퍼 먹으며 별 쓸모없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저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선물에 저의 ‘존재’가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더라도 그냥 줄 수 있고 그 물건 안에 나의 존재를 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길 지나가다가 행려자가 있어 만 원을 던져주고 오는 적도 많은데 저는 그 만원을 어디에 쓰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 돈엔 저의 존재가 많이 들어가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가 돈 만원을 준 것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아원에 라면 몇 박스를 가져다주고 사진을 찍어 가면 더 이상 그 라면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얹지 않은 줌은 그냥 주는 것이지 ‘내어줌’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자녀에게 만 원을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그것을 버리든지 피시방 가서 다 써버리든지 신경이 안 쓰이겠습니까? 같은 만 원이라도 그 안에 사랑이 들어가 있을 수 있고, 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라면 끓여먹으라고 라면을 사 주었는데 가져다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신경이 안 쓰이겠습니까? 그만큼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버려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톤즈 아이들을 모아서 만든 브라스 밴드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 왔었고 저는 잠깐 아침방송에 출연한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을 많이 겪었던 그 아이들에게는 눈물이 가장 부끄러운 것이지만, 신부님이 돌아가신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분 이름만 듣고도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지금 그들 마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준 것은 당신 자신이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처럼, 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당신 존재를 품고 내려오신 날이 오늘인 것입니다.
임금님을 사랑하는 한 시골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과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 해는 워낙 농사가 잘 되어 먹음직스런 사과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가장 빛깔 좋은 것 몇 개를 골라서 임금님께 드리려고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문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의복도 입지 않고 고작 사과 몇 개 드리려고 임금님을 만나려고 하느냐며 그를 야단쳤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나왔지만 궁궐을 출입하는 귀족들의 옷에는 비길 바가 못 되었습니다.
그가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마침 왕비가 밖에서 궁궐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왕비는 임금에게 굉장한 사랑을 받고 있었고, 동시에 백성도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왕비는 마차에서 내려 슬픈 표정의 농부에게 이야기를 듣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서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궁궐로 들어간 왕비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금 쟁반에 사과를 담아 임금 앞에서 직접 깎아 주었습니다. 임금은 사랑스런 왕비가 깎아주는 사과를 맛보고 너무 맛있다며 고마워하였습니다.
왕비는 그 때서야 그 사과는 밖에서 기다리는 한 농부가 임금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당장 그 농부를 불러들이라고 하고 그에게 좋은 의복과 상을 주며 언제라도 수확한 것을 자신에게 직접 가져와도 된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이 왕비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참다운 사랑의 행위가 되려면 성령님이 필연적으로 중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어떤 행위도 참다운 사랑의 행위가 되지 않고 헛수고가 되고 그 보람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자신의 갈빗대를 봉헌하여 하느님이 그것으로 하와를 창조해 주실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절대 만족스럽거나 양심을 충족시켜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면 그 분이 나를 사랑으로 만들어 누군가에게 보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느님에게 봉헌하면 하느님이 나를 성령에 태워 그 누군가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제를 통하여 성체의 모양으로 오시는 이유는 당신 온 존재를 주셔야 하는데 스스로는 당신 생명을 가져오실 수 없으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을 옮겨주는 중재자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이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봉헌을 성령으로 만드시어 우리를 재창조하십니다. 이것이 성령강림의 의미입니다. 밀이 아무리 빻아져도 ‘물과 불’이 없으면 밀떡으로 구워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을 하고 싶어도 그 표현방식을 통해 나의 존재를 실어서 내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닌 성령을 통해 나를 보내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어떠한 것도 성령으로 버무려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만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 이것만이 하느님의 법에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통하여 선물이 됩시다. 사랑이 됩시다.
성령은 빗소리와 함께
-김찬선신부-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신 새벽 일어나자마자 성당에 가서 묵상을 하였습니다.
조금 열린 창으로 10차선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내리는 비를 가르고 길바닥의 빗물을 튀기며 달리기 때문에
평소보다도 그 소리가 더 요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더 집중하기 위해 창문을 닫았습니다.
그랬더니 비가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창문을 열고 비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비는 땅바닥을 때리는 게 아니라 제 마음을 때리는 거였습니다.
창문을 <닫았다-열었다>를 하면서 성령강림의 의미를 생각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성령은 빗소리를 타고 내려오셨습니다.
빗소리가 저의 감각을 열고 감성까지 열더니
마음마저 열고 제 가슴 깊숙이까지 들어와
저의 마음을 사정없이 두들겼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창문을 닫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령께서는 빗소리를 타고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에처럼 관념적 묵상 안으로만 오셨을 것입니다.
차 소리가 시끄러워 창문을 닫았을 때
저는 늘 하던 호흡 기도를 의식적으로 하였습니다.
숨을 들이킬 때 <오소서. 성령님>하며 성령을 들이키고,
내쉴 때 <제 마음에 머무소서.>하고 성령을 모시는 기도입니다.
처음 창문을 닫았을 때는
감각, 곧 빗소리가 성령 묵상을 방해하는 거였기 때문인데
다시 창문을 열었을 때는
감각이 묵상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까지 열게 하였습니다.
평소 성령께서 오시어 내 마음에 머무시라고 기도하던 바가
창문을 열므로써 저절로 이뤄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감각을 잠급니다.
듣기 싫은 것을 듣지 않으려고
맡기 싫은 것을 맡지 않으려고.
우리는 종종 마음을 닫습니다.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
신경을 쓰는 것이 귀찮아서.
그리고 성령을 오로지 묵상 안으로 가둡니다.
그러면 평온한 성령께서는 오시는데
역동하시는 성령은 아니 오십니다.
침범자가 없는 평온은 있지만
용서하는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동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나를 아프게 하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 성령과 함께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내 안에 사랑의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시며
용서하게 하시고 그와도 평화롭게 하십니다.
저희 본당은 며칠 전 또 다시 업그레이드가 하나 되었답니다. 5미터 크기의 스텐으로 만들어진 게시판이 새롭게 설치되었거든요. 본당 교육관 리모델링으로 비용이 부족해서 그동안 미루었던 게시판이었는데, 이제야 간신히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설치를 하다보니 무척 기뻤습니다. 그런데 사무실 여직원으로부터 이 게시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게시판을 설치한 날, 성당 옆에 개신교가 하나 있는데 그곳의 관리장님께서 오셔서 항의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게시판이 너무 커서 크레인과 땅을 파는 장비가 들어왔는데, 이 장비들이 왔다 갔다 하다가 교회의 주차장 담을 부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한테 말도 하지 않고 도망갔다는 것이지요.
사무실 여직원은 사과의 말씀을 전했고, 배상하겠으니 화 그만 푸시라고 말씀을 드렸답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설치했던 CCTV가 생각났고 어떤 실수로 부수었는지를 확인해보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게시판 공사 때문에 왔던 차량이 부순 것이 아니라, 교회 신자 중 한 분이 운전 실수로 담벼락을 차로 받은 것입니다.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하자고 설치한 CCTV인데 곧바로 큰 효과를 보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 관리장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이 어쩌면 나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즉, 우리 역시도 끊임없이 지레짐작을 하고, 끊임없이 판단하고, 그 기준들에 맞춰서 남을 단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전하는데에만 급급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의 뜻만을 강조하고 그 뜻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려고만 하는 사람은 사랑의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고, 다른 사람과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로 인해서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성령입니다.
