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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묵상글 (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 하느님의 사람의 부끄러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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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의 사람의 부끄러움
오늘 복음의 얘기는 주님과 제자들이 성전 세를 내야 하느냐 문제입니다.
이 얘기는 읽을 때마다 저를 불편하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얘기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 현실로 바꿔 얘기하면 신자들은 교무금과 헌금을 내는데
저나 다른 사제와 수도자들은 그것들을 내지 않기 때문이고,
저나 다른 사제와 수도자들이 내지 않는 이유는 교회와 성전의 봉사자로
성별되거나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지 않는 이유를 좀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베드로 사도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얘기한 것처럼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기에 낼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고,
둘째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주님을 따른 사람은 교무금이든 헌금이든 내지 않아도 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줘서 낼 돈이 없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주님과 교회에 바쳤기 때문에 바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헌신을 제대로 하였다면 헌금은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좀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람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문제는 그리고 제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봉헌자라고 하는 제가
얼마나 저의 전부를 바쳤냐는 점입니다.
저의 직업이 없고,
제 소유의 재산이 없고,
제게 딸린 가족이 없다는 면에서는 다 바친 것 같지만
저는 저를 버리지 않았고, 버린 것을 실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저는 제 맘대로 하려고 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제 맘에 들기를 바라니
어떻게 자신을 바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버리지 않고 바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소유권은 없고 제 이름의 재산이 하나도 없지만,
사용권은 있다며 부족함 없이 다 사용하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
포기한 것을 다 누리는 저를 자주 가증스럽다고 느끼곤 합니다.
성전의 봉사자로서 저는 또 다른 면에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어제는 제가 영적 보조를 맡은 재속 프란치스코 형제회 월례회에 가서
강의하고 미사도 봉헌했는데 미사를 차리는 제대 봉사자들을 보면서
또 제가 너무도 부끄러웠고 그래서 반성을 했습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성작이나 미사 도구들을 정성껏 챙기고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그들의 모습에서 거룩함이 느껴졌는데 저는 그러지 못하니 부끄러운 것이지요.
그분들은 프란치스코가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꾸짖듯
저를 꾸짖는 듯했는데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신비에 봉사하는 이들, 그 가운데 특히 분별없이 봉사하는 이들은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제물로 봉헌하는 데 사용되는 성작과 성체포
그리고 제대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원에 정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거룩한 제사에 쓰이는 도구들만은, 고급이 아니더라도, 잘 갖춰져 있기를 바랐는데
다른 것은 잘 챙기면서 성물들에 대해선 소홀한 제가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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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마태 17,27)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성전세는 모세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님께 반 세겔을 내야 한다.”(탈출 30,13)고 말한 대로, 영혼과 육신의 속죄를 위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은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 왕에게 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니 성전세를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내기로 하십니다. 곧 세금 낼 돈을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벌려 거기에 들어있는 은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십니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사랑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당신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는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습니다. 당신 말씀이 물려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의 말씀이 저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마태 17,27)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이오니,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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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적절한 순서와 아량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 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 하신다.’ 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귀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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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찌하다 보니 매달 뉴욕에서 LA로 오게 되었습니다. 5월에는 ‘북미주 파견 사제 협의회’ 총회가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은 당연직으로 이사회 임원이 되기 때문에 참석하였습니다. 6월에는 ‘북미주 파견 수녀 협의회’ 피정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8일 피정을 함께 해 주기로 했는데 팬데믹으로 연기되었다가 이번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7월에는 ‘미주 엠이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동북부 엠이 대표신부이기에 참석하였습니다. 