실제로 사도들도 성령을 받아서 변화되지요. 무서워 벌벌 떨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자신감을 갖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성령을 받았고, 받은 성령의 힘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지금을 살고 있는 나는 어떨지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세례 때 성령을 받았지요. 그리고 견진을 통해 성령의 은사들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왜일까요? 바로 성령의 힘에 나를 맡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뜻을 내세우는데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고, 세상에 자신 있게 주님을 증거하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실하게 진실을 찾아가는 것 외에 나에게 휴식이란 없다.(파스칼)
복음 선포
-김우성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 복음에서 말하는 내용을 더불어 살펴보면 성령을 받음과 죄의 용서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관 복음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마치 유언처럼 복음을 전하라는 간곡한 권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 게다가 루카 복음은 복음 선포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 선포라 표현합니다. 사도행전도 사도들이 성령을 받자 복음을 열성적으로 선포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말씀을 연결해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성령을 받은 후 죄의 용서를 전파하도록 초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 1,15)라고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김찬선신부-
올해는 성령의 어떤 은혜를 청할까? 누가 나를 칭찬해주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은혜. 누가 나에게 전화를 주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은혜. 누가 나에게 어찌해도 상관치 않을 수 있는 은혜. 누가 무엇을 하건 시비 걸지 않을 수 있는 은혜. 누구의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은혜. 이럴 수 있게 된다면 은혜이기는 한 것인가?
누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것, 그것 은혜라 할 수 있고 누구에 의존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 은혜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을 은혜라 할 수 없겠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나라는 섬에 갇히어 살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도 않게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자주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무관심, 무관계는 성령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하기에 다른 사람의 칭찬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에 다른 사람 전화 없어도 허전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에 누가 어찌해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에 내 욕심에 부족한 선이라고 불만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에 다른 사람의 사랑과 미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 충만으로 더 나아가 칭찬을 받기보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관심을 받기보다 외로운 사람을 벗해주고 자신이 흔들리지 않음은 물론 흔들리는 사람을 지탱해주고 다른 이의 부족한 선을 탓하기보다 나의 선으로 채우고 눈치를 보지 않고 그의 필요를 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안의 성령이 다른 이 안의 주님을 알아보고 내 안의 성령이 여러 다른 이의 소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과살고 하나되는 우리
-배광하신부-
마음의 빛이신 성령님
◎성령의 바람
오늘은 섬진강을 따라 지리산 피아골 계곡의 아름다운 피정의 집에서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지리산 계곡은 여름 마냥 녹음이 짙어졌습니다.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가슴 속 깊이 시원함을 자극하며 닫힌 숨통마저 열리게 해 줍니다. 혼자서 만끽하기에는 죄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신 후 그 코에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시자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그 숨결은 숨이 막혀 답답해하는 인간의 모든 숨통을 트이게 하셨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지리산 계곡의 바람을 맞으며 이 땅의 모든 막혀있는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대화의 단절, 불신,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데서 오는 크고 작은 답답함, 숨막힘, 숨을 쉴 수 없는 도시의 공해, 뚫리지 않는 교통의 흐름 속에 갇혀버린 영혼들, 파괴되는 자연과 그 속에서 울부짖는 많은 생명들, 세상은 진정 성령의 시원한 바람을 절규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또다시 저는 성령송가의 기도를 간절히 바칩니다. “진정 나무 그늘 하나 없는 메마른 대지에서 땀 흘리는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바람을, 휴식을 주시도록, 언제나 막혀만 있었던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당신의 숨, 숨결로 뚫어 주시도록, 그리하여 당신의 바람이 부는 세상 그 어디에서나 당신을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흐뭇한 안식으로 맞이하여 비로소 가슴 깊이 빛이 스며드는 시원함을 맛보게 하소서.” 그리고 그 바람이 영원히 그치지 않도록 기도해 봅니다. 숨, 숨결, 바람이신 성령께서는 결코 내 자신에게만 당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계곡의 바람도 불고 싶은 대로 이리저리 불어 모든 사람을 시원하게 하며, 세상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사도 성 바오로도 오늘 이같이 성령을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기적으로 살았습니다. 더 많이, 더 높아지려고만 하여 허물 수 없는 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막히고 통하지 않는 것은 언어만이 아니었습니다. 진정 통하지 않고 막힌 것은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몸이시고 우리는 모두 지체입니다. 우리의 몸속에는 하느님의 성령, 그 뜨거운 숨이 흐르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이른 아침마다 계곡의 물을 따라 걷습니다. 지리산 피아골 계곡의 물은 섬진강으로 흐르고 마침내는 바다에 이를 것입니다. 바다는 어머니이고 하느님이십니다. 계곡의 물은 수없이 많은 바위와 장애물을 뚫고 뚫어 바다를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곳에 도달하여 마침내 그는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예로부터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상선약수’, 다투지 않고 흐르며 고인 곳에서는 잠시 멈추는 피정도 갖다가 무리한 흐름이 아니고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맡겨 그야말로 유유히 흐릅니다. 더러운 것들은 씻기우면서 부족한 곳에 자신을 희생하여 버릴 줄도 아는 넉넉함도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물이십니다. 계곡의 물을 마시며 물이신 성령께서 내 온몸 구석구석 퍼지고 계심을 느껴봅니다. 그분의 생기, 그분의 힘, 그분의 은총이 세상 온 누리에 퍼지도록 오늘 저는 또다시 성령송가의 기도를 성령님께 간절히 바칩니다. “진정 물 한 방울 없이 타는 목마름으로 생기를 잃어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성령의 물을 부으시어 그들 마음과 육신에 생기를 돋우어 주십시오. 온갖 불목과 미움과 원망으로 깊이 파인 우리들 마음의 골짜기를 성령의 물로 가득 채우시어 그 골짜기를 벗어나 강이신 어머니, 하느님의 바다로 흐르게 하여 주소서. 인생살이에서 짓고 또 짓는 온갖 죄악의 더러움을 성령의 물로 씻기시어 어린 아이와 같은 새살, 새 영혼이 솟아나도록 씻겨 주소서. 용서하지 못했고, 화해하지 못했으며, 끝까지 독선과 이기적으로 살았던 우리의 메마른 가슴, 그 먼지 나는 목마른 땅에 성령의 물을 부어 주시어 우리가 이 갈증에서 벗어나도록 당신의 생기를 주소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러 세상적인 걱정과 불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 우리들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오시어 성령의 평화를 전하십니다. 제자들은 너무도 기뻐하며 다시 생기가 살아납니다. 죽음에서, 공포에서, 온갖 걱정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이제 다시 생기를 찾고 일어난 제자들을, 아니 우리들을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 살아남은 생기를 우리만 독점하지 말고 억눌려 생기없이 사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전하라고 숨을, 용기를 불어 넣으시며 힘차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은 뜨거움이며 바람이며 생기를 주는 물이십니다.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이기양신부-
우리는 사람이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 하고, 회사가 설립된 날을 창립기념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 창립일은 언제일까요? 12월 25일이라고 대답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만, 12월 25일은 예수님 생신날입니다. 천주교회 창립일은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가까스로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기 시작할 즈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고 제자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몰라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때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불꽃 혀의 모양으로 사도들 위에 내립니다. 이 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열정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성령 감화를 받은 베드로의 설교로 하루 만에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천주교 창립일이 바로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를 탄생시키고 이끌었으며 지금까지 교회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 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등 모든 성사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모든 성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거행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사 거행 중 가장 중요한 성변화 순간에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이렇게 성령은 교회 탄생의 생명이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르는 신자나 또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신자, 죽은 교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합니다. "돌이켜보면 이 환자들은 내게는 선물이나 다름없다. 의사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는 환자야말로 진정 의사가 필요한 환자 아닌가. 이렇게 귀한 일은 아무나 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나는 감사하고 이런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선우경식(요셉, 2008년 선종) 원장의 글입니다. 1969년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한 선우 원장은 1973년 미국 유학 후 현지 유명 병원들에서 좋은 일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모두 뿌리치고 귀국합니다. 고국에 돌아온 뒤 의과대 교수로 잠시 근무했던 그는 1983년 당시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였던 관악구 신림동에서 무료의술 봉사를 시작했고, 1987년 무료의원인 요셉의원을 개원합니다. 그는 환자들은 돌보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생전에 "요셉병원을 맡아 1년만, 2년만 하겠다며 결혼을 미루다가 시기를 놓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영세민, 노숙자, 외국인 근로자 등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집중 치료하며 이들에게 '슈바이처'로 불렸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요셉의원을 거쳐 간 이들은 약 42만 명에 달합니다. 그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는 예수님 말씀을 일생 실천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어려움을 성령에 힘입어 승화시키고 이제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 받는 천국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5장에서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십시오. 성령께 대한 믿음은 신자와 미신자를 갈라놓는 중요한 가름대입니다. 성령께서는 흙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고 처녀 잉태를 가능케 하시고,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성령에 힘입어 살아야겠습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규성신부-
제자들은 스승을 갑작스럽게 잃어버렸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을 지배할 강력한 지도자라고 생각하였다. 스승의 말씀과 기적의 능력 그리고 그 심오한 혜안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상상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스승은 무력하게 십자가에 살해당하고 만다. 스승은 이러한 사건에 대항조차 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의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은 공허하게 되었다. 스승의 가르침과 행적은 이제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이제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생존일 뿐이다. 그래서 더러는 예루살렘을 떠나기도 하였다. 어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아무도자신들을 찾지 못하도록 숨어야 하는 것이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아무도 눈치 챌 수 없는 숨겨진 장소에… 누군가가 그들이 숨어 있는 집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들어올 수 없도록 모든 문을 꽁꽁 잠가 놓고서…. 스승의 죽음과 함께 삶의 의미를 상실한 제자들에게 이 세상과 이웃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된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장소에 은닉하면서 희망을 상실한 채 폐쇄적이자 비관적으로 머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 어떤 이들에게조차 신뢰를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이들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기대하지 못한 채 그냥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들끼리 외로이 숨어 지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설사 누군가가
그것을 눈치 채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한다. 즉 자신들의 내면으로 들어오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 싼 세상과 이웃들로부터의 관계를 철저히 단절시킨다. 그것이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장소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 집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어오신 것이다. 예
수님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하였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또한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러한 곳으로 오리라고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어둡고 폐쇄적인 모든 방어벽을 뚫고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으신다. 예기치 못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발현은 불안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근심과 걱정을 이겨내도록 한다. 단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선사한 것뿐만이 아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몰래 숨고 자신을 철저히 은폐하던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과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낸다”(요한 20, 21). 세상에 대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을 향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의 삶이자 생명이라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성령’을 불어 넣어선사하신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선사 받은 성령은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이자 생명이다. 성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도록 하는 원천인 것이다.
성령님과 성모님
-전삼용신부-
저희 집은 시골이었기 때문에 구멍가게 하나 없었습니다. 유일한 군것질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곤 리어카를 끌고 가끔 오시는 강냉이 장수 아저씨였습니다. 집에 있는 쇠붙이며 병, 고무신등 무엇이든 가져가서 강냉이를 얻어먹었습니다.
한 번은 그 아저씨가 동네 아이들 모두에게 강냉이를 공짜로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각자 집에 들어가서 강냉이를 담을 것들을 들고 나왔습니다. 저의 친구는 큰 대야를 들고 왔습니다. 저는 그저 양 손으로 받았습니다. 어린아이가 양 손을 모아서 만들 수 있는 공간은 그리 크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밖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는 한 대야 가득 강냉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가 똑같은 선물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더 받고 어떤 사람은 덜 받습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며 거룩한 것을 합당하지 못한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그릇대로 은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누구는 더 받고 누구는 덜 받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자체이십니다. 사랑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전부를 주십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을 완전하게 사랑한다는 뜻도 되지만 아들이 그 선물을 합당하게 받을만한 그릇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전부’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아들 또한 아버지께 당신의 전부를 돌려드립니다. 십자가상에서 아들은 자신의 영혼과 영을 아버지께 돌려드립니다. 두 분은 이렇게 서로에게 자신의 전부를 비우시고 가장 고귀한 것을 주십니다.
성령님 또한 그들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께, 또 아드님께 왔다갔다를 반복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니라 성령님 또한 하느님이시면서도 당신의 모든 것을 비우셔서 아버지와 아들에게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을 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모든 것, 즉 성령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으면서 자신의 그릇을 더러운 것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죄는 마음을 돼지우리로 만듭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고 싶어도 당신의 성령님을 돼지우리에 들어가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죄로 인해 은총이 단절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하려고 할 때는 필연적으로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야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에게 어려운 신학적 강의를 할 수는 없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아이들이 수백 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가운데 어려운 신학강의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한 명을 위해서라도 신학에 대해 이야기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신학 강의라도 그 중에 단 한명도 그것을 이해할 사람이 없다면 쓸데없이 못 알아듣는 강의를 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인간에게 당신의 모든 것, 성령님을 주시기를 원하셨지만 사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그 성령님을 아드님처럼 온전하게 받을만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성령님이 충만히 오실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는 세상 창조 때부터 마련해 두셨던 ‘성령의 그릇’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 물들지 않도록 잘 보존해 두신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분이 마리아이십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처음부터 구원사업에 동참하도록 마련되신 분이십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내십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이고 성모송의 첫 구절이기도 한 이 말씀 안에 인류구원에 대한 모든 신비가 다 들어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은총을 잃게 되었고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은총을 충만히 받을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성모님만이 ‘은총이 가득’하다고 인사한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조차도 없어서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실 수 있는 완전한 그릇이란 뜻입니다. 성모님이 없으셨다면 성령님이 충만하게 오실 수 없었고 그리스도도 잉태되어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이고 온전한 의미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로지 성모님만이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세상에 하느님을 태어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성령의 그릇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이 세례를 받고 죄가 용서받았을지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분은 본래부터 깨끗하신 분이고 세례를 받더라도 죄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성모님 외에는 어떤 누구도 가브리엘 대천사가 한 인사, ‘은총이 가득하신’이란 말을 들을 자격이 안 됩니다.
성모님은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하느님을 잉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일뿐만 아니라 그 은총을 부족한 우리에게도 나누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성모님은 은총의 그릇이고 통로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한 성모님은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이 때 마치 불에서 불이 옮아 붙듯 성모님을 접한 엘리사벳과 그 태중에 있는 미래의 세례자 요한까지도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 뜁니다.
마치 상수도 집수장에서 모든 물이 모여 각 집에 나눠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은총을 성모님께 충만히 주시고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모님을 ‘은총의 중재자’라 용기 있게 일컬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눈치 채십니다. 포도주가 없다고 하여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께 “그것이 저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포도주가 떨어질 정도로 마셨다면 이미 충분히 마셔서 다 취해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취하도록 술을 더 만들어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은총의 중재자이심을 아십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포도주로 상징되는 성령님께서 인간에게 오시지 않으시고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과의 혼인이 깨지게 된 것에 대해 당신이 아드님께 성령님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중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모님과 사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는 그 모습입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성령강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모님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미래의 성령강림을 상징하는 성령님의 기적을 얻어내십니다. 성모님이 아니면 어떤 누구도 원치 않으시는 예수님께 이 기적을 얻어낼 수 없었습니다.