왕복 12시간이고, 시차가 3시간이 나는 거리입니다. 같은 미국이지만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매번 잘 다녀올 수 있는 것은 저를 도와주시는 ‘수호천사’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아침에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니다. 어떤 분은 차량 봉사를 해 주시고, 집 밥을 해 주십니다. 어떤 분은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을 볼 수 있도록 안내 해 주십니다. 제가 능력이 있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제가 서품을 받은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수호천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분들이 아직 동부에 오지는 않았지만 언제가 동부로 오시면 저도 ‘수호천사’가 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파견된 사제나 수도자들은 비자가 30개월입니다. 예전에는 60개월이었다고 합니다. 60개월이면 5년이기 때문에 임기를 충분히 마치고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비자가 30개월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기 중에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한번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시간도, 비용도 감수해야 합니다. 미국의 법이 엄격하게 바뀐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비자를 이용해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자 기간이 끝났음에도 더 머물려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자와 관련해서 미국의 법에 저촉되는 일이 있었다면 미국의 법은 비자기간을 축소하는 결정을 내렸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종교인이기에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종교인이라서 세상의 법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인이라면 하느님의 법도 잘 지켜야 하지만 세상의 법도 잘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셨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느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느냐?” 가을을 기다리며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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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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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사랑과 분별의 지혜-
밤새동안 풀벌레 찬미 노래에 새벽 4시쯤부터는 줄기찬 매미 찬미 소리에 웬지 서늘한 느낌이 들어 달력을 보니 어제가 입추立秋였습니다. 이젠 가을의 시작입니다. 세월흘러 나이들어갈수록 저의 관심사는, 영원한 탐구 대상은 단연코 ‘사람’입니다. 사람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요 그리스도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사람에 대한 탐구는 끝이없습니다. 결국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다! 그분은 우리의 희망이시며, 그리고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 세상에 젊음을 가져다 주신다. 그분께 닿는 모든 것이 젊어지고 새로워지고 생명으로 가득해 진다. 내가 모든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첫말은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다 그리고 그는 너희가 살아있기를 원한다.”(1항)
이미 3년전에 발표한 299항으로 이뤄진 교황님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다(Christ vivit)”라는 사도적 권고의 가르침중 제1항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며칠전 방문했던 젊은이들에게, “예수님이 여러분의 위대한 친구가 되도록 하십시오.”라는 기사를 읽던 중 뒤늦게 발견한 문헌이었습니다. 참으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은, 성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했고 따랐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위대한 친구로, 도반으로 둔 이들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우며 자유롭고 행복합니까? 마르지 않는 매력의 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수도형제가 엊그제 수도원에서 빌려다 준 김준엽 선생의 자서전 5권을 어제 새벽부터 틈틈이 읽기 시작하여 오후 4시30분쯤 독료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위인들을 만났는지 모릅니다. 난세에 인물이 난다 했습니다. 아마 한반도의 역사중 가장 위인들을 많이 배출한 때가 임진왜란시의 선조임금 시대와 후의 정조대왕시대, 그리고 일제 강점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세에서 만나지 못한, 당대 별처럼 반짝였던 위인들을 어제 5권의 독서를 통해 참 많이 만났습니다. 사람만날 욕심에 끊임없이 읽는 사람들에 관한 자서전이나 평전입니다.
아마도 김준엽같은 위대한 대학총장은 앞으로 더 이상 나올수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분의 인간관계의 깊이는 참으로 끝이없었습니다.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다, 라는 세 건강비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제는 성녀聖女처럼 사시다가 만100세로 선종하신 "이순임"고모님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1922년 생이니 만 100세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 문상할 계획입니다. 3년전 2019년 찾아 뵜던 고모님입니다. 어찌하여 조카인 저를 잊지 않고 병석에서도 제가 걸렸던지 선물금 20만원을 보내 주셨고 감사인사차 찾아뵜던 고모님입니다.
90세까지 매일 성서 필사를 하시며 새벽기도를 바치며 6남매를 가난중에도 훌륭히 키워내신 고모님은 일곱째 오빠인 제 아버지의 바로 밑에 하나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참으로 눈물로 성인 아우구스티노를 키워냈던 성녀 모니카처럼 참으로 사랑과 지혜를 겸비했던, 눈물의 기도로 자녀들을 키워냈던 독실한 성결교회 신자였습니다.
오늘은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이자, 요즘 거의 몇 달 동안 아침 식사후 “십자가의 길” 기도를 소리내어 바치는 문도미니코 수사의 영명축일이라 어제 저녁식사 때는 조촐한 축하식을 갖기도 했습니다. 문수사님의 배경에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믿음의 큰 누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람은 혼자가, 섬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무수한 사람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나타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루고 있는 형제자매들입니다.