성령강림 때 성모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너무 당연하고 그 분께 더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도 너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성모님 없는 성령강림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마치 구약의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과 물이 내려오게 하신 분이고, 파티마에서처럼 역시 태양의 불덩이가 세상에 내려오실 수 있도록 중재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성모님께 달려가는 사람은 끊임없는 성령강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내려오실 때 유일하게 한 그릇, 바로 성모님을 향해 내려와 온 세상에 퍼지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교회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 1,14)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성령께서는 천지창조 때부터 시작하여 구약시대는 물론 신약시대에도 쉬지 않고 활동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더 힘차게 활동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루카 1,35 참조),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고(마르 1,10 참조),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가셨고(마태 4,1 참조),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고(히브 9,14 참조),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습니다(로마 1,4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사도 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사도 2,14 참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뜻밖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다락방에 모여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요한 20,19) 있었습니다. 당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마태 28,13)라고 소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활의 말을 함부로 입에 담기에는 위험한 때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마리아 막달레나한테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 문을 잠그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의 모든 문을 잠근 것만이 아니고 마음의 빗장까지 잠갔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0-21)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일으킴 받은 그 자리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정상적인 자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평화가 깃드는 것이지 평화는 물질이나 명예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기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창세 3,9) 아담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잠재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를 이탈해 세상의 자리에 마음을 쓰며 살아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 있지 못할 때 불안해하면서 자기 자리를 찾고자 평생을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돈을 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교수다, 사장이다, 의사다.’ 하고 자신의 자리를 알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자리를 찾아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자리는 세상이 요구하는 자리는 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는 아닙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십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이 두려워 숨게 됩니다(창세 3,10 참조).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지만,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의 공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숨게 만듭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숨게 되면 평화도 잃어버립니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리에 있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17)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신 자리에서 평화를 누리려면 성령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요한 7,39) 않았으므로 제자들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4)라고 예수님을 부인했고,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마르 14,50) 달아났으며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요한 21,3) 하며 각자의 삶터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은 이제 십자가 뒤에 불어닥칠 엄청난 핍박이 두려워 마음을 졸이며 지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말씀도, 예수님과 함께했던 기쁨도 어느덧 다 잊어버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훈련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입니다.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보았고, 심지어 자신들이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부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부활을 의심하고 주변 환경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다락방에 숨어 문을 꼭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두려우면 저절로 마음의 문을 닫게 마련입니다. 제자들이 부름 받은 것만으로는 제자가 아니고, 또 교육받았다고 해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제자인지 모르나 실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성령을 받아 참된 제자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이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14,17 참조), 모든 것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는 분이시기에(14,26 참조), 성령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잃어버린 기쁨을 찾았고, 절망했던 마음에 다시 용기를 얻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의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
복음선포는 우선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일이다. -박상대신부-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다. 오늘로서 50일간의 부활시기가 그 막을 내린다. 우리는 부활시기 내내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그 핵심의 알맹이가 영원한 생명임을 깨달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대축제인 과월절(뻬샤흐)을 부활절로, 오순절(샤부옷)을 성령강림절로 지낸다. 유다인들에게 과월절이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물리적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부활절은 예수부활을 통하여 인류가 죽음으로부터 생명에로 해방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오순절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을 기념함으로써 율법을 통한 물리적 해방의 영적인 지속(持續)을 의미한다면, 성령강림절은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시는 진리이시며 보호자이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로 마련된 영원한 생명을 깨닫고, 선포하며, 실제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강림절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서 성령을 통하여 이 땅 위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제 오순절은 성령강림절이다. 성령강림은 부활의 완성이며 충만이다. 성령강림은 부활절의 열매로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비록 승천하여 오셨던 곳으로 가셨으나, 약속대로(마태 28,20) 예수님께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무는 지속적 현존(現存)의 보증(保證)이다. 그래서 성령강림은 부활시기의 마무리를 고하는 사건이 아니라 진정한 부활의 시작을 의미하는 사건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탄생일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만의 부활하심과 발현하심, 40일간 지상에 체류하심과 승천하신 사건은 아무래도 스승 예수님의 산 증인들인 제자단(11제자와 여인 제자들)에 한정된 효과적인 사건이다. 이들은 단지 몇 명으로 조직된 소수의 집단이었고, 스승의 죽음에 직면한 이 집단의 태도는 차라리 조직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했다. 그들은 승천하시는 스승으로부터 지상 최대의 복음선포와 세상으로의 파견을 명(命)받았다.(마르 16,14-20; 마태 28,18-20)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직후 제자들이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다(16,20)고 하나 이 대목은 후기 편집에 해당한다.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사명을 수행할 능력과 용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쩌면 루카복음의 기록대로 제자들은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24,49)는 스승의 명령에 따라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24,53)과 하늘의 능력을 기다리는 일로 소일(消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이 되었을 때, 한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렸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의 은사로 가득 차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가지 외국어를 구사하며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사도 2,1-11) 성령을 듬뿍 받은 사도 베드로는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사도들이 모두 그 증인이다.”는 요지의 논리적이고 청산유수 같은 설교를 했고, 이 설교에 믿음을 얻은 사람들 중에 그 날에만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사도 2,14-42) 드디어 소수의 제자단에 한정되어 머물러 있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성령강림절은 세상을 향한 교회공동체의 탄생일이며, 동시에 제2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인 셈이다. 오늘 성령강림대축일 낮미사의 복음은 부활 제2주일에 들었던 요한복음(20,19-31)의 첫 부분(20,19-23)이다. 이 대목의 서술적 시점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던 그 다음 날이며(19절), 내용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제자들의 부활체험(20절)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 대목을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의 복음으로 선택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심’과 ‘파견’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발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생전에 약속하신 대로(요한 14,16; 16,7) 아버지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고 말씀하신 후 제자들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절)고 하시면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다. 이어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곧바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 말씀 안에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죄와 용서에 대한 ‘자유처분권’을 가진 듯 엿보인다. 물론 죄에 대하여 ‘단죄(斷罪)’와 ‘용서(容恕)’를 선포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 성령뿐이다.(16,8-11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활동을 제자들의 활동 안에서 보시는 것이다. 즉, 성령의 보호자로서의 활동과 진리로서의 활동을 제자들의 증거행동과 복음선포활동을 묶어 두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다. 세상은 누구인가? 세상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배척하였으며(요한 1,10-11), 예수님과 더불어 제자들을 미워하였고(요한 17,14),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러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죽음이었다. 이제 제자들은 그 세상에로 파견된다. 따라서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 많은 세상’을 ‘용서하는 일’이다. 용서 없이는 복음선포도 있을 수 없고,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강림은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사도들이 용서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돌아가신 예수님의 영(靈)이신 성령께서 사랑의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恩賜, 카리스마)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직과 신앙의 증인에로 불림을 받는다. 이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받은 일반사제직의 성숙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며 옹호할, 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고 가르친다.(LG 11) 복음전파와 믿음의 수호(守護)는 신자의 의무와 책임인 동시에 복음의 증인으로서 가지는 권리이며 자랑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느님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다. 이는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는(로마 11,29) 하느님의 선물 전체’를 뜻하기도 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지고(로마 5,15-16), 또 영원한 생명이 되는(로마 6,23) 은총의 선물’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총으로 충만하게 하시고”(에페 1,6)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선물을 베풀어 주실 것”(로마 8,32)이다. 이 선물들 중에 첫째가는 것은 성령 자신으로,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내려져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심어 준다.(로마 5,5).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사에는 성령칠은(聖靈七恩; 이사 11,2-3),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9가지 봉사의 은사(1코린 12,8-10), 그리고 개인의 성화를 위한 9가지 열매의 은사(갈라 5,22-23) 등이 있다
새벽을 열며
사람마다 참으로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재능을 보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그 재능이라는 것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보다 잘 하는 것만을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보다 못한 것 역시 그 사람의 고유한 재능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선배 신부님과 함께 대형 할인매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께서 저를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 대형 할인매장에 오늘 처음 와 봤다.”
아니 쇼핑 자체를 거의 다녀보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물건이 좋은지 선택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직접 물건을 사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저에게 계속 물어보십니다. “이거 어떠니? 저것은?”
이렇게 물건 고르는 재능이 전혀 없는 신부님이십니다. 그런데 신부님 스스로 물건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니, 오히려 물건을 잘 고르는 사람들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또 이런 신부님도 계십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웬만한 남자라면 다 하는 못 박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 외진 곳으로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도시처럼 신자도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할 그 신부님이 걱정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더군요. 자신은 비록 일을 잘 못하지만, 그 일을 할 사람들이 찾아가서 모든 것을 다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저보다 분명히 물건도 못고르고, 못도 제대로 박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십니다. 하지만 그 신부님들이 사제로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더군요. 오히려 지금 더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열심히 사목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남을 통해서 일을 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재능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남의 힘을 통해서 이룬 것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나보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계속해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모든 것들을, 즉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다 할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능력을 수용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즉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다 가능해집니다.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령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욕심만을 간직함으로써 성령의 자리를 만들고 있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성령을 받아라!”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나 스스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재능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새로운 마음과 사랑으로 시작하는 -이봉하수사-
해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면 조그마한 선물을 받아왔습니다. 선물은 다름 아닌 빨간 색지로 불꽃 같은 모양을 만들어 안쪽에다 성령 칠은 중에 하나를 써 넣은 것입니다. 미사 전이나 아침 기도 후 각자 하나씩 뽑아 열어본 후 기도와 묵상으로 새로운 1년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대축일을 의미 있게 보내라는 뜻도 담겨 있고, 성령 칠은 중에 하나를 잘 받아 사랑과 봉사를 더 많이 하라는 깊은 뜻도 담겨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로마에서 공부할 때, 성령 강림 대축일에 어느 분에게서 받은 쪽지였습니다. 그 쪽지에는 제가 오랫 동안 기도했던 내용과 성령 칠은 중 하나가 씌여져 있었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놀랍고 기쁜 나머지 그 쪽지를 오래오래 성경 안에 끼워두고 생활하면서 힘이 들 때마다 꺼내보곤 했습니다. 올해도 새해 첫날부터 소망하는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벌써 6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아니 무엇인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는 순간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을 기점으로 새로운 1년을 계획하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오늘이야말로 성령 칠은이라는 선물 안에서 선교든 사랑이든 용서든 새로운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때라고 봅니다.
-김정훈 신부-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시던 날, 교회의 시작을 경축하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장면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죄의 용서와 새 생명이 교회와 우리 삶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ㄴ)
‘주간 첫날 저녁’(20,19ㄱ), 곧 새로운 주간이 시작되는 시간이지만 제자들에게서는 어떤 새로움도 활력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잔뜩 움츠러든 모습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유다인의 광기에 두려워 떨고 있다. 게다가 처참한 몰골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후로 좀처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영광과 기쁨에 싸인 모습으로 제자들 가운데 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건네신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제자들이 두려움을 떨치고 기쁨에 휩싸인다. 제자들의 변화는 참으로 이상하다. 주변 상황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제자들이 내적·외적으로 완전히 변했기 때문이다. 집 밖에서는 여전히 유다인들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으니 굳게 잠겨 있는 대문과 방문도 사실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변화는 세상의 무엇도 침범하거나 흔들 수 없는 평화,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화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말로 인사하기도 하는데, 구약성경에서도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으로 인사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1사무 25,6). 누군가에게 평화를 빌어준다는 것은 축복의 의미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저주의 의미다. 평화는 단지 싸움이나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특히 신앙 차원에서 평화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완전·온전·조화·충만 등의 상태,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뜻한다. 예수님의 평화인사는 이러한 참 평화가 당신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에게 실현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여러 가지 있을 터인데(예를 들어 사랑·평화·희망·굳건한 믿음 등) 그 중에서 ‘평화’를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선물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평화가 자리잡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외적으로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하느님 안에서 완전한 평상심, 곧 평화가 없으면 세상이 주는 작은 충격에도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평화로 무장한 제자들을 당신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맡기신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20,22ㄴ-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20,22).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첫 인간을 흙의 먼지로 빚으신 다음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시는 장면(창세 2,7)을 떠올리게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에 아담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 것처럼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 생명의 숨, 곧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이로써 예수께서 니코데모에게 예고하신 생명,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생명(요한 3,5-8)이 시작된다(성령은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탄생시킨 생명의 힘이시다. 사도 2,1-47 참조). 제자들이(그들과 함께 우리가) 참 평화 속에서 성령을 받아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없애주셨기 때문이다. 곧 예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어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고(이것이 참 평화의 출발점임)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는 용서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 곧 죄 중에는 평화도 새 생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예수께서 선물하신 평화와 새 생명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야 하고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죄의 용서’를 일차적인 사명으로 맡겨주신다. 이는 우리가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 속에 잠기고, 성령을 가득히 받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전히 일치하여 참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참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처가 용서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조건 없는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 용서는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미움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자유로이 활동하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랑의 용서를 실천하여 서로가 참 평화와 새 생명을 누리는 데 협력해야 할 것이다.
묵상과 기도
▷ 참 평화 속에서 살기 위해 내가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 나는‘서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주님, 세상은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그것을 얻기 위해 근심하며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 평화가 저희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주님, 저희가 세속적 욕심과 걱정을 버리고 당신 사랑 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또한 그 평화 속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생명이 충만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하소서.
-허영업 신부-
오늘날 가톨릭에서 성령쇄신이라 부르는 신심운동은 1967년 2월, 미국의 듀케인 대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지도신부와 함께 사도행전을 주제로 한 주말 피정에서 성체조배를 할 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의 성령쇄신 운동은 대학생들의 신앙쇄신 운동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것이 본당과 수도회로 확산되면서 신자들의 신심운동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쇄신 운동은 모든 신앙인을 위한 신심운동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하거나, 신앙이 부족하여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성령 안에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는 하느님께서 모두 주십니다. 문제는 각자 다르게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잘 간직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사를 공동체의 이익과 이웃사랑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 중에서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평화’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의 마지막 목표도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유다인의 일반적인 인사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평화의 인사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많이 누리고 소유하여 높이 올라가야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주는 평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오히려 고통과 불안 속에서 끄떡없는 영적이고 내적인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평화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을 인간적인 힘으로는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용서하려고 노력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잠시 잊을지는 몰라도 완전히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얼마나 복된 말씀이고 은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이기양 신부 -
우리 천주교의 창립일이 언제입니까? 12월 25일이라고 대답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만, 12월 25일은 예수님의 생신 날이지요. 천주교회의 창립일은 바로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강림(聖靈降臨)이란 무슨 뜻입니까? 성령께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죽인 후에 자기들도 그렇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모두들 문을 닫아걸고 숨어서 지냈습니다. 며칠 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눈앞에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그저 어리둥절해 하였고, 또 승천하신 후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해 하고만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모두 몹시 두려워하며 숨어 있었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ꡒ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ꡓ(요한20,22-23)
이 날 이렇게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문을 박차고 나와서 대담하게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들을 잡아죽이려고 했던 유다인들 앞에서 과감하게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화를 받은 베드로의 설교로 수많은 유다인들이 감동을 하고 그 날 하루만도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첫 선교로 삼천 명의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교의 창립일이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는 겁니다. 천주교 신자가 처음으로 삼천 명 탄생된 날입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를 탄생시키고 이끌었으며 지금까지 교회의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 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며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 또 성령께서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내가 어떻게 성령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할 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은 성령 세미나를 하는 사람이나 잘 아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교회 탄생의 생명이고 초대 교회 사도들을 이끌었던 힘이며, 지금의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는 생명이십니다.