복음적 가난과 연구와 설교를 중시했던 도미니코회의 창립자인 성 도미니코 사제는 만51세를 사셨습니다. 성 대 알베르토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자도 도미니코회 소속입니다. 성인에 관한 일화도 큰 깨우침이 됩니다. “성인은 육류를 피했으며 정해진 단식 시간과 침묵을 준수했고 사치스러운 침소를 피하고 될 수 있는한 가장 누추한 거처와 초라한 옷을 선택했다. 그의 입술은 슬픔이나 다른 부정적인 말 대신에,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만이 나왔다.”
이어 성인이 임종전 동료 수사들에게 남긴, “형제들간에 서로 사랑하여라. 겸손하여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라.”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오늘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의 하나인 묵주기도가 가톨릭교회에 널리 확산되어 활발히 보급되기까지 성 도미니코가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묵주기도가 수세기 동안 도미니코회의 핵심이었으며 교황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묵주는 성 도미니코의 수도회로 하여금 회원들의 삶을 완전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얻도록 해주기 위한 원리와 토대로 받쳐지게 되었다.”
또 오늘부터는 당분간 제1독서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신비가이자 예언자인 에제키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사랑하는, 또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나타나십니다. 바빌론 유배시 외로운 영적지도자 에제키엘에게 나타나신 주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의 말씀이 칼데아안들의 땅, 크바르강 가에 있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리셨다.” 장엄한 묘사와 더불어 예언자의 생생한 하느님 체험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대목 체험의 묘사가 아름답습니다.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지금까지 소개된 모든 분들이 저에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영적멘토가 됩니다. 사람없다 탄식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무수한 성인들이나 위인들과 친교를 나누면 됩니다.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를 멘토로 삼고 있다 합니다. 아마도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원한 멘토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일 것입니다.
바로 모든 성인들은 물론 모두의 수렴지점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이 깊어질수록 참나의 실현이요 시공을 초월한 무수한 성인들과의 친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언제나 깊은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언젠가 저녁 불암산을 보고 써놨던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참으로 저녁 불암산처럼, 큰 믿음에 깊은 겸손과 지혜, 그리고 고요한 사랑을 지녔던 그리스도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제가 늘 사랑하는 침묵의 멘토 불암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가 제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불필요한 일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지혜로운 분별의 처방을 주십니다.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져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일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이런 자연이적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만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를 그대로 반영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에 나오는 주님의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가 의미심장합니다. 제자들은 무지로 몹시 슬퍼했지만, 참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가, 참 자유인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께는 필히 통과해야할 파스카의 관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사람들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에 결정적 열쇠가 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입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 모두 삶의 중심에 새롭게 맞아들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제 “예닮기도”중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신비,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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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일반 전시실에서 그림 한 점이 없어졌습니다. 난리가 났지만 그림의 행방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야 범인이 잡혔습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의 화가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이탈리아의 것이다.”
이 도난 사건으로 인해 되찾은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해졌습니다. 그래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이 사건 전에는 그렇게 관심이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눈썹도 없는 여인의 초상화, 그러나 여기에 스토리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의미를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남을 쫓아가며 사는 것 역시 스토리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남과 다른 나만의 멋진 스토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의미를 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곳에서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멋진 스토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런 스토리를 만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일행이 카파르나움에 이르렀을 때, 성전세 납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성전세는 성전 유지와 희생 제물의 비용을 충당하는 것으로,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이 매년 내는 인두세였습니다. 그러나 성전 주인이나 제관들은 납세 의무가 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라고 했으니, 주인은 하느님이고 제관들은 그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아드님이기 때문에 성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식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낚시해서 성전세를 직접 내게 하십니다.
성전세 내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한 공격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니라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부정하는 것으로 죄의 영역에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죄의 영역에 갇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굳이 낼 필요가 없는 성전세를 내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으려는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스토리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에 우리는 모든 믿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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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라질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영원을 믿는 고백이다(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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