구약 시대부터 지금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성령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비둘기 또는 불길 모양으로 성령을 표현하였고, 구약성경에는 성령을 바람, 숨, 구름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성령을ꡐ숨ꡑ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부분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어내시고 숨을, 즉 하느님의 영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서 6장 19절에서 이 내용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ꡒ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ꡓ
바로 우리 몸이 성령께서 기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창조주 하느님의 숨으로 완성되었으며 당연히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성령의 힘이 분명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 사실을 미리 알려 줍니다.
ꡒ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ꡓ(루카1,31) 이 때 성모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ꡒ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ꡓ(루카1,34) 그러자 대천사가 대답합니다.
ꡒ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ꡓ(루카1,35)
바로 성령의 힘으로 아기 예수님이 잉태됨을 고지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대천사를 보내셔서 성령의 지시를 내려주셨고 성가정이 가는 가시밭길을 언제나 성령께서 함께 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힘에 대한 기록은 우리가 오늘 읽은 독서 말씀, 사도행전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 1독서에서 들은 대로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시면서 비로소 제자들의 마음은 강해지고 변화되어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믿고 따랐던 스승의 죽음으로 유다인들이 무섭고 죽음이 두려웠던 제자들이었지만 성령 강림 이후로 놀랍게 변모된 모습을 보입니다. 유다인들이나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옥에 가고 매를 맞아 죽어가면서도 기쁨에 차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외쳤던 제자들의 이 변화된 모습은 오직 성령의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본능을 초월하게 만들고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신앙의 열정을 심어주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ꡐ사도행전ꡑ이라기보다 ꡐ성령행전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사도들은 도구로 쓰였을 뿐이고 초대 교회를 이끄신 분은 성령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만 아니라 지금도 세례 성사를 받고 견진 성사를 받고 고백 성사를 하는 등의 모든 성사에 있어서 그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모든 성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집행이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미사 거행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 변화의 순간에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ꡒ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ꡓ
이렇게 성령은 교회 탄생의 생명이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 중심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르는 신자나 또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신자, 죽은 교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신부나 수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지 않고 육체의 힘이나 자신의 의지로 살면 분별력이 없어지고, 삶의 중심은 산란해집니다. 지금 나는 어떤 힘으로 살고 있습니까? 성령의 힘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육적인 힘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육적인 힘으로 살고 있으면 죽은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 살고 있는지는 드러난 결과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5장 16절 아래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신의 열매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ꡒ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ꡓ
드러난 결과에 따라 내가 무엇을 따라 사는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의 삶은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면 죽었다가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에 있던 본당에 열심한 신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강 안드레아라는 형제분인데 몇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난 분입니다. 제가 여기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는 췌장암으로 병원에서 집으로 돌려보내기를 몇 번이나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선교에 말할 수 없이 열심이었고 기도도 하루 종일 하는 분으로 십일조 역시 말할 필요도 없이 꼬박꼬박 잘 지키는 그야말로 성실한 신자였습니다. 이 형제는 죽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성령께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정신을 잃으면서도 기도만은 놓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집에서 기도하던 중에 하혈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한 피를 네 대야 분이나 쏟고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의사들이 사진을 찍어보니 그 심했던 암세포가 말끔히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성령께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살 때 죽게되어도 살아난다는 것을 입증해준 좋은 예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뜻을 거스르고 육정에 따라 살면 살아있어도 죽은목숨이나 같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여러분께 권고합니다.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주시기를 청하십시오. 성령의 열매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시고 부족한 그 부분을 성령께서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음행이나 방탕한 삶이 나를 흔들어 놓는다면 절제의 은사를 구하십시오. 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또는 미워하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있다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 평화의 열매를 청하십시오. 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활동하시게 하기 위해서는 나를 깨끗하게 정돈하여야 합니다. 즉 회개로 나를 깨끗이 씻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난 후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위기의 상황에 놓이고 시대가 아무리 힘들고 타락했어도 지금까지 교회의 거룩한 생명의 샘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험한 진창길을 살아왔어도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다가선다면 완전히 새로운 은총을 내려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인 오늘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해 봅시다. 성령의 은총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평화롭게 열매 맺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강길웅 신부-
구약에서는 성령을 히브리말로 '루아흐'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는 '프네움마'라고 하는데 입김, 숨결, 호흡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에 '세찬 바람이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찬 바람은 바로 힘찬 성령의 충만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숨을 내쉬시며'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숨을 내쉬셨다.'는 말씀의 뜻은 주님으로부터 성령이 직접 발산되셨다는 표현이 됩니다. 즉 다른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열흘만에 성령을 보 내 주셨는데 오늘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 발현과 함께 예수께서는 바로 성령을 내주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령강림이 동시에 있습니다.
성령은 천주 제3위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에게 발산되어 나오는 기운(능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하는 것이 성령이며 아들을 아들답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신비롭게 일치시키는 것이 성령이며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드러내는 것이 성령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에게서 성령을 빼면 하느님은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마치 휘발유 없는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약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정성들여 가르쳐 주셨고 깨우쳐 주셨건만 그들은 여전히 진리를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안 계신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사공 없는 나룻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 떠나신다는 뜻을 계속 암시하시자 그들은 불안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가 바로 성령입니다.
주님이 안 계신 캄캄한 세상은 이제 성령이 밝혀 줄 것이며 부족한 지혜와 지식은 성령이 채워 줄 것입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복음을 전파할 담대함도 성령이 줄 것이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낫게 할 치유의 능력도 성령이 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령으로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처럼 하게 될 것입니다. 언변도 기적도 그분이 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 받았습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배우지도 못한 제자들이 동시에 여러 나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감동적인 대중 설교를 통해 한꺼번에 3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다른 곳에서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 예수님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오죽잖은 인생이 지식인과 부자와 세도가들을 압도합니다. 성령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은혜를 생활에 실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윤기있게 번쩍번쩍 빛나는 삶, 재미있게 신이 나는 기쁨의 삶을 신앙 안에서 구현시켜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보요 멍청입니다. 좋은 선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서글픈 존재들입니다.
한 자매가 있는데 얼굴엔 늘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얼굴은 예쁜데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아들 중에 하나가 정신 지체자였습니다. 자매는 그것이 항상 고통이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 안수를 받고 나서는 근심과 불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전에는 아들 땜에 못 살 것 같더니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니 아들 땜에 살맛이 나게 됐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사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어둠을 빛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킵니다. 무엇이든 사람으로 하여금 살맛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철저한 회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쥐어짜서 진정으로 뉘우쳐서 회개할 때 성령은 찾아 주십니다. 아니 그것마저도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참된 회개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소망합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개합시다. 이것이 능력을 얻는 길입니다.
해바라기가 아니라, "성령 바라기" 삶을 살자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신(神)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접(神接)할 수 있는 존재이다. 잡신이 내리면 무당이 되지만, 성령이 내리면 참 신자가 된다. 참회, 믿음, 간구가 바로 성령을 맞는 길이다. 해바라기처럼 항상 성령을 향하는 '성령 바라기'가 되어야겠다.
1. 인간은 신접(神接)할 수 있는 존재이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 축일이다. 성탄, 부활, 성모승천과 함께 4대 축일이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온 세상에 전함으로 교회가 생겨났기에 설령강림축일은 교회의 개교기념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 제1독서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광경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2,2-4) 그리고 성령을 받아 설교하는 베드로의 말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자기나라 말로 들렸다. 그리고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많은 기적을 하며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다.
우리 주변에는 갑자기“신(神)이 내렸다.”며 '신(神) 내림 굿'을 하여 무당이 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을 '강신(降神) 무당'이라고 한다. 이 무당이 진짜 무당이다. 어머니가 무당이어서 그것을 보고 배워서 무당노릇을 하는 사람을, '학습무당'이라 하고, 집안이 무당집안이라 '가계(家系)무당'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짜 신(神) 내린 무당이 아니다.
“인간에게 영(또는 神)이 내린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서에서는 인간을“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하느님과 통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쇠붙이도 전기가 통하는 것이 있고 통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인간에겐 동물적인 면이 있지만 순수한 동물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에 신(神)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잡신이 내리면 강신무당(降神巫堂)이 되고,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2. 세례와 견진 때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을 통해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고린12,3)고 말씀하신다. 사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모든 좋은 생각은 성령께로부터 온다.”고 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성령에 힘입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세례와 견진을 통해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왜 우리의 생활은 내적인 평화가 없고, 무기력하고 초조하고 두려움과 번민(煩悶)에 싸여 있는가? 왜 이렇게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삭막한 생활인가?
이는 이미 성령께서 우리에게 와 계시지만, 우리의 생각과 삶이 성령의 활동을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거울은 원래 다른 물체의 상을 반사하는 것이지만, 그 거울에 먼지와 이물질(異物質)이 잔뜩 끼이게 되면 어떤 상(像)도 깨끗이 비춰지지 않는 것과 같다. 호수도 수면이 잠잠하고 고요하면 하늘의 구름과 달과 별, 주변의 나무와 모든 것을 거울처럼 잘 반사해 주지만, 물결이 일고 흙탕물이 되면 아무 것도 반사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본래의 평상심(平常心)을 잃으면 성령의 모습과 타이르심을 담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성령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길은?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가장 큰 장애는 죄(罪)이다. 죄책감으로 인한 마음의 굴레는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다. 그 다음은 증오나 원한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이다. 증오와 원한으로 들끓고 있는 마음속에 성령이 활동 할 곳은 없다.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한 지나친 집착 또한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막는 장애물이다. 어떤 다른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집착은 영혼은 얽매는 사슬인 것이다.
성령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다. 예수님께서는 "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 너희는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가11,10-13)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믿고 간절히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성령의 은총을 반드시 주시는 분이시다. "나 같은 놈에게 하느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주시겠나? 나는 자격이 없어!" 하는 의심이나 자격지심은 가장 큰 함정이며 악의 세력의 방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아버지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아버지께 청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성령의 선물을 받기에 부당한 자녀이다. 나는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부(富)를 누리고 있는가? 해바라기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내적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항상 하느님을 향하는 '하느님 바라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미사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참으로 필요한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주시도록 마음을 열고 겸손 되이 간절히 구하자. 주님 당신의 영으로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새롭게 해 주소서. 아멘.
내 인생의 동반자 성령 -양승국 신부-
요즘 형제들과 밭을 빌려 농사를 조금 짓고 있습니다. 다들 '왕초보'라 문제가 많습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기는 하는데 여간해서 싹이 안 올라옵니다. 이것저것 모종을 심기는 하지만 간격도 안 맞고, 또 뭔가 어색합니다. 보다 못한 '프로'들께서 한마디씩 거드십니다.
"자네들, 무슨 모종 장사할 일 있어? 고추모종을 왜 그렇게 빽빽하게 심었어? 그리고 저기, 호박모종을 이랑 한 가운데다 줄줄이 심어놓으면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뭔 야채 박람회야? 상추, 케일, 토마토, 가지, 오이, 쑥갓… 없는 게 없구먼,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자주 야단을 맞다보니 저는 가급적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제일 먼 쪽에 앉아 일하지요. 요즘은 꽤 키가 커진 고추모종에 지지대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때 이른 한낮 더위에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진 고추모종들을 하나하나 다시 일으켜 세워주며, 또 갈증을 해소시켜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 손길이 아마 이러했겠지요. 제대로 걸어 다닐 힘조차 없어 비틀거리던 나를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시며 지척에서 따라다니시던 분, 혹시라도 넘어지면 비호처럼 달려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던 분, 다시금 살아갈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시던 분… 돌이켜보니 많은 경우 그런 하느님 손길은 마치 미풍처럼 불어오는 성령을 통해서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성령께서 내 안에 어떻게 활동하시는가?'란 주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였는데, 점점 진지해지더니 나중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이 다들 걸어가는 넓은 길을 굳이 마다하고, 이 좁디 좁은 길을 택해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후배들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름대로 꽤 많은 영적진보를 이뤄냈다는 마음에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한 형제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과 신앙, 하느님과 관계를 총정리 하는 '영적자서전'을 써나가면서 평소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성령의 이끄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이었지만 굽이굽이, 곳곳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음에 감사의 눈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가야할 길이 너무도 막막해서,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아서,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심각한 성소의 위기 상황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는 형제들로 변장하고 나타나셔서 자신을 위로해주시고 이끌어주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죄로 기울어져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오랜 방황 속에 허덕일 때,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는 몰랐는데, 조금 빠져나와서 바라다보니 손을 내밀어주시던 성령께서 계셨습니다. 늦게나마 성령의 손길, 성령의 자취를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둔감해서, 우리가 너무 육적으로 살아서 잘 감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손 내밀면 언제라도 잡아줄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오신 분이 성령이심을 인정합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도우미이자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감각이 온통 육적인 것에 몰두해 있기에, 우리 안테나가 온통 세속을 향해 있기에, 우리 시선이 전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기에, 그분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순간 체험하게 될 은총은 놀라운 것입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느님 자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던 현실이 '살아볼만한, 견뎌볼만한 현실로 변화할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었던 인간들이 그저 안쓰러운 인간, 측은한 인간, 감싸주어야 할 인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기적의 원동력, 우리 신앙을 한단계 성장시켜줄 활력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호자,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신바람 영성” : 배터리 충전 - 김영수 신부-
어느 날 아침 밖에 나가려고 자동차에 올라 시동을 걸기 위해 열쇠를 꽂고 돌렸습니다. 자동차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새 모르고 켜놓은 미등 때문에 배터리가 다 방전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가까이에 배터리가 온전한 차에 케이블을 연결해서 시동을 걸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차를 이용하여 죽은 차를 살린 것입니다. 배터??나간 차는 죽은 차나 마찬가지이듯이 우리의 삶도 동기가 약해지면 삶이 활력을 잃고 주저앉게 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지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잘사는 사람은 더욱 잘 살게 되지만 없는 사람은 더욱 어려워져 머리 둘 곳이 없어서 주저앉고 있습니다.
거리거리마다 도배하다시피 한 정치구호가 넘쳐나지만 상식 이하인 정치인들을 바라보며 주저앉게 됩니다. 참다운 신앙생활을 염원하는 사람들은 변화하는 세상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위기의식 속에서 영성이 피폐해진 교회와 세속적인 신앙인들을 바라보며 주저앉고 있습니다. 주저앉아 버린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신바람 나는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둡고 힘든 현실 앞에서 주저앉아 버린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힘차게 달려가게 할 수 있는 신바람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서 힘차게 달려가게 하는 힘은 바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신바람의 영성입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다락방에 세찬 바람으로 불어온 성령의 바람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주저앉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알며, 또한 우리 자신을 더욱 잘 깨닫도록 해주십니다.
성령의 비추심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인간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밝혀주시는 빛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비추심 안에 머무를 때 인간은 나약함과 혼란 중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마련해 놓으신 사랑의 길을 신바람 나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완성하는 신앙의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위로부터 오는 힘’을 받은 제자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다락방에 숨어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진 놀라운 힘은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숨죽이고 있던 제자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그 순간 사랑으로 다시 충전되었고, 방전된 채 움직이지 못하던 제자들의 삶에 시동이 걸리게 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감각을 열어 주시며 마음을 움직여주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의 삶은 변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일깨워주시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만나게 되고, 그분의 뜻을 감지하게 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오셨고,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가슴 벅찬 일인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듯이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배터리가 방전된 차가 스스로의 힘으로 시동조차 걸 수 없듯이 사랑을 잃어버린 삶은 자신 안에 갇혀 활력을 잃고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여서 성령 안에 머무르지 않는 신앙은 생명력을 잃고 위기를 두려워하며 폐쇄적인 신앙에 머무르고 맙니다. 성령은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의 삶에 시동을 걸게 해주고 주저앉아 있던 삶을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삶에 배터리가 방전되었다면 예수님의 사랑에 연결될 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전된 신앙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충전시켜 다시 일어나게 하고,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며, 각자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사랑을 열매 맺습니다.
멀리 독일에서부터 전해오는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4년 전, 숨죽여 살던 사람들에게 신바람을 불어넣고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던 그 뜨거운 바람이 이번에도 불어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은 한 번 불고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희망을 심어주고 사랑을 충만히 채워줍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가슴에도 월드컵 바람보다도 뜨거운 성령의 바람이 불어닥치기를 기원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우리 마음에 오소서.”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남기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서공석 신부-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남기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임의에 맡겨집니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떠난 사람이 사람들 안에 남겨 놓은 기억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역사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당신 안에 일하시던 성령을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과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그 사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역사 안에 남겼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과 더불어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에서 종말을 고한 당신의 삶을 요약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잉태되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마태 1,20)이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이 당신 위에 내려오시면서(마르 1,10)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같은 성령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성령을 받아 시작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이고 예수님은 그 숨결로 사셨습니다. 창세기(2,7)는 흙으로 된 인간 모상에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숨결을 받아 산다는 뜻으로 복음은 예수님이 그들 안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유대교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간 죄의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해 하느님이 벌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미운 사람이 불행할 것을 원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 세상과 그런 마음은 하느님도 사람을 미워하고 불행을 주는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악한 마음은 악한 하느님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상상하여 만든 하느님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합니다. 악한 인간이라도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대신”(루가 11,11) 주지는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6,36) 스스로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은 인간 생명을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고 실천하셨습니다. 어느 날 베짜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고치신 다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우리는 오늘 제1독서로 사도행전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선교활동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활동을 서술하기 전에 두 폭의 그림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그림이고 또 하나는 오늘 우리가 들은 성령강림의 그림입니다. 이 두 폭의 그림은 사도행전의 서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도들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떠나셨고, 성령이 오신 다음 시작된 사도들의 활동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의 서문에 해당하는 성령강림의 화폭에 성령이 강림하신 장소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루살렘입니다. 시기는 유대인들의 해방절 다음,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모여드는 오순절을 택하였습니다. 오순절은 해방절이 지나고 50일째의 축일입니다. 보리와 밀의 햇곡식을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제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13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이 날 예루살렘 성전에 의무적으로 순례해야 합니다.
성령강림 장면에 나타나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20,18)가 묘사하는 하느님 발현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습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졌다’는 말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사람들에 의해서 된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기원이 있는 말씀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불길 같이 전파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다른 언어로 말을 하고 모여든 군중은 각기 자기네 지방말로 알아듣습니다. 복음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예수님 한 분 안에서 발생한 복음이지만, 이제부터는 인류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을 움직였던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그 성령은 인간의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 일하십니다. 인간은 작은 구실만 있어도,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고 장벽을 쌓습니다. 민족과 문화의 다양함을 비롯하여 출신과 직업의 다양함은 인류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을 차별과 불화의 동기로 만듭니다. 성령의 이름으로도 우리는 많은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여러 역할을 함으로써 교회는 창의적이고 풍요로운 것이지만, 일부 역할을 성령이 주어져서 발생한 신분이라고 과대 포장하여 신앙인들 사이에 장벽과 차별을 만들었습니다. 성령의 이름을 붙인 신심단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만들어 갈라놓고 교회 안에 새로운 장벽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를 하신 일도 없고 그런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벌주는 악한 하느님을 상상하여 만들었듯이,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차별하는 성령을 만듭니다.
성령은 예수님 안에 일하셨던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하느님 안에 모두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숨결입니다. 차별 만들기를 좋아하고 그 안에 안주하면서 우월감에 빠져 살고 싶은 우리를 그런 욕구에서 해방시켜,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은 용서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욕심, 허영, 질투, 미움 등 우리를 갈라놓는 죄에서의 해방은 이 용서로 시작합니다. 성령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그 숨결은 우리를 갈라놓는 죄에서 우리를 용서하여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성령강림 대축일 : 부활의 완성된 열매: 성령강림 -조욱현 신부 -
오늘은 성령강림 축일이다. 성령은 주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성령께서 우리의 생활과 교회의 생활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면들을 나름대로 강조하고 있다.
제1독서: 사도 2,1-11: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성령의 불길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상징하는 사도들에게 변화의 능력을 직접 주신다. 이제는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열렸다는 것이다(9-11절 참조). 즉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마련해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구원적 개입이 근본적으로 '새로움'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결실이기 때문에 종족과 언어와 문화 그리고 외적 풍습 등의 장벽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이끌어 들이신다.
신비스러운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인간들의 정신과 마음을 내적으로 비추어 서로 일치시키는 힘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당신의 변화와 정화의 불로 세례를 받고 그 타오르는 연기와 불꽃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만한 증거자들과 중개자들을 필요로 하신다. 이래서 교회는 항상 새로운 성령강림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복음: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오늘 복음은 파스카 당일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장면과 성령에 관한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의 발하심과 파스카 축일과 같은 날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보내주시는 분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스카는 곧 성령강림의 근원이다.
제1독서에서와 같이 복음에서도 선교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즉 성령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빛과 힘을 주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갖게 한다는 의미에서 복음선포를 지향하고 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요한 16,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셨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담의 얼굴에 생명의 숨을 부어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신 것처럼(창세 2,7). 이것은 성령의 창조활동으로 선교사명에 따라 사도들만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성령의 입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성령의 힘은 죄의 용서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22-23절). 다시 말해서 성령의 쇄신활동은 성령께서 어느 곳에 머무르시게 되든지 간에 죄에 대한 승리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죄를 비난하고 고발하며 복음의 빛을 통하여 사랑의 행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곳에 성령의 창조적 능력이 실현될 공간이 마련된다.
제2독서: 1고린 12,3-7.12-13: 한 성령을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몸인(12절) 교회의 단일성의 원리로서 뿐만 아니라, 그 지체들이 맡는 역할 또는 은총의 선물의 다양성을 이루는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교회가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는 단일성 안에서 다양성이 넘쳐흐르도록 해야 한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3절).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무분별하게 다원론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단일성과 공동체성을 해치고 있는 현세대에 적절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변화의 은총을 주신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며, 이 은총을 통하여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신다. 여러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초대교회가 체험했던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령께 우리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어놓도록 하자.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한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강림축일 미사를 지내면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 항상 깨어있으면서 그분께 우리 마음을 항상 개방해 놓을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얼을 거두시면 그들은 숨져버려 드디어 티끌로 돌아가고 마나이다. 보내시는 당신 얼에 그들은 창조되어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시편 103,29-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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